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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주의가 부르는 생태계와 민족과 언어의 소멸

멸종-사라진 것들, 종과 민족 그리고 언어 /들녘/프란츠 M 부케티츠/2005년
                                   
                                                                                                                              - 김보일
 
 
 
 


지구 역사상 여섯 번의 대멸종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의 말처럼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죠. 모든 유기체들은 죽음 앞에서 평등할 수밖에 없죠. 아무리 강한 존재일지라도, 아무리 부귀한 존재일지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지구에는 수많은 동식물이 존재했다 사라졌죠. 지금까지 존재했던 생물 중 99%가 멸종했는데, 대부분 출현한 지 1,000만년 안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구에는 약 40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후 엄청난 멸종을 초래한 여러 번의 대멸종(Extinction)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의 대멸종은 고생대의 오르도비스기 말기에 온 것으로, 이때 삼엽충과 앵무조개 등 여러 껍질 생물들이 일시에 절멸했죠. 지구상의 49%의 생물을 멸종시킨 이 사건은 대규모 빙하기의 도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두 번째 대멸종은 고생대(약 5억7,000만 년 전~2억3,000만 년 전)의 데본기에 있었던 것으로 이 시기에 수많은 바다 생물들과 양서류가 대량으로 사라졌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때 연쇄적인 운석충돌로 75%의 종이 멸종했다고 추정합니다.

고생대의 마지막 시기인 페름기에는 세 번째 대멸종이 찾아왔죠. 이때 파충류와 양서류 등의 동물과 양치식물 등 대규모 식물군이 일시에 절멸했죠.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멸종으로 기록되는 이 대멸종으로 인해 육상생물의 80%이상과 해양생물의 90% 이상이 멸종했어요. 멸종의 원인은 혜성이나 운석 충돌로 과학자들은 추정하죠.

중생대(약 2억3,000만 년 전~6,500만 년 전)에 들어와서도 두 번의 대멸종이 있었죠. 트라이아스기에는 운석 충돌로 인해 파충류의 대부분이 사라지는 네 번째 멸종이 있었고, 백악기 말에도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암모나이트와 공룡들이 대부분 멸종하는 지구 역사상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대멸종이 있었습니다. 이때 지구상의 생물 약 50%가 사라졌습니다.

이 중생대의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종이 현재의 포유류와 조류들로서 신생대(약 6,500만년전~현재)를 거치면서 종과 개체수를 크게 불려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만약 네 번째의 대멸종의 없었다면 우리 인류는 아직도 공룡에 쫓기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겠죠.

과학자들에 따르면 약 45억년의 역사를 가진 지구에 처음 생물이 출현한 40억년 이후 지구상에 등장한 생물의 거의 90%에 가까운 30억 종이 멸종됐다고 합니다. 이를 계산해보면 약 1억 년에 6억 종, 1년에 6종의 생물 종이 명멸했다는 계산이 나오죠. 하지만 현재 지구상에는 1년에 150여종의 생물이 없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멸종율에 비하면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죠. 자연 멸종율의 25배가 넘는 속도니 말입니다. 왜 생물들이 이렇게 빨리 사라져 가고 있을까요?

프란츠 부케티츠 빈공과대 교수의 책 『멸종 사라진 것들』에서 저자는 “인간 지능의 발달로 이루어진 기술은 그 어떤 생물도 따라갈 수가 없다. 불도저, 회전톱, 그리고 자동화기 따위에 저항할 수 있는 식물은 물론 그 어떤 동물도 없다. 그러는 사이에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역사, 수백만 년에 걸쳐서 생성되어온 고유한 생물체의 형태들을 파괴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기술이 대별종의 주범이라는 거죠. 해양생물을 위협하는 바다의 오염, 열대림의 파괴, 바다에서의 지나친 어획 따위는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기술은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인간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술의 반생태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저자는 다른 종들에게 인간이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몇 가지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목적지향적이고 조직적인 사냥이 그것입니다. 상아와 모피를 얻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수달과 코끼리들의 직접적인 멸종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특정 생태계로 외래종을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들여옴으로써 토착종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카리브 해안의 여러 섬에 서식하는 인도 몽구스를 들여왔을 때, 이 몽구스들은 쥐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작은 파충류와 포유류까지 남김없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섬들의 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렸다고 합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간섭이 생태계의 재앙을 초래한 거죠. 1958년에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군도 핀타 섬에 염소 한 마리아 두 마리의 노루를 들여 놓았다고 합니다. 적은 숫자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어요. 15년이 지난 후 노루의 숫자는 3만 마리 이상으로 불어나 섬을 황무지로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셋째, 간접적이긴 하지만 종들의 멸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자인 라이흐흘프는 Josef H. Reichholf는 이런 사정을 두고 “우리는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의 우림들이 파괴됨으로써 이미 수백만 종의 생물이 멸종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가 초래하는 민족과 언어의 멸종

저자는 인간의 무지막지한 파괴행위가 안타까워서인지 다음과 같은 사례를 책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열대우림에서 고급목재인 마호가니를 얻기 위해서 목재회사들은 열대우림 속으로 들어가 마호가니만 잘라오는 것이 아니라 경비절감을 위해 불도저를 동원해 숲으로 밀고 들어가 필요 없는 나무들까지 인간은 쓰러뜨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익 이외에 다른 생명들의 가치는 안중에도 없는 인간의 한심한 행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본성은 인류 내부의 민족들 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내면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나 부족 또는 민족, 자신의 문화전통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 반면, 어떤 민족이나 자기들에게 낯선 것들에 대해서 편견을 갖는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보다 열등한 미개인종이라는 이유로 민족 살해와 문화 파괴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죠.

저자는 야생포획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민족의 경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경우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들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한 문명과 접촉할 때가 그 첫째요, 그들의 자연적인 생활기반을 빼앗길 때가 그 둘째요, 어느 국가제도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을 때가 그 셋째라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마야·잉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보리진, 아프리카 피그미, 시베리아 원주민, 이누이트(에스키모), 일본 아이누 등의 문명도 이런 이유로 해서 이미 소멸했거나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게 된 거죠.

그런데 민족의 소멸은 민족의 소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은 문화, 전통, 관습과 도덕, 의례, 축제, 언어의 공동체이기 때문이죠. 민족의 소멸과 함께 수천수만의 토속 언어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생물종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의 다양성도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미 펜실바니아주 스워스모대학교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해리슨 교수는 현재 지구상에 남은 7000종의 언어 중 절반이 21세기 말에 사라질 것이라 예측하면서 "특정 언어를 잃게 되면 그 안에 담긴 자연과 신화, 기억,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같은 몇 세기에 걸쳐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느낌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멸위기 언어연구소'도 전 세계 약 7천종의 언어 가운데 2주일에 한개 꼴로 이들 언어가 사멸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죠. 이런 속도대로라면 2100년까지 적게는 3천400개에서 많게는 6천120개의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언어의 소멸은 인류의 지식의 소멸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은 다양한 언어들의 사멸위기를 경고면서 언어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역설합니다. 다니엘 네틀의 책에 의하면 태평양 팔라우섬의 어부들이 수백 종의 물고기 이름과 서식지, 어로 관습, 어로 기술 등과 전 세계의 과학 문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의 몇 곱절이나 되는 어종들의 음력 산란 주기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또 북극 지역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은 어떤 종류의 얼음과 눈이 사람과 개, 또는 카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얼음과 눈의 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고 하죠. 또한 필리핀의 민도로 섬에 만 2천 명 정도가 모여 사는 하우누족은 450종 이상의 동물과 천 5백 종의 식물을 구별할 수 있으며 그 중 1천 종 이상의 식물을 야생에서 채취하고 약 430종의 식물을 재배한다고 합니다. 토지에 대해서도 10종의 기본 토질과 30종의 아종 토질을 구분하며 토양의 굳은 정도에 따라 네 가지의 다른 용어를 쓴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토질을 아홉 가지의 색깔로 구별하며, 땅의 지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할 뿐 아니라 땅이 경사진 정도를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낸다고도 하죠.

바로 이런 무궁무진한 언어가 바로 토착민들의 언어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착민들의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인류의 지혜를 잃는 것과 다름없는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부르던 식물과 동물의 이름, 그 언어로 말하던 사냥법과 종교의식 등이 언어의 소멸과 함께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죠. 어마어마한 정보의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죠. 그렇다면 그 언어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 언어들이 기록된 문헌들을 도서관에 보관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면 토착민의 소수언어들이 대개 문자[글말]로 기록할 수 없는 소위 ‘입말’이라는 것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 빌 서덜랜드 대학의 교수는 과학 전문지 네이처 최신호 2003년 5월 15일자에서 최근 500년간 소멸된 언어의 비율은 전체의 4.5%로 조류(1.3%)나 포유류(1.9%)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서덜랜드 교수는 삼림지대나 열대우림, 산맥 지대에 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듯 이 언어도 이런 지역에서 풍부하게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밀림지역이나 산맥지형은 고리지대로 이동과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세요. 왜 이곳이 생물종이 다양하고 언어가 다양한지 쉽게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이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인도, 멕시코, 카메룬, 호주, 브라질 등과 같은 밀림이나 산악지형에 몰려 있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요.

『멸종-사라진 것들, 종과 민족 그리고 언어』의 저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왜 우리는 사멸되어가는 민족과 언어에 흥분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서 다음 세 가지의 답을 말합니다.

-사멸되거나 멸종되는 모든 종들과, 멸망한 모든 문화, 사라지는 모든 언어와 더불어 학슬적인 정보도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류의 지식의 보고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종의 멸종은 우리 후손들에게 축소된 생물생활권을 남기기 때문이다. (생물의 다양성은 미래세대에게 남겨줄 재산이라는 말입니다.)
- 멸종한 것들 속에 경제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 종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다가는 커다란 이익을 놓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당장의 쓸모에만 급급하는 태도, 나만이 존귀하다는 자기중심주의적 태도, 바로 이런 태도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다른 민족과 언어를 파괴하는 증오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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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지랑
인간의 비합리적 선택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

행동경제학ㅣ도모노 노리오ㅣ지형(2007)
                                                                                                                             -  김보일
 
 


인간은 과연 합리적인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손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아닐까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공익(共益)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결실도 얻게 된다.”라고 말하죠. ‘보이지 않는 손’을 다르게 부른다면 '가격'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는 ‘보이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 사지 말라고 권유하는 존재도 없고요. 가격이 적당하면 사고, 가격이 비싸면 사지 않는 것이 소비자들의 일반적인 구매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매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보이지 않는 존재’, 바로 가격입니다.

시장의 가격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조절되고, 생산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는 논리가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핵심적 논리죠. 가만 놓아두어도 가격이 거래를 성사시키니, 정부는 범죄 예방을 위해 치안유지 차원에서 야경꾼들로 하여금 순찰이나 돌게 하고, 가급적이면 시장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야경국가론’입니다. 국가는 가급적이면 국민들의 생활에 시시콜콜하게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국민들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알아서,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릴 것이니, 국가는 뒷짐 지고 있으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일까요? 적어도 아담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의 자유주의 경제학은 합리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합니다. 스위스의 물리학자 베르누이의 ‘기대 효용 이론’도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죠. 기대 효용 이론은 행동의 귀결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경제주체의 판단은 결과에 관한 효용의 기대치에 입각하여 이뤄진다는 이론이죠.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결정한다는 이론이죠. 100만원의 봉급을 주는 회사보다는 120만원의 봉급을 주는 회사를 선택하는 것도 기대 효용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인 다니엘 커너먼(심리학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그러나 맞습니다.)은 효용을 부의 절대적인 수준으로 측정하는 것을 ‘베르누이의 착오’로 표현했죠.

예를 들어 K는 한 달 사이에 금융자산이 4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줄었고, P는 1000만원에서 1100만원으로 증가했다고 가정해볼까요.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요? 베르누이 같으면 최종적인 부의 수준을 척도로 K가 더 행복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P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심리학 실험이 말해주는 진실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최종적인 부의 절대치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또 다른 예를 볼까요. 6년 간 급여 총액은 정해져 있고, 두 가지 봉급체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첫 번째 봉급체계는 처음에는 임금이 낮은 편이지만 점점 상승하는 패턴이고, 두 번째는 처음에는 봉급이 높지만 점점 더 하락하는 패턴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민이 되죠? 그러나 아마도 점점 월급이 오르는 상승패턴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선택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합리적 관점에서는 초봉이 높고 그 후 조금씩 하강하는 패턴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입사 초기에 받은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고, 회사를 다니다 도중에 퇴직하더라도 퇴직 시점까지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강 패턴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손실회피성향’입니다. 즉 지금의 높은 임금이 준거가 되면 다음 번 임금이 감소하는 만큼을 손실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이 패턴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커너먼의 실험에 따르면 1000원의 손실이 주는 불만족은 1000원의 이익이 주는 만족보다 2~2.5배 컸다고 합니다. ‘1000’원의 절대치를 효용적 가치로 볼 때는 1000원의 손실이나 1000원의 이익이 모두 같다고 할지모르지만 그것을 심리적 가치로 보자면 내 손에 굴러들어오는 ‘떡’보다 내 손을 빠져나가는 ‘떡’이 몇 배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가치는 절대치가 아니라, 기준이 되는 ‘준거점’에 의존되어 측정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준거점 의존성(reference dependence)’입니다. 동일한 붉은 색이 검정색을 배경으로 했을 때와 하얀색을 배경을 했을 때 다르게 지각되듯이, 동일한 변화에 대해서도 준거점이 다르면 다른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행동경제학

부의 절대치의 크기만을 보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준거점 의존성(reference dependence)’과 함께 ‘민감도 체감성’과 ‘손실회피성’은 다니엘 커너먼의 ‘행동경제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민감도 체감성’은 같은 3도 차이지만, 기온이 1도에서 4도로 오를 때가 21도에서 24도로 상승할 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을 설명하는 인간의 행동 특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재화의 ‘효용적 가치’가 아니라 ‘심리적 가치’라는 것이 다니엘 커너먼의 ‘행동경제학’의 기본 전제라는 거예요.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은 ‘효용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간으로 보았다면 다니엘 커너먼과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을 결코 완벽한 이성으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지 않는다고 보았죠. 오히려 인간은 감정에 치우친 결점과 오류투성이일 수 있다는 거죠.

도모노 노리오가 쓴 행동경제학 해설서인 『행동경제학』에서는 커너먼이 창시한 ‘휴리스틱(heuristic)’과 ‘바이어스(bias)’ 개념을 소개합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불완전하지만 판단에 도움이 되는 주먹구구식 직감'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하죠. 휴리스틱은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이 내리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설명하는 데 아주 유효한 개념이죠.

가령 MP3를 구입한다고 할 때, 이 구매행위가 완전히 합리적이 되려면 시중에 나온 MP3를 모두 분석해야 하죠. 가격, 성능, 디자인, 애프터서비스 수준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죠. 고려사항이 너무도 많고,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도 부족하구요. 이 어려운 결정을 손쉽게 하는 것이 바로 ‘간편 추론법’, 즉 ‘휴리스틱’입니다. 좋은 회사, 인지도와 같은 것이 판단을 결정짓는 일종의 휴리스틱인 셈이죠.

그러나 좋은 회사, 인지도 같은 속성이 MP3의 질과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오류인 ‘바이어스’를 만들어냅니다. 일류회사 제품이라는 것을 믿고 덜컥 MP3를 구입했더니 그 제품의 질이 형편없다면 그건 ‘휴리스틱으로 인한 바이스어스의 발생’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거예요. 구매행위에 비합리성이 발생한 것이죠.

이런 비합리성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을 학벌로 판단한다든가, 출신지역으로 판단하는 것도 일종의 휴리스틱이고,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로 그 사람의 미적 감각을 이해하는 것도 일종의 휴리스틱이죠. 이런 비합리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도 안 되겠고,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도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우린 정보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 판단력과 상상력의 부족으로 곧잘 사고의 비합리성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잦죠.

수학적 확률이 인간의 행동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책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에게 자살과 타살 중 어느 쪽이 많은가 물어보면 대부분 타살이 많을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착각이 발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뉴스에는 자살보다 타살사건이 훨씬 많이 보도되기 때문에 이것이 휴리스틱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판단할 때 자주 활용하는 휴리스틱은 실제 사실이나 객관적인 평가와는 거리가 멀어요.

이와 관련하여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는 재밌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저자는 과학,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대중이 위험을 느끼는 원인을 설명하면서 불안은 확률이 불러오는 것이 아닌 본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커너먼과 같은 맥락이죠.)

책에 의하면 미국의 엔지니어인 C.스타는 1960년대부터 위험에 대해 연구해 왔다고 해요. 그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죽을 확률이 사냥을 하거나 스키를 타다 죽을 확률보다 훨씬 적은데도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훨씬 더 위험하게 느끼는 것을 발견했죠. 베트남 전쟁에서 죽을 확률이 오토바이를 타다 죽을 확률 정도밖에 안 됐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위험은 전쟁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죠. C.스타는 사람이 느끼는 위험의 정도가 다른 것은 자발성과 비자발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사람들이 스키와 사냥, 오토바이를 선택하는 것은 ‘자발적’인 욕구나 필요 때문이지만, 전쟁에 징집되거나 원자력 발전소가 집 근처에 들어오는 것은 ‘비자발적’이라는 것이죠.

이 흥미로운 과학에세이는 또 한 명의 심리학자 폴 슬로빅을 소개하죠. 그는 사람이 위험을 느끼는데 있어 자발성 변수 외에 위험의 원인, 피해의 정도, 노출된 사람에 따라 비례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어요. 비행기사고나 벼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위험에 노출된 사람도 소수에 국한돼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커너먼의 논리대로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확률과 같은 합리적 요소가 아니라 심리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기술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커너먼은 인간이 비합리적 존재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2년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우리가 한 일을 인간의 비합리성을 증명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겠다. 휴리스틱(heuristic)과 바이어스(bias)에 관한 연구는 합리성이란 비현실적인 개념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착각하기 잘하는 인간, 바로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지,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심하지는 마세요. 또 어떤 실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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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지랑
뇌가 만들어내는 엉터리 행복학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ㅣ대니얼 길버트ㅣ김영사(2005)
                                                                                                                          -김보일
 


컴퓨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달인이라면 몰라도, 스무 살의 삶의 달인이란 말은 형용모순이다. 컴퓨터게임이나 브레이크댄스와 같은 분야에서는 스무 살의 달인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만 스무 살은 여러모로 달인이나 고수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달인의 포스와 테크닉은 지긋한 연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수염이 지긋한 노인이 달인의 전형적인 형상이다. 구레나룻의 노인의 형상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의 투자 없이 고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무지 하나를 썰어도 맵시 있게 썰려면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고, 똥볼도 제대로 차려면 고군분투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이나 발레리나 강수지의 발을 본 적이 있는가. 정상인의 발이 아니다. 고사목처럼 뒤틀어진 그네들의 발을 보면 저것도 사람의 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저 되는 달인이나 고수는 없는 법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권력의 힘을 빌려 쟁취할 수도 없는 것이 달인의 삶이다.

달인들의 특징은 특유의 눈썰미다. 도자기를 굽는 화로 속의 온도를 특유의 직감으로 정확하게 감지해내고,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밀려오는 제품들 중에서 정확하게 어떤 제품이 불량품인지를 감지해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들의 눈썰미, 귀신의 감각을 빌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삶에서 불량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옷을 고르듯 삶을 선택할 수는 없다. 가격, 질감, 사이즈, 디자인 등 옷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은 많지 않지만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무수한 요인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번 선택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자부심도 예기치 않은 변수에 부딪혀 참담한 후회의 감정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무예의 달인도 삶에서는 번번이 이성의 칼을 놓치고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법이다. 우리들은 삶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변수들을 섬세하게 고려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이기보다는 ‘아차’를 연발하는 엄벙덤벙한 정신의 소유자이기 십상이다. 달력에 메모도 해놓고, 잊지 말자고 결심도 해보지만 정신은 늘 헛다리짚기 십상이고, 소소한 분실물들은 늘어만 간다.

그래도 이번만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해보겠다고 하지만 지구상 최고의 판단시스템을 가졌다는 인간의 인지시스템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아래 제시되는 삶 중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클릭하겠는가. 이번만은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란다.

첫째, 세계적인 기업인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만의 이야기다. 그는 혁신적인 경영 철학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시켰고, 장애인 편익, 은퇴 후 연금지급, 생명보험, 이익배분 등을 제공했고, 나중에선 회사주식의 1/3을 종업원들에게 배당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14일, 사랑받는 발명가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이스트만은 책상 위에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아돌프 피셔라는 젊은 독일 이민자다. 그는 대규모 노동자 폭동을 주동했다는 혐의(그는 사실 폭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노동조합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르던 악덕한 자본가들에 의해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는 저지르지도 않았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1887년 11월 11일, 교수대에서 외친 마지막 순간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책에서 이스트먼과 아돌프 피셔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단순한 행복론에 브레이크를 건다. 인생의 겉모습만 보고 그 속의 행복을 단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말라는 충고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는 왜 이스트만의 삶보다 피셔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대니얼 길버트는 우리의 뇌가 매일, 매시간, 매분 우리에게 속임수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길버트 교수는 우리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도 이런 속임수 때문이요, 최고급 자동차나 노트북을 사고, 짝사랑했던 그 사람과 결혼에 골인하고, 목표로 하던 대학이나 직장에 당당히 합격하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초고속으로 승진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뇌가 만들어내는 속임수 때문이라고 한다.

길버트 교수는 이런 속임수는 우리의 상상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새 자동차를 사면 매우 행복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 상상 속에는 잔소리하는 상사, 돈 빌려 달라는 친구, 십 분에 1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퇴근길의 주차 전쟁이 빠져 있는 셈이다. ‘새 자동차’라는 아이템에는 이렇게 많은 세부사항 동반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이런 세부사항을 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세부사항을 섬세하게 고려한다면 새 자동차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는 아이템이 될 수는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어떤 일과 관련된 세부적인 맥락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성능이나 기억용량에서 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연인과 헤어지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을 예상하기 쉽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알렉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피스톨로 날려 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나에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손가락을 잃는 고통쯤은 너를 잃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웅장한 제스처로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고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사랑이 소중하면 할수록 이별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손가락을 피스톨로 날려 버리면서까지 컴퓨터의 키보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삶은 의무사항이지 권장사항이 아님을 명심하자. 물론 이별이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현실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별을 하고서도 밥을 먹고 배설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속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삶은 드라마 속의 현실과는 다르다. 결국은 잊기 마련이고 살기 마련이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저자, 길버트 교수는 이를 ‘심리면역체계’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경미한 고통은 참다보면 사라진다. 그러나 커다란 고통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사라져주지 않는다. 엉겅퀴 풀씨처럼 자꾸만 들러붙으려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어떤 구실이나 명분을 붙여서라도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래, 그 사고는 내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다고 해서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야.”, “물론 그건 나의 실수였어. 하지만 그 실수는 내게 삶에 커다란 교훈을 주었어.” 옹색한 자기합리화처럼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심리면역체계’ 덕분에 인간은 비극을 넘어 다시 삶 속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나쁜 일, 피하거나 도망칠 수 없는 일은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켜 그 안에서 긍정적인 면을 본다. 가령 십 리 밖까지 다녀와야 할 심부름을 피할 수 없다면 “그래, 십 리래 봐야 4킬로미터에 불과한데 뭘, 누구는 40킬로미터도 뛰는데 그에 비하면 10분의 1도 못되는 거린데, 운동하는 셈 치고 다녀오지 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심리적 면역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앞의 슈퍼에 다녀오는 것은 마음과 몸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냥 다녀오면 그만이므로 심리적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질병에 대항해 몸을 지키는 면역체계처럼, 심리적 면역체계는 불행에 대항해 마음을 보호한다. 문제는 이 같은 뇌의 작용을 우리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이스트먼과 피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대부분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트먼으로 사는 것이 피셔로 사는 것보다 즐거울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우리의 두 삶의 빈칸을 채워 넣는 데 아주 서툴다는 것이다. 왜? 경험을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삶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두 삶의 빈칸을 채워 넣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부자의 삶은 행복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고달프다는 고정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고정관념이 뇌가 만들어내는 속임수라는 것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에바도 이런 속임수에 빠진다. 미국에만 오면 자신의 꿈이 이뤄질 줄 알고 헝가리에서 건너온 여주인공 에바를 포함한 세 명의 주인공은 미국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플로리다를 찾아 가지만 자신들이 상상했던 곳과는 딴판인 현실을 발견한다. ‘아메리칸드림’은 드림이었을 뿐 현실은 아니었다. 할리우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아메리카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주인공들의 생각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작 현실은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그곳에만 가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현실은 황무지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스트먼으로 사는 것이 피셔로 사는 것보다 즐거울 거라고 예상하지만 이스트먼의 삶 앞에 어떤 말 못할 황무지가 놓여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뇌가 이스트먼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채워놓아야 한다. 자, 무엇부터 채울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해 그의 삶의 빈칸들을 물질로부터 채운다. 좋은 가구, 자동차, 호화저택…그러나 이 대목에서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더 큰 골칫거리는 뇌가 상상에 첨가하는 내용보다 거기에서 빠뜨리는 내용 때문에 생긴다.”라고.

새 자동차를 샀을 때의 삶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때 우리는 행복한 드라이브와 피크닉을 첨가하지만 그 차를 얻기 위해서 견뎌야 했던 잔소리하는 상사, 돈 빌려 달라는 친구, 십 분에 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퇴근길의 주차 전쟁을 빠뜨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가 범하는 세부사항의 누락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행복학을 신봉하게 만든다는 것이 길버트 교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다.

그렇다면 미래의 행복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현재를 사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그러려면 행복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행복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많은 사람이 행복을 미래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미래를 위한 준비는 필수다. 그러나 미래에 끌려가는 삶, 현재의 만족을 유예시키기만 하는 삶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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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자유화를 향한 문학적 저항
열일곱 살의 털ㅣ김해원ㅣ사계절(2008년)
 
 
                                                                                                                                  -김보일


대한민국에서 머리를 깎아야 하는 집단은 넷이다. 먼저 승려, 다음은 죄수, 그리고 군인, 마지막으로 학생이다. 승려는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는다. 삭발은 속세와의 절연을 의미한다. 욕망에 이끌리는 속세와의 삶을 단호히 청산하겠다는 의미다. 군대와 교도소에서 군인과 죄수의 머리를 일제히 짧게 자르는 것은 효과적인 억압과 지배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할까. 『감시와 처벌』의 저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하면 귀밑머리를 3센티로 깎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규율을 만든 것일까. 푸코에 의하면 다만 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규율을 강제한다는 것이 푸코의 대답이다. 군인과 죄수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는 것이나 학생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는 것이나 그 이유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는 강령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강력한 믿음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두발에 있어서 개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학교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 셈이다. 그러나 ‘두발자유화’만큼 찬반의 논란이 분분한 소재도 없다.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학교현장에서 두발 규제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 사태가 곧잘 신문지상에 보도되곤 한다.

이렇게 민감한 소재인 ‘두발자유화’를 본격적인 문학의 소재로 다룬 소설이 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열일곱 살의 털』이다. 자칫 지레짐작으로 이 책이 ‘두발자유화’의 주장을 외치는 생경한 고발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은 문학이 어떠한 주장을 말하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를 보여준다. ‘머리털’을 둘러싼 풍성한 담론과 작가의 녹록치 않은 성찰은 이 소설을 한낱 ‘소재주의적인 소설’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한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 소년 송일호다. (‘일호’라고 하니 ‘일호(一毫)’가 연상된다. 한 터럭이라는 뜻이겠다. 재미있는 명명이다. ‘쪼잔’하고 물컹했던 범생이 일호가 학교의 강압적인 두발규제에 맞서 정학을 당하고 1인 시위를 벌이면서 나와 가족과 세계에 대해 눈을 뜨며 ‘야물딱지게’ 커가는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속단은 이르다. 내용은 기대 이상으로 풍성하다. 두발단속에 저장하는 주인공 송일호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이발소인 태성이발소의 3대 이발사다. 고조 할아버지는 고종황제 시절 단발령을 따르지 않는 백성들의 상투를 자르는 관직, 체두관이었다. 머리칼을 자르는 가업으로 삼는 집의 손자가 머리칼을 자르는 것에 저항한다는,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이 소설에서 시종 긴장과 흥미를 이끌어낸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믿고 살아온 할아버지의 ‘세상의 모든 머리털은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고, 아이들의 머리털은 부모의 동의를 얻고, 어른은 스스로 허용해야 이발사가 가위를 든다.’라는 ‘두발 철학’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발사 가족이라는 특수한 일호의 가족사다.

할아버지가 보름마다 해주는 '삼삼삼'(앞머리, 뒷머리, 옆머리 모두 3㎝) 이발 때문에 입학식 날부터 '모범생 1호'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은 일호는 체육선생이 두발 규정을 어긴 아이의 머리에 라이터를 들이대며 위협하는 것을 보고 돌변한다. 이 과정에서 일호는 ‘열일곱 살의 털’은 단순한 ‘털’이 아니라 인격과 인권의 문제임을 깨닫고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마포구 도원동 일대의 재개발을 놓고 주민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나뉘자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 반대를 해야 쓰겠습니까? 우리가 따라야지요.”라며 찬성파로서 주민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재개발을 하게 되면 개발 이익은 건설업체가 챙기고, 영세한 주민들은 살던 집마저 빼앗겨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손자, 일호의 1인 시위 사실을 알게 되자, 교내 이발소에서 학생들 머리를 별 모양으로 깎으며 손자에게 힘을 보탠다.

일호가 체육교사의 라이터를 빼앗아 내던진 바로 그 날. 17년 전 원양어선을 탄 이래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가 돌아온다. 다음날 학교 상담실로 불려간 아버지는 학생부장에게 “바리캉으로 머리를 미는 행위는 반인권적”이라며 맞선다. 1980년대 운동권 세대를 상징하는 듯한 일호의 아버지는 학생부장에게 거의 준비된 연설문에 가까운 훈계를 늘어놓는다. “ 아이들의 반대의견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묵살하고 제재를 가하다 보면 올바른 교육을 해칠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은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대한민국의 경직된 교육현실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는 점에서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겠다.

1895년, 고종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단발령을 단행한다. 짧은 머리는 사실 위생개혁의 일환이었다. 그 시절이야 샤워 시설이나 온수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이가 득시글거리던 시절이었으니 짧은 머리가 위생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신체의 자유, 인권에 대한 시민의식도 그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 한겨울에도 하의 주머니를 꿰매게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학생으로서의 절도와 품위가 손상된다고 으르대던 군사독재시절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열일곱 살의 털』은 이런 점에서 좋은 타이밍을 맞았다. 더구나 한 영화사에서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이다. 과연 열일곱 살의 머리털은 누가 관리할지, 두발자유화에 대한 사회 각계의 성숙한 의견 교환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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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주눅 들지 않는 2인조 가족

2인조 가족ㅣ샤일라 오호ㅣ양철북(2009년)
 
                                                                                                                         - 김보일


샤일라 오호의 소설, 『2인조 가족』은 구질구질한 궁핍의 이야기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은 가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활달하고 씩씩하고 꿋꿋하다. 주인공 야나는 예측불가의 괴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사춘기 소녀 야나는 남자친구와의 근사한 데이트를 상상하고 복권에라도 당첨되어 좋은 옷도 사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꿈꾼다. 그러나 야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스타일을 챙기기에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냐가 누군가. 가난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할 말도 못하는 소녀가 아니다. 할아버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한술 더 뜨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다. 거짓말 9단에 사람들이 내다버리는 철학책에서 얻은 인문학적 지식도 보통은 아니다. 나잇살도 지긋하니 체면 같은 것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이 발랄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망측한 발언들은 망측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적이다. 그 나이쯤 먹으면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감도 없고, 체면치레 같은 것은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손녀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시대보다 몇 광년은 앞서가는 삶을 살고 있는 노인네다. (이 노인네의 작중 발언을 야곰야곰 음미해 보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중의 하나다.)

왜 사냐는 아냐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나는 화려하게 꾸며 입고, 인생에 만족하고, 배터지게 쳐먹고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려고 살고 있어. 내가 두뇌가 되어 그런 무리 대신 생각을 해주는 거지.” 맞다. 이 노인네의 사는 방식은 우리네 뻔한 삶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이 노인네, 겁이 없다. 악착같이 벌어 조금이라도 비축해두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산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우리네 태도를 이 노인네는 맘껏 비웃는다. 아마로 『마시멜로 이야기』를 들먹이며 현재의 주검 위에 미래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덜떨어진 성장주의자에게 이 소설의 한 대목을 들려줘도 좋겠다. ”고마워. 인생! 우리가 사는 공간에 정확하게 경계를 그려줘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가방에 심하게 정강이를 차이자 아마도 이런 순간에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상상한 내용이다. 현실의 불운 속에서도 우리는 아냐처럼 얼마든지 유용한 격언을 발명해낼 수 있다. 그 격언은 불우를 견딜 수 있는 포스와 유머를 만들어준다. 이 소설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둘째, 솔직하다. 마음이 시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사양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분증의 출생년도를 1799년으로 위조해놓고, 경찰에게도 자신이 실제로 1799년이라고 부득부득 우긴다. 미칠 일은 옆에서 그녀의 손녀 아냐까지 가세해 같이 우긴다는 거다. (세상은 인민들에게 상식을 요구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이런 무뎁뽀 인민들이 한 둘이 있어주어서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귀여운 몰상식 만세! 한번 놀아보자는 유희정신으로 똘똘 뭉쳐 자본주의의 성장 이데올로기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 불온한 상상력 만세!)

셋째, 이 노인네가 원하는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삶이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고 자고 싶으면 자는 삶이지, 누가 자란다고 해서 자는 삶이 아니다. 따로 정해져 있는 취침시간에 잠드는 그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양로원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이 노인네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그는 양로원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엘 가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판사들을 위해 멋진 일장연설까지 준비한다. 상식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멋지게 한방 먹일 태세다. (독자들은 이 노인네가 상식의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한방을 먹이느냐에 끊임없이 주목하게 된다.)

어떻든 이 노인네는 자본주의의 생산원칙이 강요하는 방식에 고분고분할 마음이 애시당초 없다. 그는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원칙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애초부터 다르게 살아보기로 아주 작정을 한 노인이다. (이 노인네가 젊어서도 이런 삶의 원칙을 고수했는지는 의문이다. 설령 이 노인네가 젊어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했다 할지라도 늙어서라도 이런 변칙의 삶을 산다고 해서 주착이니 어쩌니 토를 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늙어서라도 제 의지와 원칙대로 살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박수를 보낼 일이지 비난을 보낼 일이 아니다.)

넷째, 이 노인네 말빨이 장난이 아니다. 그의 말빨은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쓰레기 철학책에서 얻은 오랜 내공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발언에 철학적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예리한 직관, 시적인 통찰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슬퍼 보이냐는 손녀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네가 슬픈 건, 멍청한 송아지이기 때문이야. 송아지들은 눈이 슬프거든” 슬픔은 생활의 조건 같은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예 한편의 시를 쓰고 있다.

이 노인네와 아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이라는 것은 아주 편협하고 옹색한 가족주의다. 가족은 서로 품고 이해하는 나눔과 공감의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아냐와 할아버지는 훌륭한 ‘2인조 가족’이다. 피는 한 방울도 섞지 않았지만 노인의 기질은 그대로 아냐에게 유전된다.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 수 있는 정신, 바로 그것이 사람을 하늘로 여기는 인문정신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어지간한 삶의 비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삶을 공중에 살짝 띄워보겠다는 유머정신이기도 하다. 유머정신이란 현실의 질서를 뒤틀어보겠다는 반역의 정신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가 바로 아냐다. 똑똑하고 건방지지만 꽤나 사색적이고 문학적이다. 게다가 살짝 염치가 없기까지 하다. 자신의 체스선생이 그녀를 초대해 약간의 과잉 제스쳐(?)를 보이자 아냐는 그를 밀치고 집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런 정신없는 비극의 와중에서도 생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낚아내어 빼어나올 수 있는 담대함이 아냐에겐 있다. 아냐는 그런 점에서 얼빠진 정신주의자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배고픔의 실체가 뭔지를 똑똑하게 아는 아이다. 그런 아이의 내면, 그런 아이의 유머, 그런 아이의 사랑을 들여다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 쓰러져 가는 임대주택의 지하에 살면서도 자신의 집을 “우리 집은 엄청나게 넓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 집은 세계사에 존재했던 모든 중요한 건축물의 특징을 조금씩은 다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집은 콜로세움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베니스와 제노바 공화국 총독 관저처럼 천장이 높고, 발할라 궁전만큼이나 황량하고, 도시 변두리와 주택가처럼 황폐하고 왕의 무덤처럼 서늘하고 음침했다.”라고 묘사할 수 있는 여유는 칭찬해줄 만하다.

대체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소한의 의식주와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유럽식 사회보장제도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난을 궁상맞게 연출하지 않아서 좋다. 가난해도 철학을 알고 시를 알고 웃음을 안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모든 여유를 부릴 줄 안다. 심지어는 양로원에서조차 아냐의 할아버지는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는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내가 실없는 소리를 잘 하잖아요. 내가 죽긴 왜 죽어요? 정신은 어디에서든 자유로워요. 그리고 여기는 때 되면 어김없이 밥이 나오고요.” 비럭질을 해먹어도 할 말이 있다는, 그 모습이 참으로 늠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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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2009.06.16 13:37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_ 닉 혼비 (지은이), 이나경 (옮긴이)/청어람미디어


그동안 닉 혼비의 책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무수히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읽지 못하고 있던 바, 이 책을 만났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남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책에 공감을 하며, 어떤 책을 읽다가 집어던지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기에 당연히 관심이 갔는데, 더구나 그는 소설가이며, 소설가치고 위트와 재미있는 문체를 추구하는 작가로 소문이 났는데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은 내 관심 분야인 소설이라 망설이지 않고 읽게 되었다.(헉헉!)  


이 책은 <빌리버>라는 미국의 문화서평지에 2003년 9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연재한 칼럼을 엮은 책이다. 서평집이라고는 하나 읽은 책들을 통해 자신의 견해와 관점, 단상을 밝히는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어 기존의 서평집들에 비해 그 재미를 훨씬 많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 


닉 혼비는 책머리에서부터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는데 지루한 책은 제발! 읽지 말라거나, 분명히 두껍고 지루한 책 읽으면서 잘난 척하려고 눈물나도록 들고 있는 바보짓은 하지마라고 하고, 남이 읽고 좋았다는 책을 본인이 재미없었다고 잘난 척하며 '그깟 책이 무슨, 수준이 낮구만' 따위의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고 충고 한다. 독자는 그 나름대로 공감하는 책이 따로 있다는 거다. 그 책이 자기계발서니 칙릿이니 추리소설이니 고전이니 간에.  


사실 그의 충고는 책을 읽으면서 늘 생각했던 바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이었다. 누군가 읽고 추천하면 무조건 읽어봐야 했다. 읽으면서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쉽게 던지지 못했으니 말이다. 또 장식을 위해 사둔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은 작가나 독자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특히 그가 매달 주문하고 읽지 못하는 책들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일일테니 말이다.(장담하건대, 그 습관을(마음에 드는 책은 일단 사고 보는) 고치면 출판사는 망해버릴 것이다!) 


책은 닉 혼비가 매달 구입하는 책과 읽은 책으로 나누어 서평이라기보다는 책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읽은 책에 관한 본인의 단상이나 이 책을 읽으니 다른 어떤 책이 생각난다며 그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어느 작가, 책에 대해선 무한한 애정을 보이기도 한다. 또 매달 구입한 책을 읽지 못하게 된 이유나 혹평을 한 책(읽다가 집어 던진)에 대해 글을 썼다가  <빌리버>편집위원들에게 소환(!) 당한 일을 쓰기도 한다. 웃기는 것은 그가 <빌리버>와 비슷한 책에 대한 언급을 하자 <빌리버> 편집자들이 편집자주로 올린 글이었다. 우리는 닉 혼비에게 매달 칼럼을 쓰도록 원고료를 지불하고 있긴 하지만,<맥스위니>13호를 언급하라고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두는 바다. 닉 혼비로선 책이 나온 후에야 편집자들의 글을 읽었을 테니 그 상황만 생각해도 재밌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닉 혼비가 『폼페이』를 쓴 로버트 해리스와 가족이며(매제란다) 그의 아들이 자폐증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디킨슨을 좋아하고, 전기 소설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이언 뱅크스의 책을 읽고 울고 싶어하는 심정이나(그는 책 뒷표지의 책소개에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그 심정 나도 알겠다.ㅋ) 가끔은 읽지 않겠다고 멀리 꽂아둔 책장에서 우연히 떨어진(아들이 빼내어 놀다가 나둔) 책을 보며 이런 책을! 하며 새롭게 그 책을 발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이것 역시 우리도 가끔 하는 행동!^^) 또 그는 희한하게도 거의 아시아의 번역서를 읽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영문으로 펴내는 책들이 얼마나 많겠냐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샀음에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아시아의 독자로서!) 


그가 소개하는 모든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은 책이나 눈독 들인 책들이 소개되면 은근 반가워진다. 또 그가 강추하는 책들은 얼른 읽어보고 싶어지고 그동안 망설이던 책들은 구입을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독특한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의 칼럼을 보니 나도 어느 달에 한번 닉 혼비처럼 구입한 책과 읽은 책들을 정리하고 그의 형식대로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튼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나를 유쾌하게 해주었다.^^  곁에 두고 있다가 그가 추천한 책이 번역되어 나오는 상황을 기다려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만다 에어 워드의 『실종』기대함!^^


 


 주의: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분들은(작가나 소설을 잘 모르거나) 썩 재미를 보지는 못할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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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타자기로 글을 쓰며 거대기술에 저항하는 근본주의자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ㅣ웬델 베리ㅣ양문(2002년)
 
                                                                                                                         -김보일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의 저자, 웬델 베리는 1956년산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를 가지고 글을 씁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컴퓨터를 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입니다. 컴퓨터를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력은 자연의 질서를 위배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크는 컴퓨터에 반대합니다. 그 역시 컴퓨터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편리함을 얻기 위해 자연과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진정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는 것이 웬델 베리의 결벽증에 가까운 견해죠.

웬델 베리는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자연을 약탈하는 일에 연루된다면 양심상 어떻게 자연 파괴에 반대하는 글을 쓰겠는가?”고 말합니다. 베리는 자연을 약탈하는 어떤 기술에도 동조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자죠. 그는 “컴퓨터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평화나 경제적 정의, 생태적 건강함, 정치적 정직, 가족과 공동체의 안정, 선한 노동, 그 어떤 것에도 우리가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라 보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면서 각종 오염물질을 만들어내는 컴퓨터를 쓰는 소비자, 비료를 뿌려 재배한 먹거리를 사는 바로 당신이 문제라고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전기시스템은 발전 설비를 갖추고 선로망을 통해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 공급된 전기를 다양한 형태로 소비할 수 있도록 전자제품들을 생산해내는 가전업체, 발전소에 필요한 화석연료를 공급하는 유조선과 선박회사,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시추선과 이를 정제하는 정유공장 등 소규모 시스템들을 그 속에 포괄하는 거대시스템입니다. 호미나 낫을 만드는 대장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스케일과 복잡한 체계를 갖춘 것이 이 거대 기술시스템이죠. 외국으로 유학 간 친구와 실시간으로 채팅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거대시스템 덕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거대시스템 덕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삶의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증대해주고 사회의 모습을 새로운 방향으로 구조화하는 거대기술 시스템이 근본적인 결함과 불완전성을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는, 기술시스템에 포괄된 특정 구성요소에 내재한 사소한 문제가 시스템의 전반에 대한 순간적인 붕괴로 이어지는 대형사고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이런 거대기술시스템은 대규모의 환경파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대형 전력 사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산업시스템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구요.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의 저자, 윈델 베리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이런 거대기술시스템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웬델 베리가 컴퓨터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거대기술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간디의 물레’가 갖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교수가 그의 수필 <간디의 물레>에서 “물레는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 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 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 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 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로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라고 지적했듯이, 간디의 물레는 거대 기술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김종철 교수는 웬델 베리와 같이 확장지향적인 현대기술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자로 통하죠. 그에겐 적당한 타협이 없습니다. 현대문명에 대해서 근본주의자적 면모를 보이는 웬델 베리의 글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가 김종철 교수가 발행인으로 있는 잡지 《녹색평론》에 소개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어떤 점에서는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가 없지요. 근본주의자가 근본주의자를 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종철 교수는 ‘간디의 물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업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 사상의 문화적 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라고. 간디에게 물레는 단순히 도구 이상의 것이듯, 웬델 베리에게도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디에게 있어서 물레가 공동체를 재건하는 의미였다면, 웬델 베리에게 컴퓨터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의미였다고나 할까요.

거대한 현대기술의 비인간성을 간파한 이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였습니다. 그는 1961년 네루의 초청을 받아 인도의 농촌개발을 위한 자문으로 인도를 방문하게 됩니다. 슈마허는 당시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인도의 농촌현실을 둘러보고 제3세계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이끌어 내기 위한 기술로서 ‘중간기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대량 생산에 의한 대량 소비가 진행되면서, 대량 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 투하량의 증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의 대규모화와 거대 조직화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죠. 소득과 자원에 있어서 부국과 빈국의 갈등, 특정집단의 기술 독점으로 인한 불평등,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의 파괴 등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슈마허가 창안한 개념이 이른바 ‘중간기술’입니다. 기술은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증가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그 혜택을 돌려줄 수 있어야 하며, 기술은 자원을 남용하지 않으면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 중간 기술입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는 중간 기술이야말로 개발도상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개발 전략이라는 것이 슈마허의 주장이죠. 호미로 농사를 짓고 있는 제3세계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들여오게 되면, 농촌인구 과잉에 일자리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는 대다수의 제3세계에 더 많은 실업과 혼란을 야기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아니라 복잡한 기계에 무지한 농민들은 기계와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매여 버리게 된다고 슈마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슈마허 박사는 호미와 트랙터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기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중간기술이라 이름붙이고, 그러한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하여 '중간기술 개발 그룹'이라는 국제적인 단체를 조직하게 됩니다.

중간기술의 개념은 슈마허 스스로가 인정하듯 그것은 본래 간디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면서부터 영국의 섬유 공업이 인도 가내 공업을 파괴하고, 영국이 섬유 산업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많은 이윤을 가져가고 있을 때, 간디는 서양의 거대한 생산체계가 제3세계의 민중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한다고 생각했죠. 간디는 물레가 영국의 대규모 섬유공업처럼 인도인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며 인간성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슈마허의 ‘중간기술’은 바로 이런 간디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규모 기계화와 화학비료 및 농약의 대량 사용이 빚어낸 농업의 사회구조는 인간이 살아 있는 자연과 진정으로 접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구조는 사실상 폭력, 소외, 환경 파괴와 같은 근대의 가장 위험한 경향을 지지한다. 여기서는 건강, 아름다움, 영속성이 거의 진지하게 논의되는 일조차 없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무시되는 또 다른 사례로서, 경제주의라는 우상숭배의 필연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윈델 베리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윈델 베리 또한 슈마허처럼 ‘거대한 것’들을 반대하고 작은 것들을 지향합니다. 그는 거대 기술과 개발 위주의 발전이 아닌 소규모 기술과 개별적 특수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늘린다거나 새로 길을 닦음으로써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을 거부하죠. 여기에서『행복은 자전거를 타고온다』의 저자 이반 일리히가 자전거를 새로운 문명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도 ‘적정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자동차 산업도 복잡한 생산조직과 판매 시스템과 연료공급 시스템 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규모의 체계입니다. <자동차에서 자전거로>라는 일리히의 주장은 바로 비인간적인 ‘거대기술’에서 인간적인 규모인 ‘적정기술’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엔델 베리는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 없다』에서 기술혁신(기술혁신이라고 주장하니까)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새로운 도구는 이전 것보다 값이 싸야 한다. 둘, 그것은 크기 면에서 이전 것에 비해 작아야 한다. 셋, 그것은 이전 것보다 분명하고 명백하게 더 나은 일을 해야 한다. 넷, 그것은 이전 것보다 에너지가 덜 소비되어야 한다. 다섯, 가능하다면 새 도구는 신체처럼 어떤 형태로든 태양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여섯,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수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 가능하면 집 가까운 곳에서 구입할 수 있고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여덟, 그 도구는 유지나 수리를 위해 다시 맡길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작은 가게나 상점으로부터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 아홉, 그 도구가 가족이나 공동체 관계 등을 포함한 기존에 있는 어떤 좋은 것들을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윈델 베리였다면 지방에 세워지는 대규모 마트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대규모 마트가 지방에서 얻은 이윤을 대도시로 앗아가고, 지방의 고유한 문화와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네의 구멍가게나 재래식 장터는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 살아있는 곳이지만 대형 마트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거대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대기술은 인간에게 편리를 가져다주었지만 편리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 웬델 베리의 생각입니다. 왜 그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타자기로 글을 쓰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시는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는 ‘작은 것’, 적정한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웬델 베리였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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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시대에 문화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책

문화를 넘어서ㅣ에드워드 홀ㅣ한길사(2000년)
                                                                     
                                                                                                                        -김보일

나의 문화만이 절대적인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문화라는 자각 없이도 수많은 문화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말을 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추석에는 송편을 먹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행위들을 ‘문화’라고 자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행할 뿐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엄연히 문화에 속합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고, 음력 8월 15일이나 동짓날도 그저 평범한 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상기해보세요. 그런데 어떤 한국 사람이 미국사람에게 왜 너희들은 건방지게 부모에게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를 설득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설득의 답을 마련하는 책이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입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드 홀은 “다른 문화에 자신의 문화를 투영시키는 방법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이 저마다 다르고, 생각이나 가치관도 다르고, 그들이 사는 환경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만의 기준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강요하기가 일쑤라는 것이죠.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 이라고 불리는 티벳의 장례문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티벳인들은 윤회사상을 깊이 믿기 때문에, 죽은 후 자기의 시신(屍身)을 신성한 독수리가 먹어 치우면, 바로 승천하거나 아니면 부귀한 집안에 잉태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지 어찌 죽은 사람의 시체를 칼로 도막내 새들에게 던져줄 수 있느냐, 당신들은 미개인이라고 비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집단의 문화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즉 조장에는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이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건조한 티벳의 자연환경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쉽지 않은 건조한 기후에서 화장(火葬)을 하기 위한 나무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기에 충분할 나무를 구입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장(水葬)도 문제입니다. 건조기후에서는 물은 희귀한 자원에 속합니다. 수장은 이 희귀한 자원을 오염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겠죠. 또 흘 속에 묻는 토장(土葬)도 문제가 많습니다. 티벳의 메마른 땅에서는 시체가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국 티벳이라는 건조한 환경에서는 조장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화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화를 절대시하는 태도를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가 한국인의 개고기 식습관 문화를 야만적인 짓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태도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멘트가 있는 TV 광고가 있었는데, 우리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태도도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이유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문화는 침묵의 언어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만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 의견과는 다르더라도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원활한 의사교환, 즉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면 대화는 단순한 의견교환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성숙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를 넘어서』의 저자 또한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언어입니다. 언어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문화에도 언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처럼 소리가 있고, 소리에 따른 형상이 있는 구체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저자는 문화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개념을 이해하는 데 이 ’침묵‘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드워드 홀은 침묵은 먼저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똑같은 감각기관과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공통의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령 일본인들은 방 가장자리를 비워두는 반면 서구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며 가장자리를 채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감각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패턴화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각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런 상이한 감각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벽과 가구 그리고 실내 공간을 일본인들은 반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중심부를 채우는 반면 서구인들은 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가장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죠. 그래서 일본인들은 동부나 서부가 발달하고 중심부의 문화가 텅빈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문화를 황량하다고 생각하지요. 일본인들이 미국의 방을 보고는 중심부가 비었기 때문에 황량해 보인다고 평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문화에서 형성된 다른 감각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화권마다 공간 사용방식이 다릅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볼까요.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 학생이 미국인 친구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다가서면 미국 학생들은 놀라는 듯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나 라틴계학생들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가면 그들은 태연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바로 미국인들과 라틴계 사람들은 공간의 사용방식이 다르다는 점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한국인이나 라틴계 사람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라틴계 사람들이나 한국인들이 허용하는 접근기준보다 훨씬 더 관대합니다. 그들은 인사할 때 서로 콧등을 부비기도 합니다. 만약 미국 사람들에게 이런 인사를 했다가는 ‘성희롱’이라는 달갑지 않는 모욕을 감수해야할 것입니다.



문화에 따라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용방식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프록세믹스(proxemics)'라는 개념으로 저자는 각국의 공간사용방식을 말합니다. 문화권마다 개인마다 공간의 사용방식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를 편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근접한 거리를 편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 적정한 거리감각을 갖게 하고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프로세믹스에 관한 섬세한 고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는 이 ‘프로세믹스’를 충분히 고려한 것일까요.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설 곳조차 마땅하지 않은 출근길의 전철 안은 어떨까요. 상품의 진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람들의 동선에는 관심이 없는 대형마트는 어떨까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각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도시의 건물과 도로와 교통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사무실의 배치는 어떤 사람에게는 극심한 소외감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요. 한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간의 사용방식을 존중한다는 것이니까요.

저자는 현대적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 건강과 질병, 문화적 격차, 인종 간 갈등 등의 위기들이 바로 우리의 '공간'에 대한 감각이 획일화하여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사회의 소통양식으로서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이란 개념도 문화의 이해에 꼭 필요한 개념입니다.

고맥락 문화는 어떤 행위가 어떤 문맥에서 결정되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입니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날 훈련 중에 물 한 통이 생겼다고 해볼까요. 과연 누가 먼저 마셔야 할까요. ‘장유유서’와 ‘가부장제’라는 유교적 전통이 엄연히 살아있는 고맥락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당연히 고참자나 연장자가 물을 먼저 마실 것입니다. 누가 먼저 마실까 토론이 필요없죠. 그러나 유교적 문화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적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토론이 필요 없으니 효율적 사회요, 미국은 토론과 합의를 거쳐야 하니 비효율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한국 사람들은 문제해결을 토론에 의존하지 않고 나이나 직위와 같은 권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권위적 문제해결방식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유럽 전통의 모노크로닉(monochronic)한 시간관과 라틴아메리카나 중동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폴리크로닉(polychronic)한 시간관도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문화의 이해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개념입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선형적(線形的)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개 한 번에 하나씩 해나가는 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스케줄, 시간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들은 사회생활, 경제생활이 철저하게 시간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은 비선형적 사고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의 특징은 몇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이 체계에 속한 사람은 미리 계획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기보다는 사람끼리 이루어지는 관계나 일 처리 과정에서의 성취도에 역점을 둡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간섭합니다. 이들이 시간표에 맞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체계가 없었다면, 인간에게서 공업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홀은 말합니다. 그런데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장점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결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특정 개인, 기껏해야 두세 사람과 관련 맺는 관계를 강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유물이나 문화재를 이해한다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권의 사람들이 행동을 결정짓는 복잡다단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화, 즉 침묵의 문화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문화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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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에 마음을 맡기다
시가 마음을 만지다 - 시가 있는 심리치유 에세이 ㅣ최영아ㅣ쌤앤파커스(2009년)
 
                                                                                                            - 하신하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좋은 엄마로 아내로 사는 게 최고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여자로 산다는 것은 나는 뒤로 두고 가족이나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습관화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누군가 나에게 "뭐 먹고 싶니?"라고 물으면 남편이나 아이가 심지어 시부모님이 뭘 좋아하는지 5초안에 대답할 수 있지만 내가 먹고 싶은 건 한참 생각해야 한다. 어찌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됐는지 스스로도 나라는 존재를 자주 잊는다. 정말 나라는 존재를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전화기처럼 한동안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면 우울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이렇게 나를 잊다가는 서서히 그리고 영영 빛이 바래 결국 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잠수하기도 한다.  


  "가족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건 희생이 아니야. 가족은 남이 아니니까."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가족도 남이다. 내가 아니니까. 내가 가족을 가장 힘들게 하는 순간은 가족을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 때였다. 남편과 아이를 다와 다른 타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희생을 담보 삼아 내것처럼 만들려는 짓을 자기도 모르게 한다. 너를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가족을 구속하려 든다. 


    "그런데 이 허전함은 뭐지?"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을 붙잡고 이 힘든 일을 하는 게 왜 그렇게 좋냐고 물으면 내가 받는 게 더 많고 즐겁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들은 왜 그렇게 허전해하는 걸까? 내 개인의 경험으로 보아 자기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에게는 자가 치유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픈 곳에 저절로 손이 가기 마련이다. 자식이든 동물이든 남이든 아픈 이에게 손길이 더 많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 마음이 아프면 뭔가 그 아픈 곳을 문지르는 방법을 찾게 된다.  책을 골라도 아픈 곳을 달래줄 책을 고른다. 천 개 까지는 아니라도 작은 공감을 해줄 글들을 찾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역시 시가 제격이다. 상처 부위까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시? 언제적 얘기야?"
시집을 손에 잡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도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예쁘게 적어 코팅을 해서 친구들에게 선물을 해주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도 아니고, 스물도 아니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시는 어딘가 나와는 맞지 않은 옷을 입는 듯해서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곤 했다. 내가 시를 읽는 것은 반찬값도 쪼달리는데 백화점에서 명품을 신용카드 할부로 사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계부를 쓰자 치면 아이들을 위한 책은 생필품이고 자신을 위한 책은 사치품 목록에 들어가는 격이다.


 “나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시낭송은 머릿속을 혼탁하게 떠돌던 잡념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밑으로 가만히 가라앉히고, 둔감해진 감각을 예민하게 되살린다. 여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신선한 상념이 머릿속을 가만히 흐르듯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를 읽어본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줌마에게 이 책의 작가는 한술 더 떠서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권했다.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데서 나랏님을 욕하든 누드 퍼포먼스를 벌인들 어떠랴. 용기는 눈에 뵈는 게 없을 때 위로 올라오곤 한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이 책에 나온 시 한 편을 온전히 나만을 위하여 내 목소리로 나를 향해서 낭송했다.  


  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를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트려보자!




       "내 목소리도 제법 괜찮네, 자뻑인가?"
시를 펼쳐들고 목청 가다듬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연극 무대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나 연출 나 주연 나 관객. 이런 연극의 제목은 '나나나'로 붙여 보면 어떨까? 내 목소리가 내 귀로 들려오고 내 심장을 울리면서 나는 주인공만 받을 수 있다는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내리쐬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이런 착각이 얼마나 소중한지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착각의 연속극인 것, 이왕이면 재밌게라도 해보자가 나의 새로운 착각이다.  

글에서 말이 된 단어들이 동글동글 내 입속을 맴돌다 빠져나가 주위를 시원하고 달콤하고 아늑하게 만들고 있다. 시를 읽었다고 우울했던 인생이 갑자기 즐거워질 일이야 있겠는가. 다만 시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우울하고 고통을 받고 있구나하는 공감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나만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새싹처럼 마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게지. 더구나 내 목소리 속에서 내가 간절히 그리워하던 이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목소리지만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누구였더라?"
가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나와 혈연관계에 있는 여자들에게 전화를 건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딸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내 동생의 목소리, 내 딸의 목소리에 엄마가 목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이들의 말소리 밑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엄마 목소리가 너무나 그립다. 평온할 땐 생각도 못하다가 삶이 퍽퍽할 때는 엄마의 까칠한 손바닥과 굵어진 목소리가 떠오른다.
  "괜찮다, 다 괜찮다."
나처럼 살라고 말하는 엄마를 나는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딸들도 만나지 못했다. 나 또는 우리 못지않게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온  우리 엄마들은 딸들에게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몸으로 말했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너의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습관을 들이는 것보다 이미 습관화 된 것을 떨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조용히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발휘하고,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꾸기도 한다.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놓은 것 같은 시를 만났을 때, 그 시를 쓴 사람과 나의 마음이 시공을 초월해 하나로 연결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체험이다. 따뜻한 공감과 위로가 마치 수혈을 받는 것처럼 핏속으로 가만히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다."

자신을 위한 사치, 시를 읽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 나에게 시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딱딱해진 감성에 따뜻한 물을 부어 녹이는 일이다. 너무 섣부르게 굴면 혹시 부러질까 천천히 조심스럽게 끈질기게 따뜻한 물을 붓고 있다. 물이 점점 더 뜨거워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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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부르는 축제

축제와 문명ㅣ장 뒤비뇨ㅣ한길사
                                                    
                                                                                                                       - 김보일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축제


축제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먼저 록밴드의 등장입니다. ‘노브레인’이나 ‘크라잉넛’과 같은 펑키한 복장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이들의 괴성이 청중의 혼을 뺍니다. 관중들도 헤드벵잉을 하며 점점 축제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어서 비보이들의 현란한 댄싱이 끝나면 이번엔 촌극 시간입니다. 평소 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리던 학생부장 선생님 역할을 맡은 학생이 무대에 등장하여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읊으면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가 됩니다. 역시 바보스럽게 분장한 교장선생님이 등장하면 객석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집니다. 이때 학생들은 선생님이 언짢아하시지는 않는지 선생님의 표정을 살핍니다. 그러나 선생님들도 학생들과 같이 연신 즐거워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남녀노소, 상하좌우가 ‘크게 하나가 되는’, 이른바 ‘대동(大同)’의 축제입니다. 이런 축제를 통해서 학교는 전에 없는 활기를 되찾게 되고 학생들은 면학의 에너지를 충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축제에서 목소리에 잔뜩 무게를 잡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와 같은 가곡이나 부르고,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이 근엄한 연극을 한다면 그것이 어디 축제겠습니까. 그것은 학예발표회나 솜씨자랑에 불과하겠지요. 축제는 모름지기 떠들썩함, 광기, 무질서, 일탈이 있어야 제격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시청 앞 광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곳이 무질서와 광기, 일탈의 장소였던 셈이지요. 여러 가지 물감으로 페이스페인팅(face painting)을 한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노출을 감행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과감히 입을 맞추는 커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운행 중인 노선버스에 올라 함성을 질렀고, 어떤 이들은 도로를 점령하기도 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유치장 철창신세를 져야 마땅했지만 누구 하나 그들의 무질서와 일탈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광기와 무질서와 일탈을 찬양해 마지않았습니다. 2008년 촛불시위의 현장도 어느 정도 2002년의 시청 앞을 연상시킵니다. 평소에 다니던 도로의 중앙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함성을 질러대는 젊은이들은 질서를 흔들면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합니다.

축제는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먼저 매일매일 반복되는 피곤한 노동을 흔드는 행위입니다. 노동이 요구하는 엄정한 규칙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넥타이를 풀고, 만화의 주인공처럼 분장을 하고, 놀이의 장소로 성큼 뛰어듦으로써 축제는 시작됩니다. 축제의 시간은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고, 규범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는 놀이의 시간입니다. 평소에 근엄하기만 했던 교장 선생님이 상스러운 말을 내뱉기도 하고, 헤드벵잉을 하면서 샤우팅 창법으로 고래고래 목청을 돋우는 시간이 축제이지 않습니까. 교복을 입고, 우아하고 고상한 어조로, 학생 신분으로서 지켜야 할 것 다 지켜가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촌극을 해봐야 관객들로부터 ‘집어 치워’ 소리 밖에 들을 것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축제는 위반이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조금은 불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축제는 위험을 스스로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 시내를 가로지르며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황소떼가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비명과 탄성을 지르며 소에게 쫓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위험을 느끼는 자의 불안은 없습니다. 위험을 오히려 즐기겠다는 표정입니다. 심지어는 소의 뿔에 찔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목소리로 축제의 위험성을 말한다고 해서 이 축제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동물애호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산 페르민 페스티벌’에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다고 하네요.

『축제와 문명』의 저자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는 자신이 파괴할 수 있는 영역이면 어디나 점령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길, 운동장, 광장 등은 모두 조직된 집합체 내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나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길이나 버스 위가 춤판이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길은 평소에는 통행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축제는 바로 그런 일상의 규칙을 흔들고 위반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축제는 조화(cosmos)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축제가 지향하는 것은 혼돈(chaos)입니다.

“아주 고유한 의미로 축제는 사육제(carnaval)이다. 우리들의 슬픈 사육제가 아니라 휩쓸어 가며 파괴하는 축제를 말한다. 축제가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한 바로 전날에 벌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그럴듯하게 말해서 카니발(carneleva)-'살덩이를 걷어내기‘-희귀해지기 번에 전부 소비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는 소비이고 탕진입니다. 그러나 소비와 탕진은 자본주의의 일상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근검과 저축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규칙인 셈이지요. 축제는 이 규칙을 흔들어 버립니다.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감성의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시와 축제는 모두 일탈의 언어다


장 뒤비뇨는 신화학자인 멀치아 엘리아데의 견해를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축제란 대단히 강렬한 비사회적 삶을 공동의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며 집단적인 실체의 표현양식으로서 사회적인 것이다.”라고. 감성의 삶, 본능의 삶, 유희의 삶이 곧 비사회적 삶이겠지요. 특히 유희의 삶은 매우 비사회적입니다. 일터에서 노는 태도는 금물입니다. ‘놀고 있네.’라는 말은 분명 칭찬의 언어가 아니라 비난의 언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엄숙한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함께 놀아보지 않으면 대동단결(大同團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사원 야유회를 통해서 사장과 말단직원이 하나로 어울립니다. 기마전을 한다면 사장이 말이 되고, 말단직원이 사장 위에 올라탄다고 해도 흠이 될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그와 같은 축제의 장에서는 평소의 질서가 역전되면 역전될수록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장 뒤비뇨는 말합니다. “축제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을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라고. 왁자지껄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나면 한번 잘 해보자는 식의 굳센 단결 의식이 고조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놀이와 축제가 아주 무용한 것도 아닙니다. 떠들썩하게 소비하고 탕진하는 것이 축제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효용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축제가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라고 하는 장르와도 매우 흡사합니다. 시는 일상의 문법으로부터의 일탈인 셈이니까요.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진부한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관념의 영역, 즉 비물질의 영역이요, 호수는 물질의 영역입니다. 관념과 물질은 서로 다른 영역인데도 시인은 서로 이질적인 것을 상상력으로 연결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는 이런 비약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영역에서 ‘그해 겨울은 봄보다 따스했네.’라는 시적인 역설(paradox)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지요. 일상의 언어로는 이렇게 말해야 논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해 겨울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내 마음은 따뜻했다. 그러나 봄이 되어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내 마음은 그 어떤 겨울보다 추웠다.” 정확성 면에서 볼 때 일상의 언어가 시적인 언어보다 그 효용성이 크지만 그러나 시적인 언어만큼 재미는 없습니다. 시적인 언어에는 리듬이 있고, 비약이 있고, 놀이의 정신이 있으니까요. 장 뒤비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조화로운 영역을 고취시키는 방법을 예술가들이 가진 상상의 산물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세상에 혼란스러운 종말이 오지 않도록 한다.” 축제가 혼돈 속에서 진행되지만 축제에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어서 축제의 끝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인은 하고 있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언어들이 모여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 우리는 새롭게 구축된 언어를 통해 사물과 삶과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겠지요.



계급적 대립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는 축제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바보들의 축제』에서 일상에서 억압되고 간과된 감정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기회를 축제로 정의하면서 축제하는 인간의 본능을 가리켜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라 부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축제는 유사 이래 본능적인 욕구와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였습니다. ‘욕구와 감정의 발산`이라는 본질 때문에 축제에는 늘 정치적 저항의 동기가 숨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축제에는 기존의 기득권적 질서에 대한 반발, 풍자와 역설이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저항을 할 때는 자신의 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맨 얼굴을 드러내놓고서는 뻔뻔해질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축제에는 가면이 등장합니다. 가면을 씀으로써 인간은 좀더 대범하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고, 일상의 규칙을 좀더 수월하게 흔들어댈 수 있는 것이지요.

<봉산탈춤>에서 탈을 쓴 말뚝이가 양반 삼형제를 끌고 다니면서 그들을 골리고 조롱합니다.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少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로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알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이렇게 버릇없이 촐싹대다가는 평소에는 따귀라도 맞겠지만 축제는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시간입니다. 비록 눈꼴이 시지만 아랫것들의 무례를 적당히 눈감아 줌으로써 더 큰 저항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로 양반들은 자신들이 희화화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대범하고 관대한 척, 겉으로는 껄껄 웃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축제는 날카로운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에서도 탈춤이 공연되는 마을의 축제에 양반들이 기금을 출연했다는 것이 추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층집단이 지배계층에 가지는 불만의 물꼬를 적당히 터줌으로써 장차 야기될지도 모르는 대립의 날카로움을 무마해보자는 의도를 가진 양반측에서 보자면 축제는 체제유지에 꽤 도움이 되는 이벤트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흥성한 축제도 끝이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무미건조한 일상의 공간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허무와 고독만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하루하루의 노동이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력과 규칙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이성의 언어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더 크고 비범한 존재임을 축제는 떠들썩한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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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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