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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5.26 16:35

세계문학전집-019 휴먼 스테인 1
_ 필립 로스 저/박범수 역/문학동네,2009-12-15 00:00:00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고민을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아마 나무랄 데라곤 전혀 없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타고났으면서도 자신의 피부색과 뿌리가 한계가 된다고 믿은 나머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강도의 성형수술과 피부이식을 서른 번이나 했다는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중학교 국어시간 이후가 아니었을까. 흑과 백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라는 걸 전혀 몰랐던 나의 열여섯. 그러고 보니 필립 로스가 그리는 <휴먼 스테인>의 배경이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의 무렵이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과 백악관 주차장 등지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비서와 사랑을 나누며 세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강도 높은 스캔들을 선물했던 바로 그 해는 주인공 콜먼이 일흔 하나의 나이에 서른넷의 포니아와 사랑을 나누던 때와 일치한다. 버크셔 산악지대의 오두막에서 세상과 결별한 채 글을 쓰는 네이선은 콜먼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 콜먼의 친구이자 대변인 그리고 작가로 등장한다. 우린 네이선을 통해 콜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느낀다.

콜먼은 은퇴한 대학교수다. 유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학장을 지낼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학장으로서의 콜먼이 이룩한 업적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우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자존감을 찾고 싶었던 콜먼이 자신의 강의 시간에 오래도록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고 유령들(spooks)이란 표현을 썼다가 하필 그 단어에 검둥이들이란 뜻이 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온갖 비난을 당하고 쫓겨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무리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항상 씩씩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 아이리스를 잃게 되자 콜먼의 슬픔과 절망은 극에 달한다. 그를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준 이가 바로 서른넷의 포니아다. 그녀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부에게 성희롱을 당한 상처로 집을 떠났다. 훗날 결혼하지만 남편 역시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끊임없이 포니아를 괴롭히는 등 녹록치 않은 삶을 산다. 그래서인지 콜먼과 포니아는 만남과 동시에 서로의 결핍과 상처를 알아본다. 성공한 유태인인 줄 알았던 콜먼이 사실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인종 정체성을 앓아온 점이나 똑똑한 포니아가 스스로 문맹인을 자처해 살아가는 점은 비록 충격이긴 하나 20세기 끝자락의 비극을 잘 나타내준다.

그들의 사랑은 포니아 남편의 끈질긴 방해로 결국 파멸을 맞는다. 그것이 모두가 진정 원한 삶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원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를 숨기거나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었던 콜먼과 포니아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괄시는 흑인으로서 받는 멸시보다 오히려 나았고, 어린 딸이 당한 희롱을 친엄마조차 믿어주지 않는 현실을 견디려면 아는 것을 모른 체하며 살아가는 게 편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되었다. 콜먼과 포니아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든 건 세상이지만 세상은 그들을 상처 속에 살게 했다. 피부색을 바꾸고, 생김새를 고치고, 아는 것을 모른 체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세상은 아니건만, 마이클 잭슨이 그랬듯 콜먼과 포니아 또한 뾰족한 대안이 없던 탓이다. 화가 난다. 철이 든 순간부터 나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불편했다. 누가 어떻게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흑과 백, 로맨스와 불륜,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만 인생인가. 성별, 나이, 학력, 통장잔고. 그런 것들만 나인가. 도대체 나를 나답게 하는 기준과 삶을 삶답게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기준이 있다한들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꾸만 세상이 어렵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나다. 또한 콜먼과 포니아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해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결심의 첫 번째 증거로 감히 콜먼과 포니아의 영원함을 옹호한다. 비록 비아그라를 복용해야 하고, 육체의 탐닉이라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분노이므로. 우린 누구나 어떤 것에 속해있는 동시에 어떤 것에도 속해있지 않다. 흑백논리나 편견, 선입견 같은 것들은 결국 오점으로 작용할뿐더러 아무데도 도움 되지 않는다. 일흔 한 살의 남자가 서른 네 살의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와 타인이 다르다고 둘 중에 하나가 틀렸다는 억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마 그런 억측들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 나는 필립 로스의 모든 문장들을 버리고 내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문장만을 가슴에 담는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미국적인 문제들은 21세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성형수술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 앞에 망설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정의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삶의 전부다. 결국 필립 로스가 말하는 <휴먼 스테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내일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 written by 깊은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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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10.05.25 10:47
풀밭 위의 식사
_ 전경린 (지은이) /문학동네 ,2010-01-28 00:00:00

외로웠다. 더 외로워졌다. 요즘 느끼는 기분을 단지 외로움이란 단어에 가둘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다. 눈앞에 닥친 시간들이 벅찼고, 누군가와 나의 기대에 숨찼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멈춰버리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외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절실히 믿으며 버티는 나날이었다. 특별한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상처 입은 나비처럼 나도 모르게 자꾸만 몸을 사렸다. 나이 탓인가. 마음이 도전과 안주 사이를 널뛰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결정된 것 없는 20대의 끝줄기가 이토록 처절하게 외로울 줄 미처 몰랐다. 이대로 서른이 올까봐 두려웠다.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깜빡 든 낮잠처럼 놓쳐버린 시간은 누릴 틈도 없이 쉽게만 멀어져갔다. 그런데 누경을 만나면서, 더더욱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녀는 나와 닮았으며 또한 달랐다. 적어도 그녀는 버티고 있었다. 숨으려고만 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어느 누구보다 내 삶에 자신이 있었다. 일도, 사랑도, 삶도, 꿈도 내 것이면 다를 거라 믿었다. 지나친 긍정과 막연한 자신감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의 틈바구니에서 삶이라는 고통과 마주하며 사랑이란 감정에 온 마음을 내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다가올 내 30대도 누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자꾸만 다가오는 기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꼬꼬마였던 아홉 살부터 열여섯 소녀시절도 모자라, 심지어 청춘이 모조리 지나갈 때까지 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름 모를 끌림을 어쩌지 못해 기다림과 어긋남을 반복하는 서강주와 그녀의 관계 때문에 호흡이 가빴다. 지옥과 천국을 넘나드는 기분. 딱 그것만치 어지러웠다. 도대체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 막 스물다섯. 그때 나도 그랬다.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이 기대만 충만했던 어느 겨울, 한 달 간의 유럽여행 끝자락에서 마음을 흔드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 단지 그곳이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예술의 도시였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후로 쭉 파리는 다시 가지 못할 꿈의 도시인 것만 같다. 그를 만난 겨울은 봉인된 봉투 속 편지처럼 비밀스러운 곳에 갇혀서도 여전히 숨을 쉰다. 열 시간의 물질적 거리와 여덟 시간의 시차만이 그와 나를 가르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만, 3년 전 내가 과연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할 뿐. 누경의 서강주를 향한 마음이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듯, 시간과 공기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해하거나 받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누경과 서강주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누경에게 한없이 다가가려는 또 다른 남자 기현은 왜 하필 누경이었을까. 누경은 왜 기현이 아니라 인서였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만든 사랑의 묘약이 정말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삶은, 세상은,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정석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삶이란 것은 원래 유리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투명한데, 그래서 절대로 흐릿해지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든 우리의 마음이 자꾸만 유리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흐리게 하는지도. 누경이 서강주를, 기현이 누경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숙명이기 때문이지, 누경의 헝겊인형 때문이거나 기현이 들은 점쟁이의 말 때문이 아니다. 우린 누구나 본능적으로 나를 간직해둘 곳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져지지 않는 사람을 만지려 애쓰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돌아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서 모두에게 삶이 이토록 벅찬 것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추억도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있던 그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그래서 이 긴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세 노르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안고 일상적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럴 것이다. 라는 말. 나에게는 물론, 파리에 있는 나의 아저씨에게도, 누경과 기현, 누경의 꿈속 아버지에게도, 여전히 알쏭달쏭해서 잘 모르겠는 서강주에게도, 더불어 삶에 지치고 사랑에 미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정말 우린 모두 자신의 진실은 감당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억울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뇐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 노르말.
 


- written by 깊은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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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10.03.12 14:38
너는 모른다
_ 정이현 (지은이) /문학동네,2009-12-08 00:00:00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가족을 원한 적이 없다. 어느 날 문득 세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세상에 나를 내놓은 부모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내 팔다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내 의지와는 별도로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겨났다. 그 뿐만 아니다. 꼭 닮은 유전자와는 별도로 전혀 닮지 않은 성격이나 취향을 보유한 넷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그 후로도 쭉 아니, 죽을 때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될 것이다. 포기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관계, 가족. 그건 누구도 동의나 항의같은 걸 할 수 없는 성질의 암묵적 규칙 같은 것이었다. 좀 다른 형태의 가족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내가 알기로 세상의 모든 가족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범위 내에서 형성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물은 아담 뿐이었다.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브가 창조되기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을 반반씩 닮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전까지는. 시작이 그러하다보니 인간은 특히 비밀스러운 순간일 수록 늘 혼자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어떤 관계로 규정하든지 간에 그건 세상을 정의하고 싶은 부류의 건방진 착각이다. 가족이라서 더 아는 것도 없고, 애인이라서 더 아는 것도 없다. 그게 누구든 어떤 관계에 있든 타인이 아는 건 고작 당사자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 누가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있으리란 기대는. 유지네 가족은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지만 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유지의 실종 후 기다렸다는 듯 끔찍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서로 아무 것도 모른다. 유지의 사라짐 후 뒤늦게 서로를 파헤쳐보지만 이제 그들은 드러내기보다 감추기에 더 급급하다. 진실을 캐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3자다. 문득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현기증을 느낀다. 내가 사라지면 내 가족은 과연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만약 내 가족 중 하나가 사라지면 과연 나는 허둥대지 않고 단번에 찾을 수 있을까?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역시 자신이 없다. 


가족이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다른 종류와 다른 점이라면 아마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오래도록 가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있는 것이란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는 원동력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사실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다 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가 가족이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에 서울의 한 강바닥에서 떠오른 남자 시체도 아니고, 가족들이 모두 제 인생을 사는 동안 잠시 밀려났던 유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다. 아버지 김상호가 양심을 팔아 돈을 산 것도, 은성이 남자에게 버림 받을 때마다 자해소동을 벌이는 것도, 혜성이 의대에 다니는 척 하면서 매번 용돈을 타가는 것도, 새엄마 진옥영이 친정에 간다고 해놓고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도 엄연히 말하면 문제는 아니다. 그건 그냥 서로를 안식처로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장한 어느 가족 구성원들의 숨겨져야 할 진실일 뿐이다. 그 사실은 마치 유지가 김상호의 딸이든 밍의 딸이든 진옥영의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에는 변함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지네 가족의 문제는 방문만 열면 알 수 있는 것들 또한 모르고 지나쳤다는 데서 기인한다. 서로를 좀 더 믿을 수 있었다면 그들의 고통은 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족간의 소통부재는 곧 사회의 소통부재가 된다. 가족은 작은 사회집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의 대부분의 문제해결은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회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게 핏줄로 얽혔든 지연으로 얽혔든 간에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는 개인의 만족감은 평균 기대치를 훨씬 웃돈다. 한 번 생각해보자.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개체로서 힘든 일이 생긴 순간,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위로와 사랑의 힘을.   


나는 섣불리 유지네 가족을 비판하거나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저 우리라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에서부터 안까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세세히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알든 모르든 가족이라는 존재는 신의 질투에 의해 그렇게 간단하게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뿐이다.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향수의 향이 그렇고 기억의 조각이 그런 것처럼, 연락하지 않는 것과 연락처를 모르는 것은 다른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는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좋을 것이 생각보다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윤리에 어긋나는 떳떳치 못한 직업 때문에 딸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는 아버지, 어린 딸을 두고 옛 연인을 만나러 간 엄마, 최소한의 예의와 관심만 지키며 한 지붕 아래 사는 아들, 그것조차 못 견뎌 혼자 살면서 남자들과의 관계에 모든 존재를 거는 딸. 이들의 모든 비밀을 가장 먼저 눈치 채는 사람이 아버지가 고용한 사립탐정원이라는 것이 아마 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재정상태, 가족 내 문제, 부부사이까지 모두 까발려야만 얻을 수 있는 진실이라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주 예전에 읽은 소설에는 누군가의 삶을 가장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단 한가지는 그가 내놓는 쓰레기 봉투라고 했었다. 어차피 열어볼 것이 아니므로 가장하고 숨길 필요가 없는 것. 사실 가족이란 존재는 가족의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 받기 싫으면서도 끊임없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고 싶은 것.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타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아닌 것. 단지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칼을 드는 것. 어쩌면 내가 또 다른 사람을 다 알 수도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늘 사람과 닿고 싶어한다. 어느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노래했다. 어쩌면 사람은 사람과 완전히 맞닿거나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를 잘 안다고 믿는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동그라미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은 유일하게 서로 개인사를 궁금해 해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또 유일하게, 방문만 열면 개인사를 알 수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에 대해 서로 죽을만큼 걱정하고 애태워도 무의미하지 않은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가족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안식처가 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또 따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버릴 수 없으며,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도 있다고 믿는다. 친구도 애인도 헤어지면 남이 된다. 가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 중에 가장 신비로운 영역이다. 핏줄과 정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름은 소통이 되지 않아도 가족이고, 소통하지 않아도 가족이며, 따로 떨어져 살아도 가족이다. 때로 필요에 따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다른 관계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제 가족 안에서 가족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내 행복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기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나를 던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혼자였던 개인이 가족을 통해 소통하고 위로받으며 스스로 또는 타인을 치유할 때 세상은 좀 더 살만해 질 것이다. 그러면 유지가 블로그의 음악 포스팅을 통해 만난 단 하나의 대화상대를 찾아 집을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유지네 가족은 결코 하나로 뭉칠 어떤 계기나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유지의 위험천만한 가출을 이용해 가족의 단합과 소통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에 떠오른 알몸 남자의 시체는 과연 누구일까. 그 역시 누군가의 그리움이고, 상처이고, 가족일 것이다. 가족, 애인, 친구 같은 산뜻한 정의를 벗어나서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과연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안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나를 보여주는 것과 타인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일까? 문득 지금 내 가족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written by 깊은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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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10.03.01 16:52
백야행 1
_ 히가시노 게이고 저/정태원 역/태동출판사,2000-11-30 00:00:00

료지와 유키호. 오랜시간 그들을 마음에 품고 있았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나는 오래 전 야마다 타카유키와 아야세 하루카가 료지와 유키호로 나온 일본 드라마 [백야행]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다. 그 후 이상하게도 전혀 잊혀지지 않았다. [백야행]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땐 별 관심 없었다. 그 때만 해도 히가시노 게이고를 그저 또 하나의 일본작가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연이 그랬기에 당연히 고수와 손예진의 [백야행]도 안봤다. 그래서 어떤 선입견도 없다. 내게는 늘 야마다 타카유키와 아야세 하루카가 료지와 유키호다. 다르게 말해 [백야행]은 어디까지나 일본 컨텐츠, 일본 소설, 일본 드라마, 일본 배우라는 뜻이다.

본 지 오래 된 일본 드라마는 그저 아릿한 느낌으로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료지와 유키호가 어린 시절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사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외의 대부분의 것들은 잊혀졌다. 나는 지금껏 료지와 유키호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죄 때문에 서로에게 연민을 느껴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었는데, 독서를 하면서 그건 그저 드라마의 이미지가 내게 준,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굳이 이렇게 길게 늘여썼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료지와 유키호의 사기 사건들. 전체적 줄거리를 아는 상태에서 소설을 읽다보니 지겨운 느낌이 들 정도로 여러 번 또 유난히 반복되는 사기 사건들에 현기증이 났다. 사건의 벌어짐과 동시에 추격하는 구성이 아니라 뒤늦게 사사가키가 등장하는 점에서 그가 14년 동안이나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해왔다고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나는 소설 <백야행>을 아동 성폭력과 가족 해체가 어떤 소년과 소녀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작품이라고 본다. 14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는 소년과 소녀. 그 배경에는 소아 성폭력이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박혀있고, 아직 세상에 대해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여린 아이들을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어두운 단면이 있다.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 료지는 세상을 등지고 유키호는 그가 없는 세상을 또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 벌을 받게 된다해도, 어느 누가 그들의 어떤 죄에 대해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료지와 유키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자신의 아들, 딸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었다면? 그들이 커서도 여전히 놓을 수 없는, 서로를 향한 지독한 연민의 끈은 한 쪽 부모가 없는 상실, 거기서 탄생했을 것이다. 어쩌면 료지는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뜻으로, 그녀에 대한 모든 보호본능을 몸소 끌어안은 것은 아닐까. 이제 나는 일본 드라마 [백야행]을 처음 보던 20대 초반이 아니라 사랑도, 세상도 조금은 알게 된 20대 후반이라서 일까. 아무래도 료지의 유키호에 대한 모든 행동들이 그녀를 위한 사랑이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만났던 소년과 소녀는 어쩌면 서로에게 조금씩 연민의 감정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한 쪽 부모만 있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둘은 어린 마음에 서로에게 조금은 특별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그러니까 하나 남아있던 한 쪽 부모마저 잃은 후, 그들은 어떤 기분과 어떤 생각으로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갔을까.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때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료지와 유키호는 좀 더 다른 삶을 원했다. 각자 서로의 삶을 갖되,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틈 없는 둘의 사이를 만든 것이다. 그건 주로 유키호가 원하는 것을 지켜주기 위한 료지의 끝없는 희생으로 이뤄졌지만, 유키호는 그런 료지의 모든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밝혀주는 그런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말이다. 어둠을 공유하는 한, 둘은 절대 함께 어둠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료지와 유키호는 많은 것을 계산했지만 그것만은 몰랐던 것 같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서 끝없는 희생을 하고, 한 쪽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삶'이라는 걸 나는 별로 인정할 수 없다. 세상에 끝없는 희생이란 게 있을까. 설령 그게 사랑이라는 이름이라 해도.

너무 많이 아팠다. 예전에도 지금도. 가장 슬픈 사실은 료지가 유키호를 위해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보다, 료지가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모조리 부정하는 일이었다는 사실보다, 그런 료지를 끝내 부정하고 아니 적어도 세상 앞에서 부정하는 척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유키호의 미래다. 아무래도 나는, 유키호를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료지에 대한 유키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그렇게 느끼도록 한다. 14년의 세월에 묻혀버린 아니 드디어 드러난 살인사건의 범인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숨기기 위해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소년과 소녀. 이제와서 우리는 과연 누구를 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백야행. 白夜行.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제목이 참 멋스러우면서도 맘에 든다. 오죽하면 하얀 어둠 속을 걸어야 했을까. 거짓 태양을 머리 위에 두고서라도 어둠이 아닌 태양을 향해 걷고 싶었을까. 그런데 신기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 일본 드라마 [백야행]을 볼 때, 료지와 유키호는 참 많이도 만나서 나쁜 일들을 모의한다고 느꼈는데 소설 <백야행>에서는 료지와 유키호의 대면이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3권이 한 장 남았을 때까지 둘의 만남을 기대했건만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이럴 수가. 물론 어린 시절엔 만났을 것이다. 그 후로도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사사가키에게 모든 범행을 낱낱이 들킨 순간에도, 료지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만났다. 그런데 왜, 그들은 한 번도 따뜻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까. 아니, 작가는 왜 그들의 대화를 단 한 번도 따뜻하게 그리지 않은 걸까. 책을 모두 덮을 때까지, 심지어 모두 덮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더 애잔했다. 료지와 유키호의 삶이. 세상을 등진 료지나 료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함구한 채 온갖 상처와 비밀들을 끌어안고 살아갈 유키호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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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2.16 18:24

랜트
_ 척 팔라닉/랜덤하우스코리아,2009-12-31 00:00:00

어렵다. 어렵나? 글쎄.
처음에 책을 읽어가면서 생각했던 것이다. 책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그 독특한 형식에 책이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다.
이런 책이 다 있나 싶을정도로 솔직히 처음엔 거부감이 든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뜻을 나타내기 위한 지은이의 색다른 시도일터. 지은이가 누군가. 컬트적인 글 쓰기로 유명한 '척 팔라닉' 아닌가. 그래서 계속 읽어봤다. 그랬더니 어렵다에서 어렵나?로 바뀌더라. 그런데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가도 또 어려운거 같은게 참 아리송하다고 해야하나.


이 책은 '구술전기'라는 참으로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특이한 내용의 독창적인 책을 잘 쓰는 척 팔라닉이 이번엔 참 묘한 형식으로 독자들을 아리송하게 하는듯하다. 전기이긴 전기인데 구술전기라. 바로 주인공인 '랜트'를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랜트를 입체적으로 묘사하려고 하는 형식. 그런데 랜트를 말하는 사람들도 쉽지 않는게 시간순으로 말하는것도 아니고 자신이 겪은 '인상'을 중심으로 말하기때문에 과연 랜트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기가 그리 쉽지도 않다.

가장 확실하게 아는건 랜트가 '죽었다'는 사실. 그는 작은 시골에 살다가 큰 도시로 나가서 자동차사고로 죽는다. 이른바 자동차 충돌 파티때문에. 자동차 충돌 파티란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거기에 따른 복장을 하거나 자동차를 꾸며서 서로 '박치기'하는 것. 랜트는 이런 놀이(?)를 즐기는 '자동차 충돌 파티족'이다. 그래서 그 주위 사람들이 랜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모은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사람들은 또 희안한게 주간생활자와 야간생활자로 나누어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낮에, 그리고 주간생활자에 해가 되는 사람들은 밤에 생활한다. 당연히 이 야간생활자들은 낮에 활동할수 없다. 이들은 정부에 의해 통행금지로 엄격히 구분이 된다. 밤중에 차 박치기를 했던 랜트는 당연히 야간생활자랑 친하다. 아니 그 자신이 야간생활자라고 할수있을것이다. 그런데 이 야간생활자들에 의해서 큰 병이 퍼지게 된다. 바로 '광견병'. 그리고 그 광견병을 퍼트린 '숙주'로 랜트가 지목된다. 그는 과연 광견변을 퍼트리고 죽었는가? 아니면 누구 말대로 시간여행을 통해서 죽지 않고 어디로 가 버렸나?

주인공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랜트를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책. 이들의 이야기도 어찌보면 뒤죽박죽이라서 한 사람을 오롯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랜트의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야간생활자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서 랜트라는 허구의 존재를 만들어낸것은 아닐까.

책 읽는 내내 책을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가 했다. 책 진도가 안 나가서 덮을려고 하면 뭔가 신선한것으로 다시 이어지게 하고. 아마 이게 척 팔라닉의 글 쓰는 매력일까. 이번 책은 그의 전작들중에서 비교해봐도 가장 특이하고 독창적인 책이라 할만하다. 전기라는 장르가 없는것도 아니고 인터뷰형식의 다큐멘터리성 글쓰기가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소설'이 아닌가. 이런 형식의 소설이 전에 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처음 접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인정할껀 인정해야하겠는것이 지은이 참, 똑똑하다란 사실. 참으로 기발하고 특이한 발상을 잘한다고밖에 말 못하겠다. 어떤 사유과정을 거쳤기에 이런 글을 쓰는지 궁금해졌다는.


 지은이의 다른 작품도 읽었지만 이번 작품은 그리 쉽게 읽지는 못했다. 다른 책을 읽을때 비해서 배나 시간도 걸렸고. 척 팔라닉의 책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형식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꺼 같다. 분명한건 이 작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여행이 되겠지만 은근히 묘한 끌림이 있는 소설이다.



- written by 살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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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1.04 10:48

석양 녘의 왈츠-제국의 붕괴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_ 프레더릭 모턴 (지은이) | 김지은 (옮긴이)/주영사 ,2009-10-26 00:00:00

 

역사는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제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승리가 먼 훗날 그저 왕의 찬란한 업적으로 그려지는 걸 볼 때 나는 때로 불편하기까지 하다. 전장에서 병사들만큼 용감하게 싸우고 전사한 왕이 아닐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만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주인공 앞에 나는 늘 가슴이 뛴다. 사실로서의 역사가 어떻든, 역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사건들이 내게는 살아있는 이유가 된다. 과거로 인해 현재가 존재하고, 현재로 인해 미래는 변해갈 것이다.


내가 비엔나에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비포 선라이즈>를 본 것도 한참 후의 일이니 그건 정말 우연이라고 해야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비엔나까지 야간열차를 타던 겨울날, 프랑크푸르트에서 갈아타는 예약열차를 놓치지 않고 탈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비엔나의 국립미술관에서 클림트의 작품들을 만난 것도 마찬가지다. 그 때 나는 클림트가 오스트리아 사람이란 걸 몰랐으니 비엔나에 대해 아는 건 단지 한국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달달한 비엔나 커피 뿐이었다. 그런 내가 비엔나는 물론, 오스트리아 제국과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알 리가 있었겠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본 비엔나를 떠올리려 했지만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대책 없는 여행자였는지만 실감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석양 녘의 왈츠>는 프레더릭 모턴이 지은 첫 번째 비엔나 이야기인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 후속작이다. 제국의 붕괴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다루는 역사상의 실존 인물들이 대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빙자한 역사이야기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고 재밌다.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역사 속 비엔나로 떠나는 가장 즐거운 방법이다. 바로 그 1913년부터 1914년 시점이 이 역사소설이 다루는 범위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아주 사소한 발단이나 명분에도 처절한 살상이 자행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생생한 묘사는 그간 제2차 세계대전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넓은 시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실의 불안한 대결구도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레닌과 트로츠키, 정신분석학의 대표주자 프로이트와 융의 대립까지 버물리며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흥미진진했던 세계로 이끈다.


앞서 저자의 이전 작을 읽었더라면 오스트리아 왕국 전반에 관한 인물들의 이해구도가 빨랐으리라 생각되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태자였던 루돌프의 죽음으로 시작된 고리는 지도자로서 아들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던 요제프 황제의 후계자 선정으로 이어진다. 후계자의 주인공은 바로 황제의 조카 페르디난트다. 그에게는 낮은 신분의 사랑하는 여인 조피가 있었는데, 황태자비가 된 그녀를 황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비참한 생활을 한다. 페르디난트 또한 늘 반대입장을 고수하는 황제 때문에 곤혹스러운 시간을 견디다 결국 암살됨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아니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는 예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의 상황만 봐도 얼마나 많은 집단과 민족이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애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아무런 노력없이 하나라는 틀에 가둬졌으니 비극의 발생은 시간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제1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현 유럽은 물론, 세계의 정세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힘의 균형과 역사의 물줄기가 어느 정도 변했을까. 상상은 즐거운 일이다. 역사는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듯, 현재의 선택으로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과거를 역사로만 치부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흥미진진한 비엔나의 역사여행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공부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지성적인 결정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우리의 미래를 영원히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이고, 그로인해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훗날 나 또한 역사로 기억되겠지만 아쉬운 선택이 아닌 최고의 선택으로 평가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실체가 분명한 일을 우연으로 치부하려는 행동이야말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비겁한 변명이 아닌지 모르겠다. 


- written by 깊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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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09.12.28 11:10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_ 코넬 울리치/이룸,2009-10-12 00:00:00

 
한 형사가 강을 따라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밤이다. 길을 걷다 땅에 떨어진 돈을 발견한다.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다. 그런데 또 다른 지폐가 있다. 1달러짜리다. 이렇게 돈의 흔적을 좇아간다. 적지 않은 돈을 주은 그 앞에 한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 달려간다. 그녀를 구한다. 이 만남이 앞으로 펼쳐질 긴 이야기와 비극의 시작이다. 그 형사는 톰 숀이고, 그 여자는 진 레이드다.

자살하려 했던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을 관찰하고 미래를 결정하려는 운명이다. 처음 만났고, 그녀를 몰랐던 그에게 그녀는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고백한다. 비록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부족한 것 없이 부유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는 그녀가 왜 그랬는지 말이다. 그것의 발단은 사실 그 집 하녀의 한 마디에서 시작했다. 진의 아버지가 사업상 비행기를 타고 서부에 갔다 올 예정인데 하녀 아일린이 돌아오는 날짜를 바꾸거나 비행기를 타지 말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냥 웃어넘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조차 그렇다. 그리고 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진의 마음속엔 불안이 싹튼다. 이성의 힘이 불안을 몰아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진다. 그 과정에 아일린은 해고당한다. 아버지가 돌아오기로 한 그날 비행기 사고가 발생한다. 예언이 맞았다. 그녀는 공황에 빠진다. 아일린을 찾아간다. 그녀에게 예언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를 만난다. 그는 아버지가 집에 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힘겹게 돌아오니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있다. 그는 비행기를 타려는 순간 그를 찾는 방송 때문에 비행기를 놓쳤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기차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를 통해 예언을 다시 확인한 그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 예언자를 물리치려고 한다. 그를 방문한다. 하지만 이 한 번의 방문으로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가 처음 예언한 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상 판단을 그에게 묻게 된 후부터 열렬한 믿음의 신봉자가 된다. 그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이익을 얻게 되니 그 믿음은 이제 결코 깨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다 그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된다. 믿음이 강한 만큼 그 공포는 절대적이다. 그의 공포와 절대적 믿음은 딸 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예언된 시간까지 이틀이 남았을 때 진은 숀에게 구출되고, 이 초자연적인 예언을 풀고 막기 위해 경찰들이 동원된다. 그들은 그녀가 확인한 예언들의 사실 여부와 조작 가능성을 조사하고, 예언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과연 그 예언은 실현될까? 아니면 조작된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서서히 전염되는 공포 속에서 이야기는 점점 숨 가프게 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잠식된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그 예언이 정말 실현될까? 아니면 형사들이 그것을 막아낼까? 호기심이 생겼다. 진의 아버지가 예언을 통해 수많은 성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예언들이 초자연적인 진짜인지 의문이 생긴다. 믿음이 강한 만큼 공포도 강해지고, 그것에 잠식되어 삶의 의지를 잃고 살아가는 그 가족을 보면서 과연 나라면 그렇게 행동할까, 생각해본다. 이성적 판단에서 본다면 억지주장 같다. 하지만 현실은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소설의 재미는 그 운명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있다. 예언을 좇아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예언자를 감시하고, 불안 요소를 뒤좇으면서 그 가능성을 하나씩 제거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이 죽을 시간만 기다리며 시계만 보는 그를 통해 예언의 힘은 유지된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공포는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점점 강해진다. 불안을 물리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점점 굳건한 뿌리는 내리는 공포는 이미 이성과 몸을 지배해버렸다. 운명, 죽음, 사랑, 이성, 과학 등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마지막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에 대한 해설을 통해 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만약 CSI 같이 모든 것을 과학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약간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아니란 사실에 조금 놀란다. 예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그 당시 초점이 소설과 달랐다는 정보는 이 소설에 접근하는 다른 방법을 알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호불호를 벗어나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내고, 묘사하고, 진행하는 방법에선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 written by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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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소설, 추리
베스트서평2009.12.19 20:01
1Q84 1 - 4月-6月
_ 무라카미 하루키(지은이), 양윤옥(옮긴이)/문학동네,2009-08-25 00:00:00

열여덟, 사소한 장난에도 까르르 웃던 단발머리 소녀시절부터 하루키를 읽었다. 뭘 알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상실의 시대>부터 <어둠의 저편>까지 5년을 꼬박 읽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시절, 저 모퉁이를 돌면 처음 보는 세계와 조우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나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혼돈이고 방황이었다. 어떤 날은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 일찌감치 책을 덮었고 어떤 날은 나의 실체와 만날 욕망에 몸서리치며 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읽고자 하는 욕망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라쟈드의 유혹에 못 이기는 샤리아르 왕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엔 미흡한 표현력 때문에 하루키의 다른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시도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늘 막히고 마는 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가 창조한 세계 속에 나는 살았다. 5년 전 일이다. 이번엔 반드시 알고 싶었다. 표현하고도 싶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의 소설 속에 투입되는 쓸모없는 소품 말고 작품 바깥에서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똑똑한 말이 되고 싶었다. 바로 그거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려는 욕망과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 비평욕구가 충돌했다. 그를 처음 만난 후로 무려 열 살이나 더 자랐으니 못할 것도 없다. 어느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넘치는 독자가 되었다. 드디어 모든 페이지를 다 덮고 이 글을 쓴다.


굳이 고백하자면 <1Q84>를 읽는 긴 시간동안 내가 과연 어디에 존재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아오마메와 덴고를 만난 시간이 진짜였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만나고 있으면서도 아직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실체와 관념이 뒤섞인 온갖 알레고리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세계에 들어서는 일은 그저 신비롭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해석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하루키는 대단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이리라. 어쨌든 그의 새 소설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에서 낯선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자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세계를 포함하는 우주 그 자체다. 비록 문학이지만 심리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역사학, 과학을 버물린 폭풍 같은 단 하나의 텍스트다. 초현실적 감각과 빨려들듯 선명한 이미지에 감탄했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펼칠 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모두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내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어느새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긴장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나를 발견한다. 빠져들면 안 된다. 동화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평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나는, 아직은, 그 거대한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은 몇 개입니까? 도대체 수많은 당신 중에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입니까? 나는 스물일곱 개 존재합니다. 아니, 그건 년(年) 단위로 볼 때 얘기고, 만약 월(月) 단위로 본다면 나를 도대체 몇 개라고 해야 할지, 만약 일(日) 아니 시(時), 분(分), 초(秒)로 본다면 과연 내가 몇 개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나눈다면,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수로 나눈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머릿속 생각으로 나눈다면 과연 나는 몇 개가 될까요? 이것이 진실이다. 우린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만들어내고 교감하며 그 중 누군가를 통해 나를 정의하려 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알았을까. 자신이 몇 개인지를, 어디까지가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세상에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딱 하나다. 완벽한 존재, 초자연적 존재, 리틀 피플, 아니 신. 살아가는 동안은 절대로 진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오마메와 덴고가 단 한 번이라도 같은 세상에 함께 존재했다고는 여길 수가 없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엾은 커플은 표면상으로만 보더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데이트를 할 수도 없고, 껴안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다. 끊임없이 만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만날 수 없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나들은 그저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을 할 뿐이다. 종교, 범죄, 성욕, 사랑, 고독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린 알게 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다한들, 우린 기본적으로 흔들리는 존재이지, 흔드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동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삶에서 죽음으로, 사랑에서 증오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선에서 악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무엇에서 무엇이 아닌 것으로.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증인회’에서 고립되었던 기억이, 덴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냉랭한 대우가 오래도록 상처가 되어 남았다. 적어도 진짜라 믿는 세상에서 진짜의 모습을 한 그들은 남들과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아오마메는 살인자, 덴고는 남의 작품을 리라이팅해 문학상을 조작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두 개인 세계에 있다. 달은 왜 두 개가 되었는가. 상처가 치유되는 지점이 열 살의 교실이라는 점에서 또는 리틀 피플이 택한 필연적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둘은 동일 기억을 공유하는 동일 인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리틀 피플은 뭐고 공기 번데기는 또 뭘까. 실체를 알 수 없으므로 끝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린 누군가와 어떤 기억을 얼마나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방금 전의 현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거대한 저장고에 든 기억이 작가 박민규가 만든 냉장고에서 터져 나오기 전에는 카스테라의 모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엉클어진 기억들의 존재와 부재를 누구도 제대로 생산해낼 수 없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악과 선, 현실과 환상, 실체와 관념, 죽음과 삶처럼 상반된 것들은 절대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간단한 공식이 파괴되는 순간 비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나는 저 세계의 나와는 분명 다르다. 나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세계에서의 실체 또한 그대로일 리 없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실체는 매번 달라진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본질 또한 흔들리게 된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계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진다. 바로 그 때, 1Q84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소중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후회의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중하지만 상처가 된 기억. 예를 들면 아오마메와 덴고가 서로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사랑 같은 것. 덴고에게 연상의 걸프렌드와 후카에리가 아오마메에게 가는 길이었듯, 아오마메에게 있어 낯선 남자들과의 잠자리는 덴고를 향한 사랑이자 자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 그는 과연 어느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부를 때, 너는 무엇을 듣고 있을까? 전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고, 보고 싶다는 말에 달려온다 해서 달려온 너를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때의 너라고 완전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루키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늘 욕망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욕망이 있으면 변형도 있다. 욕망은 속한 세상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틀린다. 내 부모가 재벌이 아닌데 내가 재벌 2세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바로 지금 내가 안은 모든 욕망의 근원이 오로지 나에게만 있으란 법도 없다.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덴고의 공기번데기에 열 살의 아오마메가 들었듯 나의 공기번데기를 열면 나만 아는 나의 욕망이 들었음을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이어져 있으며 또한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나를 여러 개로 나눠야 하는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세상에 속해있는 증거다. 그것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우주 곳곳에 뿌려져 있는 모든 세상의 것들이 이미 나다. 그건 굳이 공기번데기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안다. 아오마메와 덴고에게서는 그저 존재의 본질을 배울 뿐이다.


나의 공기번데기와 그의 공기번데기에 같은 것이 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모두를 존재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욕망, 기억, 추억 등이 모두 그렇다. <1Q84>는 사랑이야기가 아니지만 내가 알게 된 유일한 사실은 나의 눈, 코, 입, 팔, 다리, 가슴 같은 실체가 매순간의 시간과 보이지 않는 모든 공간에서 관념의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속에 이미 사랑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키가 이대로 소설을 끝맺지는 않을 거라는 소식이 일단은 희망적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뒤로 갈수록 의문이 풀리는데 반해 <1Q84>는 불확실성과 비판을 감내해야 할 부분만 잔뜩 남겨두고 영 찝찝하게 끝났기 때문이다. 고마쓰와 연상의 걸프렌드의 부재, 아오마메와 덴고의 재회, 끊임없는 달 타령을 허용한다고 해도 평화를 지향하던 농업 코뮌 단체였던 ‘선구’가 종교단체로 변모한 과정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뜬금없다. 경험상 하루키가 다음 권을 쓴다고 해도 알레고리로 둘러싸인 모든 것들의 실체는 여전히 관념에 휩싸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3권을 보고 싶은 마음은 그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이 세계의 내가 아닌 다른 세계의 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다. 불바다가, 폭탄이 나를 삼켜버리지 않기를, 2009년에 사는 내가 200Q년으로 이동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이기를,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기를,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내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은 원래 하루키의 작품이 주는 선물이니 이번에도 고스란히 안고 가려 한다.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현재, 나와 또 다른 내가 또는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 서로 만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를, 죽음이 아니라 삶이기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그래서 행복하기를. 성교로 인한 교접. 비록 짧았지만 어쩐지 그 초월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비약적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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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09.12.14 17:59

고백 -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_ 미나토 가나에 (지은이) | 김선영 (옮긴이)/비채,2009-10-12 00:00:00

요즘 여기저기서 서점대상을 수상한 일본소설 [고백]이 화제가 되는 걸 보았다. 사실 일본소설에 큰 감명을 받은 건 아주 오래 전 잠시였을 뿐, 대부분 너무 자극적이거나 지루하거나 해서 토종 한국인인 나와는 정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러는 절대 읽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휘황찬란한 광고문구를 보게 되면 그게 뭐든 어쩐지 끌린다. 그렇게 들게 된 이 책은 단연 충격이었다.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데뷔작이라는 것이 그렇고, 디테일한 사건구성의 놀라움이 그렇고,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이 각기 서술되면서 독자에게 판단을 유보하는 묵직한 주제가 그렇다. 나 또한, 책을 덮으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추천할 지를 고민했다.


우린 살의와 광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또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살인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은 채 교화를 기대하는 사회 제도에 문제는 없을까. 이 소설은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 미혼모 여교사가 얼마 전 교내에서 죽은 자신의 딸 마나미에 대한 진실을 반 학생들에게 고백하며 시작된다. 교내 수영장에서 사고사로 익사한 줄 알았던 딸을 죽인 범인이 바로 반 안에 있는 학생들 중에 있다는 것과 그에 복수하기 위해 에이즈에 걸린 남편의 혈액을 채취하여 그 범인이 먹을 우유속에 넣었다는 것. 충격적인 고백을 늘어놓은 교사는 오로지 학생들 사이에서의 정직한 제재로서 범인이 고통받기를 원하며 교사직을 떠난다. 교사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피해갈 범인을 위해 교묘한 수를 이용해 직접 단죄한 것이다. 이 사건이 몰고오는 범죄와 미스터리는 놀랍도록 충격적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를만큼 재밌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혈액이 든 우유를 마신 범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고립이다. 열 세 살 아이는 그저 엄마의 사랑을 원하고,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아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여교사는 딸의 죽음과 관련있는 자신의 두 학생이 법의 심판보다 더욱 처절하고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그것이 비록 딸의 생명을 돌이킬 수 없을 지라도. 자신의 마음이 그리 편안하지 못하리란 것도 알았지만 범인의 죄를 처벌하는 방법은 그 뿐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는 생각도 못한 채.


누군가를 죽여 엄마의 관심을 끌고자 한 A의 실패한 시도, A의 도구로 이용당한 사실에 분노한 나머지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한 B의 성공 시도. 둘 중 누가 진짜 살인자일까? 시작은 A가, 마무리는 B가 했다. 살인동기는 A에게 있었지만 물질적 살인은 B가 저질렀다. 그리고 둘 다 미성년자일 뿐더러 법의 심판대에도 올리지 못할 만큼 어린 열 세 살 중학생 소년들이다. 우리 사회는 두 소년에게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는가. 물음은 끝없이 머리를 내려치지만 끝내 어떤 결정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여교사와 소년 A 그리고 소년 B. 반 학생들과 소년들의 가족 등 모든 이들이 각 챕터의 주인공이 되어 서술하는 이야기는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구조가 된다. 우린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와 어느새 각각의 인물 모두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두 소년에게 내려야 할 형벌을 결정하기가 더 어렵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우리는 이제 어긋난 가족과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는 사회가 어떻게 한 인간을 광기로 몰아넣고, 어떻게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며, 그 이상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오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에 걸맞는 반성과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여교사가 두 소년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않고 또래집단의 조직에서 어떻게든 심판받기를, 또 고통받기를 바란 것 또한 집단의 광기가 어떤 식으로 개인을 지배하고 와해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여교사의 복수는 성공한 셈이다. 소년 A는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을 이해해 준 반 친구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게 되었다. 소년 B 또한 살인에 대한 죄책감과 에이즈의 공포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다 경찰서에 잡혀가기 위해 어머니를 죽이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두 소년은 에이즈 환자의 혈액이 든 우유를 마시지 않았지만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자멸을 가져올 만큼 파급효과가 컸다. 고작 네 살이던 딸을 잃은 가엾은 여교사는 교사와 피해자의 자리에서 방황하다 스스로 범인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택했을 뿐인데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예상외로 넓고 길다. 그리고 끔찍하다. 피해자에게 과연 가해자 처벌의 권리를 내주어도 괜찮은 것일까.


문득 생각나는 사례가 있어 소개한다. 교도관들은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새로 발명된 독극물을 시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한 사형수를 시험대에 앉혔다. 독극물이 든 링거를 사형수의 팔에 꽂고 지켜보려는데 발작하던 사형수가 순식간에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 링거병에 든 것은 그냥 물이었는데 말이다. 이처럼 극도의 공포심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여교사 또한 소년들의 공포심을 노렸다. 탁월한 복수법이기도 했다. 소설 [고백]은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가해자인지 따지기 이전에 가정과 사회의 이그러진 형태를 먼저 고발하는 작품이다. 누가, 또 무엇이 두 소년을 파멸로 이끌었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성찰이 중요한 작품이다. 가정과 사회는 과연 개인을 보호해 줄 수 있는가. 죄를 묻고 벌을 내리는 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교화시킬 것인지, 고통을 줄 것인지 결정하는 것 또한 나중 몫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 소설의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최대한 충실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면 어땠을지 생각하면서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심오하면서도 두려운 질문을 던지는 대단한 작품을 만나 반가웠다. 뜬금없는 에이즈 혈액 복수나 전기감전 지갑 발명품, 폭탄설치 마무리 같은 일본식 에피소드는 좀 황당하지만 사건전개 방식과 서술시점에 있어서는 완벽한 구성을 자랑하는, 작품에 붙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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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09.09.16 17:49

  에세이. 결혼 에세이. 에쿠니 가오리의 결혼 에세이 입니다. 모든 글들이 그녀의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해 남편이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결혼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30살 이전엔 결혼을 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과 여자로서의 피해망상이 있기 때문일까요. 이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그녀의 결혼 생활이 왠지 미래에 제가 겪게 될지도 모르는 결혼 생활과 닮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매해 결혼 기념일마다 '너희가 이혼을 안하고 살고 있어 놀랍다'는 카드를 보낼 정도로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주변에서 좋은 아내감이 되기는 글렀다는 둥의 평가를 받는 편이라 글을 읽으면서 아직 결혼도 안해본 주제에 묘하게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글에서 표현되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모순적인 감정의 연속입니다. '공원'에서는 주말에만 가끔 산책을 가자고 말해주는 남편이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일에는 혼자 공원을 서성입니다. 간혹가다 주말에 부부가 같이 공원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그녀는 시간이 많고 한가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바쁘고 그래서 그녀가 남편에게 매달리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나봐요. 왠지 자신이 졸라서 산책을 나오게 된 듯한 느낌인가 봅니다. 이렇게 얄미워하다가도 '색'에서는 남편 덕분에 모노톤이었던 그녀의 일상이 다채롭게 바뀌었다고 이야기 하지요. 남편과 함께하는 주말에는 감정 소모를 하면서도 월요일이 되면 그를 보내기 싫은 마음. 그렇게 같이 있고 싶어 부루퉁한 얼굴로 배웅한 뒤 혼자가 되었다는 안도감. '월요일'에는 이 두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교차합니다.

  들러붙어 있기에 이렇듯 마음이 슬픈 것이다.
  정말이지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들러붙고 만다. 우리 둘은 때로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외롭다 (혼자일 때의 고독은 기분 좋은데, 둘일 때의 고독은 왜 이리도 끔찍한 것일까). (40p)

  이런 모순을 비단 그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왜냐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남자친구와 모든 생활을 공유하다보면, 차라리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고독감은 반갑기까지 하고 저를 들뜨게 만드는데 남자친구와 함께 있으면 갑자기 그와 제가 너무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고 둘이 있긴 하지만 혼자인 것 같은 느낌에 쉽게 답답해집니다. 그럼 헤어지는 편이 낫지 않나구요? 에쿠니 가오리씨가 말한 것 처럼 둘일 때의 고독이 끔찍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웃는 모습을 보면 좋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면 그에게만은 어리광을 부려도 될 것 같은 느낌이 좋아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가끔은 제풀에 지쳐서 어떤 한 사람이랑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인 것 같아. 하고 말하지만 막상 사나흘 연락이 없으면 먼저 전화해서 목소리를 듣고 안심하는 것은 저입니다. '어리광에 대해서'에서 그녀는 이렇게 표현하죠.

  올바르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그래주었으면 한다. (119p)

  뭐가 옳은 것인지 정도는 저도 압니다. 알지만 꼭 그렇게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그냥 받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틀린 것이더라도 내가 우기면 가끔은 눈감고 봐줬으면 하는 어리광. 남들에게는 쉬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수 없지만 한사람에게만은 그렇게 바랄 수 있다는 것. 아, 어째서 저는 유부녀 에쿠니 가오리에 이렇게 공감하고 마는 걸까요. 결혼같은 연애를 하는 저때문인지 아니면 연애같은 결혼을 하고 있는 작가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복하면서 행복하지만은 않고, 괴로우면서 괴롭지만은 않은 결혼. 가끔은 남편이 자신을 밥해주는 여자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다른 많은 주부들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밥) 그래도 지금까지느 남편과 같이 살고있고 지금의 결혼 생활을 맛있는 케익을 음미하듯 맛보고 있다고 여기며 행복해하죠. (RELISH) '외간여자'에서는 자신을 그의 여자가 아닌 외간 여자와 같이 대접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벚꽃 드라이브와 설날'에서는 새해 아침 가장 보고싶은 얼굴이 남편이라는 것에, 돌아갈 지이 있고 남편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녀. 제멋대로 인 것 같기도 하고 자유로운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떨 땐 5살의 어린아이, 또 어떨 땐 17살 사춘기 소녀, 그리고 많은 시간은 결혼한 여자로 살아가는 그녀를 보며 결혼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요. 그건 이 글들이 에쿠니 가오리씨의 결혼생활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읽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잠깐. 이게 왠걸, 작품 해설의 이노우에 아레노씨는 에쿠니 가오리씨가 '행간의 작가'라고 하며 이 글들이 과연 논픽션인가 하는 의문을 턱하니 던집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이미지와 머릿 속 문장들 그리고 색깔들이 갈 곳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이노우에 아레노씨, 저 당신의 '채굴장으로'를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는데 저에게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게 만일 소설이라면 배신감이 들 것 같아요. 정말로. ㅠㅠ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_ 에쿠니 가오리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태일소담

- written by ag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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