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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2010.05.04 18:52
나를 만나는 스무 살 철학
_ 김보일/예담,2010-02-04 00:00:00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스무 살에서 한참 먼 내게 깊고 넓은 울림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들에 정확하게 포커싱됐다는 느낌을 별반 안 주는 것. 사실 철학이 그렇다. 몇 살의 철학이 있을 수 있나? 인간과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이 어디 나이로 구분지어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 책의 저자인 김보일 선생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현직 고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하므로 청소년과 청년에 대해 많은 앎과 고민과 애정을 지녔을 것이고, 그 나이의 고민에도 정통할 것이고, 그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무 살들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을 아직 접하지 못했고, 그들에게 이 책은 어떤지 궁금하다. 즉, 나는 좋은데 그들은 어떤지,라는 것.  


며칠 전 안광복 저자의 강연회에 갔다가, 사춘기가 힘든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인데, 요즘은 불혹의 미래도 똑같이 불안하므로 스무 살이나 마흔 살이나 똑같이 힘든 시기를 겪는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불안'한 청춘에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표방하는 이 책이 내게도 맞나보다는 생각도 한다.  


각설하고. 


나, 이 책에 너무 꽂혔다. 나 읽으라고 일부러 누가 써 준 책 같다. 도서의 일대일 서비스를 받은 느낌. 나는 현학적인 느낌을 좀 좋아라 하고, 현학적이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라 하고, 그런 책을 좋아라 하는데 이 책이 딱 그렇다. 저자가 읽은 어마어마한 양과 깊이의 책들이 페이지를 쉴 새 없이 들고나는데, 그것들을 단순히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한 줄 한 줄이 다 저자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심오하다면 그렇달 수 있을 내용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론리니스와 솔리튜드가 딱 정리되고, 긴가민가했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생각들도 아하, 싶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나와 멀다 싶던 이야기들이 내 삶과 직결되는 느낌이다. 고독, 불안, 사치, 쾌락, 행복, 우정, 사랑 등에 대한 혜안이 나를 편안하게도 하고, 면죄부를 쥐어주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은근하게 꾸지람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내 삶, 내 생각, 내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철학이라는 어휘를 제목에 붙인 책으로서는 최선의 결과인 셈. 적어도 내게는.  


철학이라 고리타분할 거라 여기는가? 천만에. 이 저자가 놀기만 하셨나 할 정도로 '요즘 식' 에피소드가 콩나물국의 깨처럼 얹혀 있다. 스무 살 이상의 모든 사람을 겨냥하는 편안한 철학 에세이. 읽는 동안 행복했다.



- written by 파란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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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자기중심주의가 부르는 생태계와 민족과 언어의 소멸

멸종-사라진 것들, 종과 민족 그리고 언어 /들녘/프란츠 M 부케티츠/2005년
                                   
                                                                                                                              - 김보일
 
 
 
 


지구 역사상 여섯 번의 대멸종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의 말처럼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죠. 모든 유기체들은 죽음 앞에서 평등할 수밖에 없죠. 아무리 강한 존재일지라도, 아무리 부귀한 존재일지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지구에는 수많은 동식물이 존재했다 사라졌죠. 지금까지 존재했던 생물 중 99%가 멸종했는데, 대부분 출현한 지 1,000만년 안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구에는 약 40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후 엄청난 멸종을 초래한 여러 번의 대멸종(Extinction)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의 대멸종은 고생대의 오르도비스기 말기에 온 것으로, 이때 삼엽충과 앵무조개 등 여러 껍질 생물들이 일시에 절멸했죠. 지구상의 49%의 생물을 멸종시킨 이 사건은 대규모 빙하기의 도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두 번째 대멸종은 고생대(약 5억7,000만 년 전~2억3,000만 년 전)의 데본기에 있었던 것으로 이 시기에 수많은 바다 생물들과 양서류가 대량으로 사라졌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때 연쇄적인 운석충돌로 75%의 종이 멸종했다고 추정합니다.

고생대의 마지막 시기인 페름기에는 세 번째 대멸종이 찾아왔죠. 이때 파충류와 양서류 등의 동물과 양치식물 등 대규모 식물군이 일시에 절멸했죠.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멸종으로 기록되는 이 대멸종으로 인해 육상생물의 80%이상과 해양생물의 90% 이상이 멸종했어요. 멸종의 원인은 혜성이나 운석 충돌로 과학자들은 추정하죠.

중생대(약 2억3,000만 년 전~6,500만 년 전)에 들어와서도 두 번의 대멸종이 있었죠. 트라이아스기에는 운석 충돌로 인해 파충류의 대부분이 사라지는 네 번째 멸종이 있었고, 백악기 말에도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암모나이트와 공룡들이 대부분 멸종하는 지구 역사상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대멸종이 있었습니다. 이때 지구상의 생물 약 50%가 사라졌습니다.

이 중생대의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종이 현재의 포유류와 조류들로서 신생대(약 6,500만년전~현재)를 거치면서 종과 개체수를 크게 불려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만약 네 번째의 대멸종의 없었다면 우리 인류는 아직도 공룡에 쫓기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겠죠.

과학자들에 따르면 약 45억년의 역사를 가진 지구에 처음 생물이 출현한 40억년 이후 지구상에 등장한 생물의 거의 90%에 가까운 30억 종이 멸종됐다고 합니다. 이를 계산해보면 약 1억 년에 6억 종, 1년에 6종의 생물 종이 명멸했다는 계산이 나오죠. 하지만 현재 지구상에는 1년에 150여종의 생물이 없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멸종율에 비하면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죠. 자연 멸종율의 25배가 넘는 속도니 말입니다. 왜 생물들이 이렇게 빨리 사라져 가고 있을까요?

프란츠 부케티츠 빈공과대 교수의 책 『멸종 사라진 것들』에서 저자는 “인간 지능의 발달로 이루어진 기술은 그 어떤 생물도 따라갈 수가 없다. 불도저, 회전톱, 그리고 자동화기 따위에 저항할 수 있는 식물은 물론 그 어떤 동물도 없다. 그러는 사이에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역사, 수백만 년에 걸쳐서 생성되어온 고유한 생물체의 형태들을 파괴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기술이 대별종의 주범이라는 거죠. 해양생물을 위협하는 바다의 오염, 열대림의 파괴, 바다에서의 지나친 어획 따위는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기술은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인간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술의 반생태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저자는 다른 종들에게 인간이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몇 가지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목적지향적이고 조직적인 사냥이 그것입니다. 상아와 모피를 얻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수달과 코끼리들의 직접적인 멸종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특정 생태계로 외래종을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들여옴으로써 토착종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카리브 해안의 여러 섬에 서식하는 인도 몽구스를 들여왔을 때, 이 몽구스들은 쥐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작은 파충류와 포유류까지 남김없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섬들의 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렸다고 합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간섭이 생태계의 재앙을 초래한 거죠. 1958년에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군도 핀타 섬에 염소 한 마리아 두 마리의 노루를 들여 놓았다고 합니다. 적은 숫자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어요. 15년이 지난 후 노루의 숫자는 3만 마리 이상으로 불어나 섬을 황무지로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셋째, 간접적이긴 하지만 종들의 멸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자인 라이흐흘프는 Josef H. Reichholf는 이런 사정을 두고 “우리는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의 우림들이 파괴됨으로써 이미 수백만 종의 생물이 멸종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가 초래하는 민족과 언어의 멸종

저자는 인간의 무지막지한 파괴행위가 안타까워서인지 다음과 같은 사례를 책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열대우림에서 고급목재인 마호가니를 얻기 위해서 목재회사들은 열대우림 속으로 들어가 마호가니만 잘라오는 것이 아니라 경비절감을 위해 불도저를 동원해 숲으로 밀고 들어가 필요 없는 나무들까지 인간은 쓰러뜨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익 이외에 다른 생명들의 가치는 안중에도 없는 인간의 한심한 행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본성은 인류 내부의 민족들 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내면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나 부족 또는 민족, 자신의 문화전통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 반면, 어떤 민족이나 자기들에게 낯선 것들에 대해서 편견을 갖는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보다 열등한 미개인종이라는 이유로 민족 살해와 문화 파괴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죠.

저자는 야생포획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민족의 경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경우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들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한 문명과 접촉할 때가 그 첫째요, 그들의 자연적인 생활기반을 빼앗길 때가 그 둘째요, 어느 국가제도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을 때가 그 셋째라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마야·잉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보리진, 아프리카 피그미, 시베리아 원주민, 이누이트(에스키모), 일본 아이누 등의 문명도 이런 이유로 해서 이미 소멸했거나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게 된 거죠.

그런데 민족의 소멸은 민족의 소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은 문화, 전통, 관습과 도덕, 의례, 축제, 언어의 공동체이기 때문이죠. 민족의 소멸과 함께 수천수만의 토속 언어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생물종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의 다양성도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미 펜실바니아주 스워스모대학교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해리슨 교수는 현재 지구상에 남은 7000종의 언어 중 절반이 21세기 말에 사라질 것이라 예측하면서 "특정 언어를 잃게 되면 그 안에 담긴 자연과 신화, 기억,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같은 몇 세기에 걸쳐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느낌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멸위기 언어연구소'도 전 세계 약 7천종의 언어 가운데 2주일에 한개 꼴로 이들 언어가 사멸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죠. 이런 속도대로라면 2100년까지 적게는 3천400개에서 많게는 6천120개의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언어의 소멸은 인류의 지식의 소멸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은 다양한 언어들의 사멸위기를 경고면서 언어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역설합니다. 다니엘 네틀의 책에 의하면 태평양 팔라우섬의 어부들이 수백 종의 물고기 이름과 서식지, 어로 관습, 어로 기술 등과 전 세계의 과학 문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의 몇 곱절이나 되는 어종들의 음력 산란 주기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또 북극 지역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은 어떤 종류의 얼음과 눈이 사람과 개, 또는 카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얼음과 눈의 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고 하죠. 또한 필리핀의 민도로 섬에 만 2천 명 정도가 모여 사는 하우누족은 450종 이상의 동물과 천 5백 종의 식물을 구별할 수 있으며 그 중 1천 종 이상의 식물을 야생에서 채취하고 약 430종의 식물을 재배한다고 합니다. 토지에 대해서도 10종의 기본 토질과 30종의 아종 토질을 구분하며 토양의 굳은 정도에 따라 네 가지의 다른 용어를 쓴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토질을 아홉 가지의 색깔로 구별하며, 땅의 지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할 뿐 아니라 땅이 경사진 정도를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낸다고도 하죠.

바로 이런 무궁무진한 언어가 바로 토착민들의 언어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착민들의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인류의 지혜를 잃는 것과 다름없는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부르던 식물과 동물의 이름, 그 언어로 말하던 사냥법과 종교의식 등이 언어의 소멸과 함께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죠. 어마어마한 정보의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죠. 그렇다면 그 언어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 언어들이 기록된 문헌들을 도서관에 보관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면 토착민의 소수언어들이 대개 문자[글말]로 기록할 수 없는 소위 ‘입말’이라는 것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 빌 서덜랜드 대학의 교수는 과학 전문지 네이처 최신호 2003년 5월 15일자에서 최근 500년간 소멸된 언어의 비율은 전체의 4.5%로 조류(1.3%)나 포유류(1.9%)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서덜랜드 교수는 삼림지대나 열대우림, 산맥 지대에 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듯 이 언어도 이런 지역에서 풍부하게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밀림지역이나 산맥지형은 고리지대로 이동과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세요. 왜 이곳이 생물종이 다양하고 언어가 다양한지 쉽게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이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인도, 멕시코, 카메룬, 호주, 브라질 등과 같은 밀림이나 산악지형에 몰려 있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요.

『멸종-사라진 것들, 종과 민족 그리고 언어』의 저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왜 우리는 사멸되어가는 민족과 언어에 흥분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서 다음 세 가지의 답을 말합니다.

-사멸되거나 멸종되는 모든 종들과, 멸망한 모든 문화, 사라지는 모든 언어와 더불어 학슬적인 정보도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류의 지식의 보고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종의 멸종은 우리 후손들에게 축소된 생물생활권을 남기기 때문이다. (생물의 다양성은 미래세대에게 남겨줄 재산이라는 말입니다.)
- 멸종한 것들 속에 경제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 종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다가는 커다란 이익을 놓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당장의 쓸모에만 급급하는 태도, 나만이 존귀하다는 자기중심주의적 태도, 바로 이런 태도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다른 민족과 언어를 파괴하는 증오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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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지랑
인간의 비합리적 선택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

행동경제학ㅣ도모노 노리오ㅣ지형(2007)
                                                                                                                             -  김보일
 
 


인간은 과연 합리적인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손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아닐까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공익(共益)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결실도 얻게 된다.”라고 말하죠. ‘보이지 않는 손’을 다르게 부른다면 '가격'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는 ‘보이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 사지 말라고 권유하는 존재도 없고요. 가격이 적당하면 사고, 가격이 비싸면 사지 않는 것이 소비자들의 일반적인 구매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매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보이지 않는 존재’, 바로 가격입니다.

시장의 가격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조절되고, 생산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는 논리가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핵심적 논리죠. 가만 놓아두어도 가격이 거래를 성사시키니, 정부는 범죄 예방을 위해 치안유지 차원에서 야경꾼들로 하여금 순찰이나 돌게 하고, 가급적이면 시장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야경국가론’입니다. 국가는 가급적이면 국민들의 생활에 시시콜콜하게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국민들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알아서,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릴 것이니, 국가는 뒷짐 지고 있으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일까요? 적어도 아담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의 자유주의 경제학은 합리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합니다. 스위스의 물리학자 베르누이의 ‘기대 효용 이론’도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죠. 기대 효용 이론은 행동의 귀결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경제주체의 판단은 결과에 관한 효용의 기대치에 입각하여 이뤄진다는 이론이죠.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결정한다는 이론이죠. 100만원의 봉급을 주는 회사보다는 120만원의 봉급을 주는 회사를 선택하는 것도 기대 효용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인 다니엘 커너먼(심리학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그러나 맞습니다.)은 효용을 부의 절대적인 수준으로 측정하는 것을 ‘베르누이의 착오’로 표현했죠.

예를 들어 K는 한 달 사이에 금융자산이 4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줄었고, P는 1000만원에서 1100만원으로 증가했다고 가정해볼까요.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요? 베르누이 같으면 최종적인 부의 수준을 척도로 K가 더 행복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P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심리학 실험이 말해주는 진실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최종적인 부의 절대치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또 다른 예를 볼까요. 6년 간 급여 총액은 정해져 있고, 두 가지 봉급체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첫 번째 봉급체계는 처음에는 임금이 낮은 편이지만 점점 상승하는 패턴이고, 두 번째는 처음에는 봉급이 높지만 점점 더 하락하는 패턴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민이 되죠? 그러나 아마도 점점 월급이 오르는 상승패턴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선택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합리적 관점에서는 초봉이 높고 그 후 조금씩 하강하는 패턴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입사 초기에 받은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고, 회사를 다니다 도중에 퇴직하더라도 퇴직 시점까지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강 패턴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손실회피성향’입니다. 즉 지금의 높은 임금이 준거가 되면 다음 번 임금이 감소하는 만큼을 손실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이 패턴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커너먼의 실험에 따르면 1000원의 손실이 주는 불만족은 1000원의 이익이 주는 만족보다 2~2.5배 컸다고 합니다. ‘1000’원의 절대치를 효용적 가치로 볼 때는 1000원의 손실이나 1000원의 이익이 모두 같다고 할지모르지만 그것을 심리적 가치로 보자면 내 손에 굴러들어오는 ‘떡’보다 내 손을 빠져나가는 ‘떡’이 몇 배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가치는 절대치가 아니라, 기준이 되는 ‘준거점’에 의존되어 측정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준거점 의존성(reference dependence)’입니다. 동일한 붉은 색이 검정색을 배경으로 했을 때와 하얀색을 배경을 했을 때 다르게 지각되듯이, 동일한 변화에 대해서도 준거점이 다르면 다른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행동경제학

부의 절대치의 크기만을 보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준거점 의존성(reference dependence)’과 함께 ‘민감도 체감성’과 ‘손실회피성’은 다니엘 커너먼의 ‘행동경제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민감도 체감성’은 같은 3도 차이지만, 기온이 1도에서 4도로 오를 때가 21도에서 24도로 상승할 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을 설명하는 인간의 행동 특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재화의 ‘효용적 가치’가 아니라 ‘심리적 가치’라는 것이 다니엘 커너먼의 ‘행동경제학’의 기본 전제라는 거예요.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은 ‘효용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간으로 보았다면 다니엘 커너먼과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을 결코 완벽한 이성으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지 않는다고 보았죠. 오히려 인간은 감정에 치우친 결점과 오류투성이일 수 있다는 거죠.

도모노 노리오가 쓴 행동경제학 해설서인 『행동경제학』에서는 커너먼이 창시한 ‘휴리스틱(heuristic)’과 ‘바이어스(bias)’ 개념을 소개합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불완전하지만 판단에 도움이 되는 주먹구구식 직감'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하죠. 휴리스틱은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이 내리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설명하는 데 아주 유효한 개념이죠.

가령 MP3를 구입한다고 할 때, 이 구매행위가 완전히 합리적이 되려면 시중에 나온 MP3를 모두 분석해야 하죠. 가격, 성능, 디자인, 애프터서비스 수준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죠. 고려사항이 너무도 많고,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도 부족하구요. 이 어려운 결정을 손쉽게 하는 것이 바로 ‘간편 추론법’, 즉 ‘휴리스틱’입니다. 좋은 회사, 인지도와 같은 것이 판단을 결정짓는 일종의 휴리스틱인 셈이죠.

그러나 좋은 회사, 인지도 같은 속성이 MP3의 질과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오류인 ‘바이어스’를 만들어냅니다. 일류회사 제품이라는 것을 믿고 덜컥 MP3를 구입했더니 그 제품의 질이 형편없다면 그건 ‘휴리스틱으로 인한 바이스어스의 발생’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거예요. 구매행위에 비합리성이 발생한 것이죠.

이런 비합리성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을 학벌로 판단한다든가, 출신지역으로 판단하는 것도 일종의 휴리스틱이고,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로 그 사람의 미적 감각을 이해하는 것도 일종의 휴리스틱이죠. 이런 비합리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도 안 되겠고,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도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우린 정보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 판단력과 상상력의 부족으로 곧잘 사고의 비합리성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잦죠.

수학적 확률이 인간의 행동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책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에게 자살과 타살 중 어느 쪽이 많은가 물어보면 대부분 타살이 많을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착각이 발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뉴스에는 자살보다 타살사건이 훨씬 많이 보도되기 때문에 이것이 휴리스틱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판단할 때 자주 활용하는 휴리스틱은 실제 사실이나 객관적인 평가와는 거리가 멀어요.

이와 관련하여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는 재밌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저자는 과학,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대중이 위험을 느끼는 원인을 설명하면서 불안은 확률이 불러오는 것이 아닌 본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커너먼과 같은 맥락이죠.)

책에 의하면 미국의 엔지니어인 C.스타는 1960년대부터 위험에 대해 연구해 왔다고 해요. 그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죽을 확률이 사냥을 하거나 스키를 타다 죽을 확률보다 훨씬 적은데도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훨씬 더 위험하게 느끼는 것을 발견했죠. 베트남 전쟁에서 죽을 확률이 오토바이를 타다 죽을 확률 정도밖에 안 됐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위험은 전쟁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죠. C.스타는 사람이 느끼는 위험의 정도가 다른 것은 자발성과 비자발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사람들이 스키와 사냥, 오토바이를 선택하는 것은 ‘자발적’인 욕구나 필요 때문이지만, 전쟁에 징집되거나 원자력 발전소가 집 근처에 들어오는 것은 ‘비자발적’이라는 것이죠.

이 흥미로운 과학에세이는 또 한 명의 심리학자 폴 슬로빅을 소개하죠. 그는 사람이 위험을 느끼는데 있어 자발성 변수 외에 위험의 원인, 피해의 정도, 노출된 사람에 따라 비례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어요. 비행기사고나 벼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위험에 노출된 사람도 소수에 국한돼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커너먼의 논리대로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확률과 같은 합리적 요소가 아니라 심리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기술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커너먼은 인간이 비합리적 존재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2년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우리가 한 일을 인간의 비합리성을 증명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겠다. 휴리스틱(heuristic)과 바이어스(bias)에 관한 연구는 합리성이란 비현실적인 개념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착각하기 잘하는 인간, 바로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지,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심하지는 마세요. 또 어떤 실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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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만들어내는 엉터리 행복학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ㅣ대니얼 길버트ㅣ김영사(2005)
                                                                                                                          -김보일
 


컴퓨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달인이라면 몰라도, 스무 살의 삶의 달인이란 말은 형용모순이다. 컴퓨터게임이나 브레이크댄스와 같은 분야에서는 스무 살의 달인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만 스무 살은 여러모로 달인이나 고수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달인의 포스와 테크닉은 지긋한 연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수염이 지긋한 노인이 달인의 전형적인 형상이다. 구레나룻의 노인의 형상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의 투자 없이 고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무지 하나를 썰어도 맵시 있게 썰려면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고, 똥볼도 제대로 차려면 고군분투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이나 발레리나 강수지의 발을 본 적이 있는가. 정상인의 발이 아니다. 고사목처럼 뒤틀어진 그네들의 발을 보면 저것도 사람의 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저 되는 달인이나 고수는 없는 법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권력의 힘을 빌려 쟁취할 수도 없는 것이 달인의 삶이다.

달인들의 특징은 특유의 눈썰미다. 도자기를 굽는 화로 속의 온도를 특유의 직감으로 정확하게 감지해내고,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밀려오는 제품들 중에서 정확하게 어떤 제품이 불량품인지를 감지해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들의 눈썰미, 귀신의 감각을 빌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삶에서 불량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옷을 고르듯 삶을 선택할 수는 없다. 가격, 질감, 사이즈, 디자인 등 옷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은 많지 않지만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무수한 요인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번 선택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자부심도 예기치 않은 변수에 부딪혀 참담한 후회의 감정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무예의 달인도 삶에서는 번번이 이성의 칼을 놓치고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법이다. 우리들은 삶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변수들을 섬세하게 고려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이기보다는 ‘아차’를 연발하는 엄벙덤벙한 정신의 소유자이기 십상이다. 달력에 메모도 해놓고, 잊지 말자고 결심도 해보지만 정신은 늘 헛다리짚기 십상이고, 소소한 분실물들은 늘어만 간다.

그래도 이번만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해보겠다고 하지만 지구상 최고의 판단시스템을 가졌다는 인간의 인지시스템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아래 제시되는 삶 중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클릭하겠는가. 이번만은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란다.

첫째, 세계적인 기업인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만의 이야기다. 그는 혁신적인 경영 철학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시켰고, 장애인 편익, 은퇴 후 연금지급, 생명보험, 이익배분 등을 제공했고, 나중에선 회사주식의 1/3을 종업원들에게 배당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14일, 사랑받는 발명가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이스트만은 책상 위에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아돌프 피셔라는 젊은 독일 이민자다. 그는 대규모 노동자 폭동을 주동했다는 혐의(그는 사실 폭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노동조합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르던 악덕한 자본가들에 의해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는 저지르지도 않았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1887년 11월 11일, 교수대에서 외친 마지막 순간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책에서 이스트먼과 아돌프 피셔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단순한 행복론에 브레이크를 건다. 인생의 겉모습만 보고 그 속의 행복을 단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말라는 충고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는 왜 이스트만의 삶보다 피셔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대니얼 길버트는 우리의 뇌가 매일, 매시간, 매분 우리에게 속임수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길버트 교수는 우리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도 이런 속임수 때문이요, 최고급 자동차나 노트북을 사고, 짝사랑했던 그 사람과 결혼에 골인하고, 목표로 하던 대학이나 직장에 당당히 합격하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초고속으로 승진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뇌가 만들어내는 속임수 때문이라고 한다.

길버트 교수는 이런 속임수는 우리의 상상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새 자동차를 사면 매우 행복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 상상 속에는 잔소리하는 상사, 돈 빌려 달라는 친구, 십 분에 1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퇴근길의 주차 전쟁이 빠져 있는 셈이다. ‘새 자동차’라는 아이템에는 이렇게 많은 세부사항 동반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이런 세부사항을 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세부사항을 섬세하게 고려한다면 새 자동차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는 아이템이 될 수는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어떤 일과 관련된 세부적인 맥락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성능이나 기억용량에서 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연인과 헤어지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을 예상하기 쉽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알렉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피스톨로 날려 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나에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손가락을 잃는 고통쯤은 너를 잃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웅장한 제스처로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고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사랑이 소중하면 할수록 이별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손가락을 피스톨로 날려 버리면서까지 컴퓨터의 키보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삶은 의무사항이지 권장사항이 아님을 명심하자. 물론 이별이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현실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별을 하고서도 밥을 먹고 배설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속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삶은 드라마 속의 현실과는 다르다. 결국은 잊기 마련이고 살기 마련이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저자, 길버트 교수는 이를 ‘심리면역체계’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경미한 고통은 참다보면 사라진다. 그러나 커다란 고통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사라져주지 않는다. 엉겅퀴 풀씨처럼 자꾸만 들러붙으려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어떤 구실이나 명분을 붙여서라도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래, 그 사고는 내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다고 해서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야.”, “물론 그건 나의 실수였어. 하지만 그 실수는 내게 삶에 커다란 교훈을 주었어.” 옹색한 자기합리화처럼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심리면역체계’ 덕분에 인간은 비극을 넘어 다시 삶 속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나쁜 일, 피하거나 도망칠 수 없는 일은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켜 그 안에서 긍정적인 면을 본다. 가령 십 리 밖까지 다녀와야 할 심부름을 피할 수 없다면 “그래, 십 리래 봐야 4킬로미터에 불과한데 뭘, 누구는 40킬로미터도 뛰는데 그에 비하면 10분의 1도 못되는 거린데, 운동하는 셈 치고 다녀오지 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심리적 면역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앞의 슈퍼에 다녀오는 것은 마음과 몸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냥 다녀오면 그만이므로 심리적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질병에 대항해 몸을 지키는 면역체계처럼, 심리적 면역체계는 불행에 대항해 마음을 보호한다. 문제는 이 같은 뇌의 작용을 우리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이스트먼과 피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대부분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트먼으로 사는 것이 피셔로 사는 것보다 즐거울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우리의 두 삶의 빈칸을 채워 넣는 데 아주 서툴다는 것이다. 왜? 경험을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삶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두 삶의 빈칸을 채워 넣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부자의 삶은 행복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고달프다는 고정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고정관념이 뇌가 만들어내는 속임수라는 것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에바도 이런 속임수에 빠진다. 미국에만 오면 자신의 꿈이 이뤄질 줄 알고 헝가리에서 건너온 여주인공 에바를 포함한 세 명의 주인공은 미국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플로리다를 찾아 가지만 자신들이 상상했던 곳과는 딴판인 현실을 발견한다. ‘아메리칸드림’은 드림이었을 뿐 현실은 아니었다. 할리우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아메리카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주인공들의 생각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작 현실은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그곳에만 가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현실은 황무지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스트먼으로 사는 것이 피셔로 사는 것보다 즐거울 거라고 예상하지만 이스트먼의 삶 앞에 어떤 말 못할 황무지가 놓여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뇌가 이스트먼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채워놓아야 한다. 자, 무엇부터 채울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해 그의 삶의 빈칸들을 물질로부터 채운다. 좋은 가구, 자동차, 호화저택…그러나 이 대목에서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더 큰 골칫거리는 뇌가 상상에 첨가하는 내용보다 거기에서 빠뜨리는 내용 때문에 생긴다.”라고.

새 자동차를 샀을 때의 삶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때 우리는 행복한 드라이브와 피크닉을 첨가하지만 그 차를 얻기 위해서 견뎌야 했던 잔소리하는 상사, 돈 빌려 달라는 친구, 십 분에 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퇴근길의 주차 전쟁을 빠뜨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가 범하는 세부사항의 누락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행복학을 신봉하게 만든다는 것이 길버트 교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다.

그렇다면 미래의 행복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현재를 사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그러려면 행복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행복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많은 사람이 행복을 미래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미래를 위한 준비는 필수다. 그러나 미래에 끌려가는 삶, 현재의 만족을 유예시키기만 하는 삶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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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자유화를 향한 문학적 저항
열일곱 살의 털ㅣ김해원ㅣ사계절(2008년)
 
 
                                                                                                                                  -김보일


대한민국에서 머리를 깎아야 하는 집단은 넷이다. 먼저 승려, 다음은 죄수, 그리고 군인, 마지막으로 학생이다. 승려는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는다. 삭발은 속세와의 절연을 의미한다. 욕망에 이끌리는 속세와의 삶을 단호히 청산하겠다는 의미다. 군대와 교도소에서 군인과 죄수의 머리를 일제히 짧게 자르는 것은 효과적인 억압과 지배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할까. 『감시와 처벌』의 저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하면 귀밑머리를 3센티로 깎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규율을 만든 것일까. 푸코에 의하면 다만 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규율을 강제한다는 것이 푸코의 대답이다. 군인과 죄수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는 것이나 학생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는 것이나 그 이유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는 강령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강력한 믿음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두발에 있어서 개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학교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 셈이다. 그러나 ‘두발자유화’만큼 찬반의 논란이 분분한 소재도 없다.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학교현장에서 두발 규제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 사태가 곧잘 신문지상에 보도되곤 한다.

이렇게 민감한 소재인 ‘두발자유화’를 본격적인 문학의 소재로 다룬 소설이 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열일곱 살의 털』이다. 자칫 지레짐작으로 이 책이 ‘두발자유화’의 주장을 외치는 생경한 고발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은 문학이 어떠한 주장을 말하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를 보여준다. ‘머리털’을 둘러싼 풍성한 담론과 작가의 녹록치 않은 성찰은 이 소설을 한낱 ‘소재주의적인 소설’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한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 소년 송일호다. (‘일호’라고 하니 ‘일호(一毫)’가 연상된다. 한 터럭이라는 뜻이겠다. 재미있는 명명이다. ‘쪼잔’하고 물컹했던 범생이 일호가 학교의 강압적인 두발규제에 맞서 정학을 당하고 1인 시위를 벌이면서 나와 가족과 세계에 대해 눈을 뜨며 ‘야물딱지게’ 커가는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속단은 이르다. 내용은 기대 이상으로 풍성하다. 두발단속에 저장하는 주인공 송일호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이발소인 태성이발소의 3대 이발사다. 고조 할아버지는 고종황제 시절 단발령을 따르지 않는 백성들의 상투를 자르는 관직, 체두관이었다. 머리칼을 자르는 가업으로 삼는 집의 손자가 머리칼을 자르는 것에 저항한다는,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이 소설에서 시종 긴장과 흥미를 이끌어낸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믿고 살아온 할아버지의 ‘세상의 모든 머리털은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고, 아이들의 머리털은 부모의 동의를 얻고, 어른은 스스로 허용해야 이발사가 가위를 든다.’라는 ‘두발 철학’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발사 가족이라는 특수한 일호의 가족사다.

할아버지가 보름마다 해주는 '삼삼삼'(앞머리, 뒷머리, 옆머리 모두 3㎝) 이발 때문에 입학식 날부터 '모범생 1호'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은 일호는 체육선생이 두발 규정을 어긴 아이의 머리에 라이터를 들이대며 위협하는 것을 보고 돌변한다. 이 과정에서 일호는 ‘열일곱 살의 털’은 단순한 ‘털’이 아니라 인격과 인권의 문제임을 깨닫고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마포구 도원동 일대의 재개발을 놓고 주민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나뉘자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 반대를 해야 쓰겠습니까? 우리가 따라야지요.”라며 찬성파로서 주민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재개발을 하게 되면 개발 이익은 건설업체가 챙기고, 영세한 주민들은 살던 집마저 빼앗겨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손자, 일호의 1인 시위 사실을 알게 되자, 교내 이발소에서 학생들 머리를 별 모양으로 깎으며 손자에게 힘을 보탠다.

일호가 체육교사의 라이터를 빼앗아 내던진 바로 그 날. 17년 전 원양어선을 탄 이래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가 돌아온다. 다음날 학교 상담실로 불려간 아버지는 학생부장에게 “바리캉으로 머리를 미는 행위는 반인권적”이라며 맞선다. 1980년대 운동권 세대를 상징하는 듯한 일호의 아버지는 학생부장에게 거의 준비된 연설문에 가까운 훈계를 늘어놓는다. “ 아이들의 반대의견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묵살하고 제재를 가하다 보면 올바른 교육을 해칠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은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대한민국의 경직된 교육현실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는 점에서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겠다.

1895년, 고종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단발령을 단행한다. 짧은 머리는 사실 위생개혁의 일환이었다. 그 시절이야 샤워 시설이나 온수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이가 득시글거리던 시절이었으니 짧은 머리가 위생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신체의 자유, 인권에 대한 시민의식도 그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 한겨울에도 하의 주머니를 꿰매게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학생으로서의 절도와 품위가 손상된다고 으르대던 군사독재시절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열일곱 살의 털』은 이런 점에서 좋은 타이밍을 맞았다. 더구나 한 영화사에서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이다. 과연 열일곱 살의 머리털은 누가 관리할지, 두발자유화에 대한 사회 각계의 성숙한 의견 교환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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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주눅 들지 않는 2인조 가족

2인조 가족ㅣ샤일라 오호ㅣ양철북(2009년)
 
                                                                                                                         - 김보일


샤일라 오호의 소설, 『2인조 가족』은 구질구질한 궁핍의 이야기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은 가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활달하고 씩씩하고 꿋꿋하다. 주인공 야나는 예측불가의 괴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사춘기 소녀 야나는 남자친구와의 근사한 데이트를 상상하고 복권에라도 당첨되어 좋은 옷도 사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꿈꾼다. 그러나 야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스타일을 챙기기에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냐가 누군가. 가난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할 말도 못하는 소녀가 아니다. 할아버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한술 더 뜨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다. 거짓말 9단에 사람들이 내다버리는 철학책에서 얻은 인문학적 지식도 보통은 아니다. 나잇살도 지긋하니 체면 같은 것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이 발랄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망측한 발언들은 망측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적이다. 그 나이쯤 먹으면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감도 없고, 체면치레 같은 것은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손녀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시대보다 몇 광년은 앞서가는 삶을 살고 있는 노인네다. (이 노인네의 작중 발언을 야곰야곰 음미해 보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중의 하나다.)

왜 사냐는 아냐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나는 화려하게 꾸며 입고, 인생에 만족하고, 배터지게 쳐먹고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려고 살고 있어. 내가 두뇌가 되어 그런 무리 대신 생각을 해주는 거지.” 맞다. 이 노인네의 사는 방식은 우리네 뻔한 삶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이 노인네, 겁이 없다. 악착같이 벌어 조금이라도 비축해두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산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우리네 태도를 이 노인네는 맘껏 비웃는다. 아마로 『마시멜로 이야기』를 들먹이며 현재의 주검 위에 미래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덜떨어진 성장주의자에게 이 소설의 한 대목을 들려줘도 좋겠다. ”고마워. 인생! 우리가 사는 공간에 정확하게 경계를 그려줘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가방에 심하게 정강이를 차이자 아마도 이런 순간에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상상한 내용이다. 현실의 불운 속에서도 우리는 아냐처럼 얼마든지 유용한 격언을 발명해낼 수 있다. 그 격언은 불우를 견딜 수 있는 포스와 유머를 만들어준다. 이 소설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둘째, 솔직하다. 마음이 시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사양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분증의 출생년도를 1799년으로 위조해놓고, 경찰에게도 자신이 실제로 1799년이라고 부득부득 우긴다. 미칠 일은 옆에서 그녀의 손녀 아냐까지 가세해 같이 우긴다는 거다. (세상은 인민들에게 상식을 요구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이런 무뎁뽀 인민들이 한 둘이 있어주어서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귀여운 몰상식 만세! 한번 놀아보자는 유희정신으로 똘똘 뭉쳐 자본주의의 성장 이데올로기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 불온한 상상력 만세!)

셋째, 이 노인네가 원하는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삶이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고 자고 싶으면 자는 삶이지, 누가 자란다고 해서 자는 삶이 아니다. 따로 정해져 있는 취침시간에 잠드는 그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양로원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이 노인네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그는 양로원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엘 가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판사들을 위해 멋진 일장연설까지 준비한다. 상식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멋지게 한방 먹일 태세다. (독자들은 이 노인네가 상식의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한방을 먹이느냐에 끊임없이 주목하게 된다.)

어떻든 이 노인네는 자본주의의 생산원칙이 강요하는 방식에 고분고분할 마음이 애시당초 없다. 그는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원칙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애초부터 다르게 살아보기로 아주 작정을 한 노인이다. (이 노인네가 젊어서도 이런 삶의 원칙을 고수했는지는 의문이다. 설령 이 노인네가 젊어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했다 할지라도 늙어서라도 이런 변칙의 삶을 산다고 해서 주착이니 어쩌니 토를 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늙어서라도 제 의지와 원칙대로 살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박수를 보낼 일이지 비난을 보낼 일이 아니다.)

넷째, 이 노인네 말빨이 장난이 아니다. 그의 말빨은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쓰레기 철학책에서 얻은 오랜 내공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발언에 철학적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예리한 직관, 시적인 통찰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슬퍼 보이냐는 손녀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네가 슬픈 건, 멍청한 송아지이기 때문이야. 송아지들은 눈이 슬프거든” 슬픔은 생활의 조건 같은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예 한편의 시를 쓰고 있다.

이 노인네와 아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이라는 것은 아주 편협하고 옹색한 가족주의다. 가족은 서로 품고 이해하는 나눔과 공감의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아냐와 할아버지는 훌륭한 ‘2인조 가족’이다. 피는 한 방울도 섞지 않았지만 노인의 기질은 그대로 아냐에게 유전된다.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 수 있는 정신, 바로 그것이 사람을 하늘로 여기는 인문정신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어지간한 삶의 비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삶을 공중에 살짝 띄워보겠다는 유머정신이기도 하다. 유머정신이란 현실의 질서를 뒤틀어보겠다는 반역의 정신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가 바로 아냐다. 똑똑하고 건방지지만 꽤나 사색적이고 문학적이다. 게다가 살짝 염치가 없기까지 하다. 자신의 체스선생이 그녀를 초대해 약간의 과잉 제스쳐(?)를 보이자 아냐는 그를 밀치고 집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런 정신없는 비극의 와중에서도 생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낚아내어 빼어나올 수 있는 담대함이 아냐에겐 있다. 아냐는 그런 점에서 얼빠진 정신주의자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배고픔의 실체가 뭔지를 똑똑하게 아는 아이다. 그런 아이의 내면, 그런 아이의 유머, 그런 아이의 사랑을 들여다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 쓰러져 가는 임대주택의 지하에 살면서도 자신의 집을 “우리 집은 엄청나게 넓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 집은 세계사에 존재했던 모든 중요한 건축물의 특징을 조금씩은 다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집은 콜로세움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베니스와 제노바 공화국 총독 관저처럼 천장이 높고, 발할라 궁전만큼이나 황량하고, 도시 변두리와 주택가처럼 황폐하고 왕의 무덤처럼 서늘하고 음침했다.”라고 묘사할 수 있는 여유는 칭찬해줄 만하다.

대체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소한의 의식주와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유럽식 사회보장제도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난을 궁상맞게 연출하지 않아서 좋다. 가난해도 철학을 알고 시를 알고 웃음을 안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모든 여유를 부릴 줄 안다. 심지어는 양로원에서조차 아냐의 할아버지는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는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내가 실없는 소리를 잘 하잖아요. 내가 죽긴 왜 죽어요? 정신은 어디에서든 자유로워요. 그리고 여기는 때 되면 어김없이 밥이 나오고요.” 비럭질을 해먹어도 할 말이 있다는, 그 모습이 참으로 늠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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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로 글을 쓰며 거대기술에 저항하는 근본주의자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ㅣ웬델 베리ㅣ양문(2002년)
 
                                                                                                                         -김보일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의 저자, 웬델 베리는 1956년산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를 가지고 글을 씁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컴퓨터를 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입니다. 컴퓨터를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력은 자연의 질서를 위배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크는 컴퓨터에 반대합니다. 그 역시 컴퓨터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편리함을 얻기 위해 자연과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진정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는 것이 웬델 베리의 결벽증에 가까운 견해죠.

웬델 베리는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자연을 약탈하는 일에 연루된다면 양심상 어떻게 자연 파괴에 반대하는 글을 쓰겠는가?”고 말합니다. 베리는 자연을 약탈하는 어떤 기술에도 동조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자죠. 그는 “컴퓨터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평화나 경제적 정의, 생태적 건강함, 정치적 정직, 가족과 공동체의 안정, 선한 노동, 그 어떤 것에도 우리가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라 보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면서 각종 오염물질을 만들어내는 컴퓨터를 쓰는 소비자, 비료를 뿌려 재배한 먹거리를 사는 바로 당신이 문제라고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전기시스템은 발전 설비를 갖추고 선로망을 통해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 공급된 전기를 다양한 형태로 소비할 수 있도록 전자제품들을 생산해내는 가전업체, 발전소에 필요한 화석연료를 공급하는 유조선과 선박회사,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시추선과 이를 정제하는 정유공장 등 소규모 시스템들을 그 속에 포괄하는 거대시스템입니다. 호미나 낫을 만드는 대장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스케일과 복잡한 체계를 갖춘 것이 이 거대 기술시스템이죠. 외국으로 유학 간 친구와 실시간으로 채팅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거대시스템 덕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거대시스템 덕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삶의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증대해주고 사회의 모습을 새로운 방향으로 구조화하는 거대기술 시스템이 근본적인 결함과 불완전성을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는, 기술시스템에 포괄된 특정 구성요소에 내재한 사소한 문제가 시스템의 전반에 대한 순간적인 붕괴로 이어지는 대형사고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이런 거대기술시스템은 대규모의 환경파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대형 전력 사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산업시스템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구요.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의 저자, 윈델 베리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이런 거대기술시스템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웬델 베리가 컴퓨터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거대기술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간디의 물레’가 갖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교수가 그의 수필 <간디의 물레>에서 “물레는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 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 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 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 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로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라고 지적했듯이, 간디의 물레는 거대 기술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김종철 교수는 웬델 베리와 같이 확장지향적인 현대기술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자로 통하죠. 그에겐 적당한 타협이 없습니다. 현대문명에 대해서 근본주의자적 면모를 보이는 웬델 베리의 글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가 김종철 교수가 발행인으로 있는 잡지 《녹색평론》에 소개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어떤 점에서는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가 없지요. 근본주의자가 근본주의자를 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종철 교수는 ‘간디의 물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업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 사상의 문화적 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라고. 간디에게 물레는 단순히 도구 이상의 것이듯, 웬델 베리에게도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디에게 있어서 물레가 공동체를 재건하는 의미였다면, 웬델 베리에게 컴퓨터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의미였다고나 할까요.

거대한 현대기술의 비인간성을 간파한 이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였습니다. 그는 1961년 네루의 초청을 받아 인도의 농촌개발을 위한 자문으로 인도를 방문하게 됩니다. 슈마허는 당시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인도의 농촌현실을 둘러보고 제3세계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이끌어 내기 위한 기술로서 ‘중간기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대량 생산에 의한 대량 소비가 진행되면서, 대량 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 투하량의 증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의 대규모화와 거대 조직화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죠. 소득과 자원에 있어서 부국과 빈국의 갈등, 특정집단의 기술 독점으로 인한 불평등,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의 파괴 등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슈마허가 창안한 개념이 이른바 ‘중간기술’입니다. 기술은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증가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그 혜택을 돌려줄 수 있어야 하며, 기술은 자원을 남용하지 않으면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 중간 기술입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는 중간 기술이야말로 개발도상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개발 전략이라는 것이 슈마허의 주장이죠. 호미로 농사를 짓고 있는 제3세계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들여오게 되면, 농촌인구 과잉에 일자리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는 대다수의 제3세계에 더 많은 실업과 혼란을 야기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아니라 복잡한 기계에 무지한 농민들은 기계와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매여 버리게 된다고 슈마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슈마허 박사는 호미와 트랙터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기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중간기술이라 이름붙이고, 그러한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하여 '중간기술 개발 그룹'이라는 국제적인 단체를 조직하게 됩니다.

중간기술의 개념은 슈마허 스스로가 인정하듯 그것은 본래 간디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면서부터 영국의 섬유 공업이 인도 가내 공업을 파괴하고, 영국이 섬유 산업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많은 이윤을 가져가고 있을 때, 간디는 서양의 거대한 생산체계가 제3세계의 민중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한다고 생각했죠. 간디는 물레가 영국의 대규모 섬유공업처럼 인도인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며 인간성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슈마허의 ‘중간기술’은 바로 이런 간디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규모 기계화와 화학비료 및 농약의 대량 사용이 빚어낸 농업의 사회구조는 인간이 살아 있는 자연과 진정으로 접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구조는 사실상 폭력, 소외, 환경 파괴와 같은 근대의 가장 위험한 경향을 지지한다. 여기서는 건강, 아름다움, 영속성이 거의 진지하게 논의되는 일조차 없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무시되는 또 다른 사례로서, 경제주의라는 우상숭배의 필연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윈델 베리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윈델 베리 또한 슈마허처럼 ‘거대한 것’들을 반대하고 작은 것들을 지향합니다. 그는 거대 기술과 개발 위주의 발전이 아닌 소규모 기술과 개별적 특수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늘린다거나 새로 길을 닦음으로써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을 거부하죠. 여기에서『행복은 자전거를 타고온다』의 저자 이반 일리히가 자전거를 새로운 문명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도 ‘적정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자동차 산업도 복잡한 생산조직과 판매 시스템과 연료공급 시스템 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규모의 체계입니다. <자동차에서 자전거로>라는 일리히의 주장은 바로 비인간적인 ‘거대기술’에서 인간적인 규모인 ‘적정기술’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엔델 베리는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 없다』에서 기술혁신(기술혁신이라고 주장하니까)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새로운 도구는 이전 것보다 값이 싸야 한다. 둘, 그것은 크기 면에서 이전 것에 비해 작아야 한다. 셋, 그것은 이전 것보다 분명하고 명백하게 더 나은 일을 해야 한다. 넷, 그것은 이전 것보다 에너지가 덜 소비되어야 한다. 다섯, 가능하다면 새 도구는 신체처럼 어떤 형태로든 태양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여섯,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수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 가능하면 집 가까운 곳에서 구입할 수 있고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여덟, 그 도구는 유지나 수리를 위해 다시 맡길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작은 가게나 상점으로부터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 아홉, 그 도구가 가족이나 공동체 관계 등을 포함한 기존에 있는 어떤 좋은 것들을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윈델 베리였다면 지방에 세워지는 대규모 마트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대규모 마트가 지방에서 얻은 이윤을 대도시로 앗아가고, 지방의 고유한 문화와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네의 구멍가게나 재래식 장터는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 살아있는 곳이지만 대형 마트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거대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대기술은 인간에게 편리를 가져다주었지만 편리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 웬델 베리의 생각입니다. 왜 그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타자기로 글을 쓰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시는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는 ‘작은 것’, 적정한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웬델 베리였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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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시대에 문화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책

문화를 넘어서ㅣ에드워드 홀ㅣ한길사(2000년)
                                                                     
                                                                                                                        -김보일

나의 문화만이 절대적인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문화라는 자각 없이도 수많은 문화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말을 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추석에는 송편을 먹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행위들을 ‘문화’라고 자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행할 뿐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엄연히 문화에 속합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고, 음력 8월 15일이나 동짓날도 그저 평범한 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상기해보세요. 그런데 어떤 한국 사람이 미국사람에게 왜 너희들은 건방지게 부모에게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를 설득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설득의 답을 마련하는 책이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입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드 홀은 “다른 문화에 자신의 문화를 투영시키는 방법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이 저마다 다르고, 생각이나 가치관도 다르고, 그들이 사는 환경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만의 기준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강요하기가 일쑤라는 것이죠.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 이라고 불리는 티벳의 장례문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티벳인들은 윤회사상을 깊이 믿기 때문에, 죽은 후 자기의 시신(屍身)을 신성한 독수리가 먹어 치우면, 바로 승천하거나 아니면 부귀한 집안에 잉태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지 어찌 죽은 사람의 시체를 칼로 도막내 새들에게 던져줄 수 있느냐, 당신들은 미개인이라고 비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집단의 문화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즉 조장에는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이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건조한 티벳의 자연환경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쉽지 않은 건조한 기후에서 화장(火葬)을 하기 위한 나무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기에 충분할 나무를 구입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장(水葬)도 문제입니다. 건조기후에서는 물은 희귀한 자원에 속합니다. 수장은 이 희귀한 자원을 오염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겠죠. 또 흘 속에 묻는 토장(土葬)도 문제가 많습니다. 티벳의 메마른 땅에서는 시체가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국 티벳이라는 건조한 환경에서는 조장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화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화를 절대시하는 태도를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가 한국인의 개고기 식습관 문화를 야만적인 짓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런 태도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멘트가 있는 TV 광고가 있었는데, 우리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태도도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이유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문화는 침묵의 언어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만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 의견과는 다르더라도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원활한 의사교환, 즉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면 대화는 단순한 의견교환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성숙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를 넘어서』의 저자 또한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언어입니다. 언어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문화에도 언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처럼 소리가 있고, 소리에 따른 형상이 있는 구체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저자는 문화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개념을 이해하는 데 이 ’침묵‘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드워드 홀은 침묵은 먼저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똑같은 감각기관과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공통의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령 일본인들은 방 가장자리를 비워두는 반면 서구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며 가장자리를 채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감각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패턴화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각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런 상이한 감각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벽과 가구 그리고 실내 공간을 일본인들은 반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중심부를 채우는 반면 서구인들은 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가장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죠. 그래서 일본인들은 동부나 서부가 발달하고 중심부의 문화가 텅빈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문화를 황량하다고 생각하지요. 일본인들이 미국의 방을 보고는 중심부가 비었기 때문에 황량해 보인다고 평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문화에서 형성된 다른 감각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화권마다 공간 사용방식이 다릅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볼까요.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 학생이 미국인 친구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다가서면 미국 학생들은 놀라는 듯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나 라틴계학생들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가까이 가면 그들은 태연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바로 미국인들과 라틴계 사람들은 공간의 사용방식이 다르다는 점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한국인이나 라틴계 사람들이 접근을 허용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라틴계 사람들이나 한국인들이 허용하는 접근기준보다 훨씬 더 관대합니다. 그들은 인사할 때 서로 콧등을 부비기도 합니다. 만약 미국 사람들에게 이런 인사를 했다가는 ‘성희롱’이라는 달갑지 않는 모욕을 감수해야할 것입니다.



문화에 따라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용방식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프록세믹스(proxemics)'라는 개념으로 저자는 각국의 공간사용방식을 말합니다. 문화권마다 개인마다 공간의 사용방식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를 편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근접한 거리를 편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 적정한 거리감각을 갖게 하고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프로세믹스에 관한 섬세한 고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는 이 ‘프로세믹스’를 충분히 고려한 것일까요.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설 곳조차 마땅하지 않은 출근길의 전철 안은 어떨까요. 상품의 진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람들의 동선에는 관심이 없는 대형마트는 어떨까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각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도시의 건물과 도로와 교통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사무실의 배치는 어떤 사람에게는 극심한 소외감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요. 한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간의 사용방식을 존중한다는 것이니까요.

저자는 현대적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 건강과 질병, 문화적 격차, 인종 간 갈등 등의 위기들이 바로 우리의 '공간'에 대한 감각이 획일화하여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사회의 소통양식으로서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이란 개념도 문화의 이해에 꼭 필요한 개념입니다.

고맥락 문화는 어떤 행위가 어떤 문맥에서 결정되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입니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날 훈련 중에 물 한 통이 생겼다고 해볼까요. 과연 누가 먼저 마셔야 할까요. ‘장유유서’와 ‘가부장제’라는 유교적 전통이 엄연히 살아있는 고맥락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당연히 고참자나 연장자가 물을 먼저 마실 것입니다. 누가 먼저 마실까 토론이 필요없죠. 그러나 유교적 문화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적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토론이 필요 없으니 효율적 사회요, 미국은 토론과 합의를 거쳐야 하니 비효율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한국 사람들은 문제해결을 토론에 의존하지 않고 나이나 직위와 같은 권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권위적 문제해결방식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유럽 전통의 모노크로닉(monochronic)한 시간관과 라틴아메리카나 중동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폴리크로닉(polychronic)한 시간관도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문화의 이해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개념입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선형적(線形的)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개 한 번에 하나씩 해나가는 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스케줄, 시간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들은 사회생활, 경제생활이 철저하게 시간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은 비선형적 사고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시간관의 특징은 몇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이 체계에 속한 사람은 미리 계획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기보다는 사람끼리 이루어지는 관계나 일 처리 과정에서의 성취도에 역점을 둡니다. 폴리크로닉한 시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간섭합니다. 이들이 시간표에 맞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의 체계가 없었다면, 인간에게서 공업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홀은 말합니다. 그런데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장점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결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노크로닉한 시간관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특정 개인, 기껏해야 두세 사람과 관련 맺는 관계를 강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유물이나 문화재를 이해한다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권의 사람들이 행동을 결정짓는 복잡다단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화, 즉 침묵의 문화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문화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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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도덕감정의 진화론적 기원은 무엇인가?


도덕적 동물ㅣ로버트 라이트ㅣ사이언스북스(2003년)
                                       
                                                                                   - 김보일


미(美)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


비너스 조각상을 보면 머리의 길이와 어깨~배꼽의 길이 비율이 1대 1.618입니다. 또 상반신(머리~배꼽)과 하반신(배꼽~발끝)의 비율, 하반신에서 무릎을 기준으로 한 양쪽 비율도 같은 수치죠. 바로 이 비율(1대 1.618)이 인간이 어떤 대상을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비율, 즉 '황금비'입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이 황금비는 2차방정식 ‘x²+x-1=0’의 근에 해당하는 무리수(약 1.618)죠. 파르테논 신전, 석굴암 본존불, 밀로의 비너스,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 세계적 문화유산들은 제작 시기나 제작자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황금비'(1대1.618, 또는 5대8)’ 구조를 가진다고 합니다.
성형외과 의사들도 문명과 인종에 관계없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황금비를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왼쪽뺨 끝에서 오른쪽 뺨 끝까지의 거리를 A라고 하고 턱끝에서 머리끝까지의 비율을 B라고 할 때 A와 B의 비율이 1대 1.618이라는 거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대상이 이 황금비를 구현하고 있다면 그 대상은 인종과 지역을 초월해서 아름답다는 인상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객관주의적 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느끼는 자’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 대상이 갖는 객관적 성질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황금비를 구현하고 있는 소위 ‘팔등신’ 미녀만을 좋아할까요? 인기가 있는 할리우드 톱스타들도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이 1대 1.618일까요?
세상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움을 보는 기준도 각양각색입니다. 풍만함이 미의 기준이던 시대도 있었죠. 17~18세기 유럽의 바로크시대나 백제 시대의 경우 말입니다. 그 시대에는 늘씬한 여성들은 미인의 축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현대의 여성들은 바로크 시대의 미인의 몸매를 선사하겠다면 "No Thanks"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모든 여성들이 ‘롱다리’에 ‘삐쩍 마른’ 체형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만큼 미묘한 개인차를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미인대회나 광고 속의 여성들이 미인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는 거죠.



진화심리학자들이 바라보는 미(美)


그러나 진화심리학자들은 인종ㆍ세대ㆍ지리ㆍ문화적 차이와 관계없이 우리의 행동과 심리를 유사하게 만드는 본성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진화심리학은 사람의 마음도 몸처럼 진화의 산물이라고 간주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류의 조상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수십 만 년 전의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선택된 기능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거죠.
진화론의 핵심개념인 ‘적응’ 개념은 쉽게 말하면, ‘다 있을 만하니까 있는 것’이라는 점이죠. 가령 ‘아름다움’도 ‘다 있을 만하니까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하다면 다음의 예를 살펴볼까요.
텍사스 대학의 데벤드라 싱 교수에 따르면 골반에 대한 허리둘레의 비례(WHR= Waist Hip Ratio 허리/엉덩이 비)는 자식을 낳아 돌볼 능력과 질병 저항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성들에게는 WHR이 0.7 정도인 여성이 남성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거죠. WHR이 매우 크거나 작은 여성들은 짝짓기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비적응적’이지만, WHR이 0.7의 경우는 짝짓기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적응적’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0.7인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번식과 진화에 유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WHR이 0.7인 여성을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미’에 대한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남자가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여성의 미를 다산성(多産性)의 척도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비너스와 같이 아름다운 여자일수록 종족 보존 능력이 뛰어나므로 짝짓기에서 유리하다는 뜻이죠.



마음도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도 몸처럼 진화의 산물, 즉 적응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인류의 조상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선택된 기능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가령 스트레스를 더 잘 받는 사람이 생존경쟁에 더 잘 대처해서 우리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추정입니다. 초기 인류 시대에 하나의 열매를 두고 이 열매가 먹어도 될 열매인지 먹지 말아야 할 열매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이 경우 의심이 많고, 공포를 잘 느끼고, 새로운 상황에 스트레스를 더 잘 받는 동물, 즉 ‘겁 많은 동물’이 ‘겁 없는 동물’보다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포를 더 잘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동물들이 그렇지 않은 동물들보다 자연선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리는 인간의 공포심은 적응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진화심리학자들은 인류가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직면한 여러 유형의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설계된 마음을 가진 개체가 진화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로버트 라이트의 책, 『도덕적 동물』역시 이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언어에서 짝짓기에서부터 가족과 정치, 그리고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현대 진화생물학의 기본 원리에 의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심리는 ‘자연선택’의 무수한 누적에 의해 디자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진화적 관점에서 번식력이 떨어지는 짝을 고른 남성은 번식 가치가 높은 여성과 짝짓기를 한 남성에 비해 틀림없이 번식 성공도에서 뒤쳐졌을 것입니다. 또 자신과 그 자식들에게 자원을 투자할 수 없거나 투자하려는 의지가 적은 남성을 선택했던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번식 측면에서 덜 성공했겠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번식 가치를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여성의 젊음과 외모가 남성들에게는 중요한 선택요인이 되었을 것이며, 여성에겐 남성의 자원, 야망, 재산, 헌신이 짝짓기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진회심리학자들은 성과 결혼의 문제를 이해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말한 균형과 대칭의 미학도 진화심리학자들은 색다르게 설명합니다. 몸이 대칭적인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유전자는 그 사람의 우수한 저항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즉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사람은 자신의 짝을 고를 때 얼굴과 몸이 얼마나 대칭적인가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며 약간의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심리학자들의 연구실에서 밝혀진 바 있습니다. 미국 뉴멕시코대 심리학자인 갠지스테드와 생물학자인 손힐은 매력과 대칭성의 정도가 밀접한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왜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배우자의 외모를 따지지 않고, 배우자의 사회적 지위와 자산을 따지는 경향이 있을까요. 진회심리학자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수컷은 무수히 많은 정자를 만들어내고, 자손을 돌보는 데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므로 가능한 한 많은 짝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암컷은 극소수의 난자를 만듭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뱃속에 태아를 담고 다녀야 하고, 출산 후에도 새끼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있어서 가급적이면 수컷에게 많은 투자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수컷이 자신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해줄 수 있는 수컷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수컷은 자식 양육에 덜 투자하므로 짝의 양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암컷은 자식 양육에 더 투자하므로 짝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죠.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이타성의 기원


사람들은 생면부지인 타인을 위해 헌혈하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의 진화론적 기원은 무엇일까요?
『도덕적 동물』에서 저자는 생물의 이타적 행동을 ‘혈연선택’과 상호 이타주의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혈연선택 이론에 따르면 혈연으로 맺어진 개체들은 구성원들이 공유한 유전자를 영속시키기 위해 가까운 친척에게 이타적인 혜택을 베풉니다. 혈연선택 가설은 생물학자인 윌리엄 해밀턴이 1963년 제기한 이론으로 혈연을 돕는 것이 내 유전자의 번성을 돕는다는 관점으로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죠.
혈연선택이론의 가장 큰 약점은 이타적 행동이 굳이 혈연관계에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만 국한되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이론을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까지 확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그렇다면 왜 생물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에도 이타적 행위를 하는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는 것이 상호 이타주의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개체 사이에서 이타적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내가 도움을 주면 나도 너에게 도움을 준다.”는 식의 호혜적 행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혜주의는 당신이 어떤 이에게 도움을 받았어도 그에게 은혜를 갚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팃포탯(Tit-for-Tat) 전략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로 설명되는 팃포탯은 “처음에는 협력한다.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그전에 행동한 대로 따라서 한다”는 두 개의 규칙으로 구성됩니다. 팃포탯은 인정 많음(먼저 배반자가 되지 않음), 분개(상대방이 배반하면 따라서 배반함으로써 즉시 응징함), 관대(상대방이 배반한 적이 있더라도 다시 협력하면 따라 협력함으로써 협조 분위기를 복원시킴)의 특성을 갖고 있죠. 한마디로 당근과 채찍을 합쳐 놓은 전략이죠. 결론적으로 팃포탯은 상호 호혜주의에 의해 이기적인 개체들로부터 협력 관계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화론이 인간의 심리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도덕적 동물』의 저자는 과연 일부일처제는 남자에게 유리한가, 아니면 여자에게 유리한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일부일처제는 인간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요, 남성들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154개의 사회 가운데 980곳에서 한명의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리도록 허용해 왔다고 합니다. 일부일처제 아래에서는 남자는 다른 남성과 심한 경쟁을 할 필요가 없고, 일부다처제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이 능력 있는 한 남성에게 높은 수준의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는 능력이 없어 짝을 찾지 못할 위험이 있는 남성들을 위한 제도이며, 남녀 간의 평등이 아니라 남자들 간의 평등을 위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유전자가 인간 심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고집스럽게 말하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저자는 “문화적 다양성은 동일한 인간 본성이 매우 다양한 환경에 반응한 결과다.” 라고 말합니다.
현대의 진화론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진화론이 기존의 세계관과 학문에 어떤 충격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궁금증이 있다면 이 책은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1994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도 이 책이 바로 그런 궁금증에 적절하게 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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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의 전략을 가르치는 게임의 법칙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ㅣ박찬희, 한순구ㅣ경문사(2005)
 
                                                                                                                         - 김보일
 


힘도 세다, 똑똑하다, 게다가 돈도 많고, 든든한 배경, 소위 ‘빽’도 있고, 얼굴도 반반하고, 재주도 많다, 이런 사람은 게임에서 항상 이깁니다. 전략이고 뭐고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죠. 패배를 모르는 완벽한 인간은 싸구려 할리우드 영화 속에나 있는 법입니다. 정맥과 동맥에 피가 도는, 현실의 인간, 저자거리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조금은 부실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이렇게 부실한 인간들이라고 해서 항상 게임에 진다고 하면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닐 거예요. 미꾸라지들도 용과 싸워 한 번 이겨 봐야 살 맛 나는 세상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불리한 게임에서도 이길 수 있을까요. 바로 좋은 전략을 짜면 될 것입니다. 저쪽에서 하나를 생각하면 이쪽에선 둘을 생각하면 되고, 저쪽에서 둘을 생각하면 이쪽에선 열을 생각하면 되죠.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저쪽이 생각하지도 못할 예상외의 수를 두면 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소위 ‘무데뽀’로 가보는 거죠. 그것도 안 통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배수진(背水陣)’을 치면, 저쪽에선 기겁을 하고 꽁지를 내릴 수도 있겠죠. 바로 이런 것이 게임의 이론이고, 싸움의 기술입니다.

확실히 밟아놓아야 될 상황에서 적당히 밟아 놓으면 적은 다시 부활해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살려 보낸 관우는 덕에 있어서는 영웅일지 몰라도 조조의 끝장을 보고자 했던 제갈량보다는 전략에 있어서는 한수 아래죠. 동정심이나 연민은 윤리학자들에게는 금과옥조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승리를 위해 매진하는 자에게 그것은 금기에 속합니다.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눈앞의 목표물을 놓칠 수가 있죠. 냉정하라. 이것이 게임의 이론이 가르치는 법칙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이 말하는 게임이론이란,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 영향을 주는 전략적인 상황에서 다수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입니다.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쉽게 말해 ‘홀짝놀이’를 하는 상황이죠. 장기를 두거나 바둑을 두는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두는가에 상관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응수하다가는 내 밑천을 다 까먹고 맙니다. 저쪽에서 어떤 수를 둘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이렇게 상대방의 수에 따라 나의 수를 결정해야 하는 ‘전략적 상황’이 바로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 영향을 주는 상황’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자동차 게임이 이른바 ‘치킨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입니다. 핸들을 꺾은 사람은 겁쟁이, 즉 치킨으로 몰려 명예롭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핸들을 꺾지 않을 경우 게임에서는 둘 다 승자가 되지만, 결국 충돌함으로써 양쪽 모두 자멸하게 됩니다. 즉, 어느 한 쪽도 양보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게임이 바로 치킨게임입니다.

이 게임에서 확실히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머스 쎌링이라는 경제학자죠. 그는 말합니다. “상대 운전자가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당신의 핸들을 뽑아 창밖으로 던져라.” 이쪽에서 죽음을 각오했다면 상대방은 살기 위해서라면 핸들을 꺾을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필승의 전략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게임이론입니다.

‘게임의 법칙’을 말하는 전략의 고수들은 항상 냉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남의 사정도 봐주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는다고 충고합니다. 전략의 고수들은 내가 잡아먹지 않으면, 반대로 잡아먹히고 만다는 ‘밀림의 법칙’을 신봉합니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어설픈 인간적 신뢰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죠. 게임이론의 수읽기에서 어설픈 믿음은 망하는 지름길이며, 냉정하고 처절한 응징과 이에 대한 평판이 나의 생존과 이득을 보장합니다.

이솝우화의 <사자와 농부> 이야기를 게임 이론적으로 분석해볼까요.

인간 아가씨를 사랑했던 수사자가 농부에게 찾아가 딸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의 이빨과 발톱에 딸이 상처 입을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고, 이에 사자는 이빨과 발톱을 모두 뽑았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를 몽둥이로 패서 쫓아 버렸다는 줄거리가 바로 <사자와 농부>의 이야기죠.

게임이론가인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의 저자는 이 우화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사자는 이빨을 뽑거나 안 뽑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고, 사자의 선택에 따라 농부도 각각 수락과 거절의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행동을 하기 전에 사자는 먼저 각각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봤어야 한다. 만약 사자가 이빨을 뽑지 않고 계속 위협하여 청혼을 하였다면 농부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딸을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서 상대가 정말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미리 예상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게임이론에서는 ‘백워드 인덕션(Backward Induction)’이라고 한다. 즉, 현재에서 미래의 순으로 생각해나가지 말고, 미래의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한 후 현재의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역순의 사고방법이다.”

게임 이론가들은 자신의 이빨과 발톱에 딸이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이빨과 발톱을 모두 뽑은 사자의 이타주의적 행동을 매우 비전략적인 행동이라고 분석합니다.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계속 으르렁거리면서 협박하라는 주문이죠. 이렇게 게임 이론은 매우 이기적인 인간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의 출발점입니다. 경제학의 시조라는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양조업자,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이익추구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자신의 이익은 물론 사회나 국가전체의 이익도 증대시킨다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죠. 그러나 게임 이론가들은 ‘이기적인 인간’을 넘어서 냉정한 인간을 요구합니다. 심지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화를 들어, ‘믿어라! 그러면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그 경고의 골자를 요약해볼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히데요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난공불락의 지형인 오사카성에 재화, 식량, 군대를 마련해 놓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서 도쿠가와 측의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식량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쿠가와는 히데요리에게 난공불락의 주요인이었던 해자(垓字)를 메우는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한다. 히데요리는 앞의 사자처럼 제안을 받아들였고, 도쿠가와는 다시 오사카 성으로 진격하여 해자가 없어 무력해진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를 죽인다.

상대방이 어떻게 수를 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즉 전략이 필요한 상황에서 믿음이라는 ‘인격적 선택’을 했을 때는 철저히 응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충고입니다.

경제학의 한 분야인 게임 이론을 전공한 박찬희, 한순구 교수는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일부러 나쁜 평판을 쌓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합니다. 이른바 ‘악명(惡名) 효과’가 그것이죠. 이 전략은 자신이 객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특히 써 볼만한 전략입니다. 불리한 상황일수록 상대에게 자신이 예측불허이며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필자는 이를 ‘또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책의 부제도 ‘또라이 게임이론’이다.)라는 인상을 주어야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 미국이 북한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도 북한이 ‘또라이’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북한은 예측불허의 행보를 보이는가 하면 여차하면 ‘너 죽고 나 죽자’며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합니다. 미국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실제 상황에서 상대가 악명 효과를 활용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스스로가 상대보다 더한 ‘막가파식’ 악당이 되면 됩니다. 문제는 둘 다 이판사판으로 맞서면 결국엔 한 명이 고개를 숙이거나 둘 다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죠. 패배를 불사하는 두 사람이 맞붙는 치킨 게임의 결과를 상상해보세요. 붉은 피만 낭자할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책의 저자들은 인간이 협동하는 이유는 배신의 경우에 따르는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보복 또는 복수를 아끼지 말고 마음껏 남발하는 것이 협동을 굳건히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보복을 하지 않으면 상대는 이를 나의 약점으로 알고 자주 배반하는 행위를 할 것이므로 결국 담합 또는 협동이 깨지게 된다는 거죠. 철저히 보복하라. 이것이 게임이론이 주는 교훈입니다.

이쯤 되면 게임이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오직 승부에만 집착하는 냉혹한 이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모든 관계가 인간적인 관계로 묶이는 것 또한 위험한 것일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착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애정’은 ‘상호 이익’이라는 기초 위에 더해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무턱대고 사람을 좋게만 믿고 행동하다가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마저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저자들은 경제학자답게 “적어도 사회현실을 분석하고 판단함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혹은 합리적 분석이 골격을 이루고 여기에 인간적․사회관계적 요소가 더해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 필자들의 신념이다.”라고 말합니다.

고속도로를 시공하는 중에 선사시대 유적지가 나타났다고 가정해볼까요. 아마도 공사장 현장감독은 십중팔구 공사강행을 요구하겠죠. 도로개통을 바라는 지역주민들도 절반 이상이 공사강행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자재 확보와 원활한 물류이동을 바라는 자본가들도 도로개통을 바라겠죠. 그러나 도로의 시공을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이나 자본가들은 경제적 이윤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도로의 강행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오직 이윤의 확보라는 차원에서의 합리성은 합리성에 대한 매우 협소한 해석일 뿐입니다. 효율성, 경제성, 수익성이라는 도구적 차원에서만 합리성을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생각입니다. 하버마스라면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들이 도로개통을 두고 서로 의견을 교환해서 가장 적절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으로서 ‘의사소통의 합리성’이 온전한 의미에서의 합리성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경제학이 말하는 합리성은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효율성과 같은 개념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협소하게 정의된 합리성은 자칫하면 공정해야할 게임에서 반칙을 유도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비롯된 멜라민 사태만 해도 그렇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다는 합리성의 개념에서 보자면 반칙을 써도 무방하다는 것이 비뚤어진 자본가들의 논리일지도 모릅니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무한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보다 큰 의미로서의 합리성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무엇이 진정한 합리성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사례 하나를 음미해보죠.

백신 개발자 소크(Jonas Edward Salk)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하자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특허를 양도해달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양에 특허를 신청할 수 없다.”라고 주위의 권유를 물리쳤습니다. 지구상에서 소아마비를 ‘박멸’시킨 것은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제약회사의 합리성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비전략적인 마음’. 바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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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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