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반(半)소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6.29 지금 거기 없는 나라 - 우주피스 공화국
베스트서평2009.06.29 10:13
우주피스 공화국
_ 하일지/민음사,2009-04-15 00:00:00

 
그러니까 이 소설은 반(半) 소설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소설은 시적이다. 그저 소설이겠거니 하고 읽어내려가던 중 내가 처음으로 '아, 하일지의 이 작품은 반시반소설이구나.'라고 확신을 하게 된 부분은 주인공 '할'이 젊은 요르기타의 집에서 함께 요르기타가 꺼낸 사진을 보는 장면에서였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세 번째 액자 속의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요르기타와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남자는 할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할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주피스 공화국이라는 제목이 독특했다. 처음에는 하일지가 만든 조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낱말에서는 환상의 냄새가 분명히 풍겼다. 대충 우주평화 공화국? 하핫. 뒷걸음질치다 맞춘 것이기는 하지만 소설 <우주피스 공화국>에서도 확실히 환상의 냄새가 났다. 소설을 다 읽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주피스 공화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 곳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있는 마을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할이 블라디미르와 동행했던, 작은 강을 건너서야 나오는 재기있고 유머러스한 예술가들의 마을이다. 우주피스 공화국은 4월 1일, 일년에 단 하루 독립하여 우주피스 공화국이 된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블라디미르가 말한 바로 그대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우주피스 공화국을 '존재'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4월 1일 하루를 제하자면 1년에 364일을 우주피스 공화국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향수속에만 존재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혹은 슬픈 우주피스 공화국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추억에 대한 물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피스 공화국은 다분히 환상적이다.

소설은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 할의 고향은 우주피스 공화국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된 만우절의 우주피스 공화국이 아닌, 언어도 있고, 국가도 있고 국기도 있고, 대통령도 있고 대통령궁도 있는, 그러나 전쟁 후 점령되었다가 최근에야 그 영토가 쪼그라들어 독립한, 몇몇의 사람들이 사소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실재했었던 어느 나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느 정도 우주피스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받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유품이 든  커다란 가방을 들고 우주피스 공화국을 찾아 낯선 나라에 도착한 할은 어디에서도 우주피스 공화국의 실재를 확인하지 못한다. 어디선가 문득 환영처럼, 환청처럼 우주피스 공화국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지만 주인공 할이 그림자를 붙잡으려 하면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기만 한다.

소설을 읽는 중간에 든 생각이지만, 처음에 카프카가 떠올랐다. 이 소설은 카프카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조금 있었다. 존재한다고 전해지지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성과 신성과 비슷한 어떤 힘, 처음의 목적과 본질을 상실하고 결국에는 안개와 같은 성에 도달하기 위해 시지포스처럼 나아가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비참한 실존. 그러나 물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나는 그런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카프카는 부조리하지만 하일지는 환상적이다. 우주피스 공화국은 부조리가 아닌 환상의 영역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우주피스 공화국의 사람들이 짊어진 것은 실존의 무게가 아니라 환상에 대응하는 본질로서의 삶, 삶의 궤도, 그 원심력의 무게이다. 할이 어디에나 가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어린 시절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비로소 중년이 되어 고국을 찾아 온 망명자에게 무겁고 커다란 가방이라는 것은 삶의 전체, 그리움과 추억의 전체, 향수와 감정의 전체이다. 할은 우주피스 공화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블라디미르의 앞을 제외한 어느 누구의 앞에서도 자신의 가방을 열지 않았다. 만일 할이 젊은 요르기타와 노파가 된 요르기타 앞에서 가방을 열었다면, 두 개의 동일한 세계가 부딪쳐 부서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환상, 혹은 삶이나 어떤 기원에 관한 여정은 그 순간 깨어지고 할은 조금 더 일찍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은 이미지가 반복되기도 하는데, 거위를 든 농부, 벽시계를 짊어진 사람도 바로 그렇다. 그리고 농부의 거위와, 커다란 벽시계는 할의 커다란 가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듀티스키스로 가는 길에 눈덮인 언덕에서 본 벽시계를 진 사람은, 언뜻 기괴한 환상같지만 그 환상의 내용은 삶(운명)의 해방이다. 상승하는 삶, 그러므로 소멸하게 만드는 해방. 그리고 주인공 할이 그 해방을 맞이하는 방법은 권총자살이었다.

워낙에 독특한 소설이기 때문에 짚어두고 싶은 내용이 꽤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하일지의 문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할과 요르기타가 함께 사진을 볼 때 서술자는 '할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런데 그 사진은 어젯 밤, 알비다스나 블라디미르에게 보여 준 사진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할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문장은 반복적으로 나온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장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이와 같이 작가는 작품에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대신에 단지 관찰자의 눈으로 서술한다. 이러한 서술 방법은 작가가 소설속에서도 말했듯이 인사이드 뷰의 노골적 기능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의 시적인 효과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처음에 말했듯이 이 소설은 반시의 소설이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식이 그렇고, 내용이 그렇다. 그리고 더불어 이와 같은 문체 역시 참 시적이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찜찜하고, 기괴하다고 하기에는 좀 슬픈 그런 시. 

참으로 오랫만에 만난 하일지의 시는 많이 정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을 읽기 위해 7년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릴만 했다. 내 나름대로 책읽기를 하면서 작가의 의도나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왜곡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리 작가에게 사과를 표하고 싶다.

- written by 괴물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