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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2010.02.22 17:04
차일드 44
_ 톰 롭 스미스/노블마인,2009-05-20 00:00:00

작가의 첫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2008년 영국추리작가협회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 상을 받았다. 일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해외 부분도 1위다. 이런 화려한 수상경력 중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맨 부커 상 후보에 선정된 것이다. 분명하게 이 소설을 스릴러로 알고 있는데 후보에 올라간 것이다. 약간 의외였다. 하지만 모두 읽고 난 지금 이 선정에 고개를 끄덕인다. 한 편의 스릴러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촘촘하게 만들어낸 소련의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1933년 우크라이나 체르보이 마을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 시기는 실제 우크라이나가 엄청난 기근에 시달리던 때다. 초근목피로 삶을 이어가고 있던 중 한 여자가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밖으로 내몬다. 너무 사랑하지만 자신의 배고픔 때문에 고양이를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선택으로 고양이를 내좇는다. 그런데 이 모습을 한 소년 파벨이 본다. 엄마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말하고 고양이를 잡으러 간다. 동생 안드레이와 함께 고양이를 잡지만 그는 다른 어른에게 잡힌다. 동생이 형이 사라진 것을 두려워하며 엄마를 찾아간다. 형은 어디에도 없다. 배고픈 또 다른 사람에게 잡힌 모양이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간 후 현실로 나온다.

1953년 현실의 소비에트 연방은 참혹하다. 독재자 스탈린의 말은 곧 하늘이고, 반항은 죽음이다.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서방에 알리기 위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통계가 판친다. 당연히 살인사건은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눈싸움을 하던 형제 중 동생이 사라진 후 기찻길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아이는 주인공 레오의 부하 아들이다. 아버지는 살인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은연중에 드러난 레오의 위협에 아들의 죽음은 사고로 바뀐다. 이 사건이 묻히는 순간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스파이 협의로 감시 중이던 수의사가 도망친 것이다.

전쟁 영웅이었던 레오가 조금 방심한 그때 벌어진 일이다. 수의사 주변을 수사하던 중 단서 하나를 발견한다. 그를 몰아내고 그의 자리를 탐내던 부하 바실리는 다른 곳을 지목한다. 엇갈린다. 레오는 확신을 가지고 수의사를 뒤쫓고, 그를 잡는다. 수의사를 숨겨준 전쟁 동료는 바실리에게 즉결 처분된다. 섬뜩한 현실이다. 다행히 두 딸은 레오의 저지로 살아남는다. 수의사는 끌려가 고문당하고 약에 취해 고객들의 이름을 말한다. 이때 레오는 그가 무죄임을 안다. 하지만 현실은 국가 권력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죄가 없지만 잘못은 있을 수 없다. 이 사건을 통해 살벌하고 공포에 떨던 스탈린 시절의 삶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 자백 중 레오의 아내 라이사가 나온다. 위에서 이것을 조사하라고 한다. 그는 고민하다 아내의 무죄를 주장한다. 실수다. 평소 같으면 시베리아로 유배당할 것이지만 그때쯤 스탈린이 죽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지역 민병대로 좌천된다.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의 실체가 드러난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내가 권력의 두려움 때문에 결혼했고, 이제 그 사실에 그는 폭발한다. 이런 가족 해체 속에서 그와 아내는 숲 속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 시체의 모습이 부하의 아들이 죽은 모습이나 그 마을에 있었던 살인과 비슷하다. 이때 깨닫는다.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연쇄살인사건이 인정될 리가 없다. 이때부터 이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그와 아내의 협력과 노력이 펼쳐진다.

소련의 과거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유신시절이 생각난다. 안기부가 언제 구둣발로 집을 짓밟고 사람을 잡아갈 줄 몰랐다는 불안과 공포 시절 말이다. 독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펼치는 폭력과 압제는 불안과 공포를 먹고 자라는 모양이다. 그래도 한국이 민주주의의 탈을 쓴 상태에서 살인과 고문이 자행되면서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은 반면에 철의 장막 속에선 한계조차 없다. 의심은 확정이고, 확정은 곧 죽음이다. 즉결처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어나고, 감시의 눈길은 아버지와 아들, 형제 사이에도 없다. 조그마한 농담 한 마디로도 충분히 죽을 수 있다.

드러난 현실은 만들어진 이미지로 포장되고, 그 밑에 숨겨진 현실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하다. 너무나도 분명한 연쇄살인사건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것을 조사한다는 것은 곧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이 말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의미다. 소설 후반부는 살인자를 찾으려는 레오의 노력과 독재정치가 깨어지는 틈새를 보여준다. 그리고 레오가 생각한 인민의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고, 멀어졌던 아내와의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스릴러 같이 악당과 경찰이 만들어내는 쫓고 쫓기는 대결이 이 작품의 매력은 아니다. 공포에 짓눌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현실과 공포와 불안이 살인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력이다. 한 인물이 변해가고, 깨닫고, 인정하는 그 과정이 매력이다. 나의 과장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주인공 이름이 레오인 것이 영화 <매트릭스> 속 레오와 같이 현실을 깨닫고 싸우는 존재의 오마쥬인지도 모르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있다니 어떨지 기대된다.

- written by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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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감옥에 산다는 이야기를 사회학자가 했다면 편하게 이해하련만 한 건축학자의 이야기이다. 아니 저자는 명확히 감옥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느낌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팬옵티콘(pan - optincon : 넓은 것을 한눈에 보기)는 근대에 와서 감옥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즉결심판이 주류였으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교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면서 대규모 수용시설이 필요하였다. 최소한의 간수들이 최대의 죄수를 가두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감시의 효율성이 강조되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알려진 벤담의 공리주의는 가장 합리적인 즉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최초의 팬옵티콘 건축은 동물원이다. 제국주의로 세계 식민지를 개척한 프랑스는 각 대륙의 동물(원주민 포함)을 구역을 나우어 배치한 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오만을 즐겼다. 가운데 첨탑이 있고, 주변을 두르는 방식으로 이동하지 않고,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권력의 비대칭성이 건축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눈요기거리인 원주민들은 같힌 공간에서 발가벗힌채 구경거리로 전락되었다.

 

어두운 첨탑과 주변을 두른 죄수실 모양을 갖춘 판옵티콘 교도소는 드러내놓고 권력의 위치를 실감시키는 것이지만, 감시의 효율성은 근대 집합건물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위인으로 알려진 나이팅게일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야전병원을 효율적으로 개선한 것이다. 방마다 있던 치료실을 긴 침상으로 연결해놓고 가운데에 간호사의 동선을 배치해 효율성을 극대화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와 학교의 기본구조는 동일하다. 청주여자교도소와 중정형 아파트는 모양이 유사하다. 감시는 효율성에 맞닿아있다.

 

대형 집합건물이 아닌 상업적인 곳에서 작용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욕망이다. 테헤란로에 즐비한 재벌 사옥들을 보면 1층은 비어있다. 비싼 땅의 1층을 비어놓고 수 억원 대의 미술품 하나나 둘 정도를 두는 것은 그 자체로 재벌이 가진 경제력을 외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은행이나 편의점을 두어 받을 수 있는 임대료 대신에 경제적 힘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유럽에서 백화점은 원래 중산층의 소비를 따라가고자 하는 하층 중산층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되었지만, 근대화로 인해 외부에서 이식된 우리는 백화점은 중, 상류층의 소비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유럽의 상류층은 출입구에서 문지기를 통해야 갈 수 있는 곳을 이용했다. 최근 빈부격차가 강화되면서 명품관이 이런 형태를 답습하고, 최고의 명품 소비는 과거 유럽 상류층의 형태를 쫓아간다.

 

하나의 건축물에서 벗어나 도시로 본다면 어떨까? 프랑스의 개선문을 중심으로 사통팔달형 도로를 뚫어 방사형 도시구조를 가진 것은 프랑스혁명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집권한 나폴레옹 3세는 바리케이트를 무력화 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신속한 진압을 위해 도로를 방사형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요즘은 격자형으로 도시 설계를 많이 한다. 격자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의미상으로 다른 것은 동양의 도시 형태이다. 동양의 도시는 정(井)전제라는 농촌 세제의 형태를 그대로 취한다. 주변의 8방을 외부에 두고 가운데 황제가 기거하는 형태이다. 최근 북경의 지하철을 2050년까지 이런 모양으로 만든다고 하니, 아직도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건축에도 그대로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서울은 어떨까? 정(井)모양을 근간으로 하되, 그 질서가 있다. 전조 후시 좌종 우사이다. (앞에는 조정을 두고 뒤에는 시장을 둔다. 오른쪽에는 사직을 두고, 왼쪽에는 종묘를 둔다.) 경복궁에서 서 보면 과연 그렇다. 다만 정도선이 처음 수도를 열때 풍수지리의 여향을 받아 배산임수 즉 산을 뒤로 하여 시장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시스템은 궁의 형태에서도 그대로 제현된다. 전조 후침 좌동 우모 (근정전의 앞은 대신들이 서있고, 뒤에는 침실을 두며, 오른쪽은 어머님의 처소를 두며, 왼쪽은 동궁의 처소를 둔다). 다시 침실로 들어가도 그대로 적용된다. 네 명의 상궁들이 임금의 침실을 두르며 잠자지를 살핀다.

건출물과 도시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예술보다는 권력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 하나의 집은 개별적으로 지었을 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조형은 가장 효율적인 관리라는 방식을 취한다. 동양에서 권력의 정점인 임금을 중시으로 사방 팔방을 두르는 방식은 유럽의 집합건물의 판옵티콘에 맞닿아 있다. 건축은 그런 권력의 비대칭성에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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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8일 르네(www.renai21.net)의 금요강좌 <도시를 말하다> 첫번째 저자 강연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의 서윤영의 강의가 있었다. 건축을 생각할 때 기술로 바라보던 시각이 교정될 수 있었다. 혹자들이 건축을 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보기도 하고, 건축에서도 행태 즉 사람들과 환경을 고려한 분야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건축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서윤영 (궁리, 2009년)
상세보기

 

Q / A  

 

영국 박람회때 수정궁을 설계한 것은 원예사라고 했는데, 건축가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당시에는 대부분 목재로 틀을 잡는 건축을 했습니다. 또 박람회까지 시간이 없었죠. 그런데 원예사들은 화원이나 온실을 만들 때 유리와 철골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이 기술은 최첨단이었죠. 그래서 빠른 시간과 유리와 철골을 이용한 수정궁의 설계를 원예사인 사람이 설계를 맡게 되었씁니다.

 

 판 옵티콘이 적용돼었다고 해서 과연 감시와 피감시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나이팅 게일의 병원 시스템은 환자들에게는 오히려 득이 아닌가? 청주여자교도소의 경우도 감시탑이 사실상 낮아 오히려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A 감시라는 것은 하나의 표현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건물주나 건물을 지으려는 사람의 권력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감시는 한편으로는 효율성으로 볼 수 도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소비형태가 서재가 생기고, 넓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가족내의 여성의 위상 강화를 보면 남성만의 공간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요?

 

A 과거에는 건축물 자체가 영업과 사업의 공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갈 수록 업무는 외부에서 하고, 집은 사적 공간으로 나뉩니다. 따러서 외부와는 차단된 자기만의 공간화 됩니다. 침실이 여성의 전용공간화되어 갈 수록 남자의 전용공간의 대한 욕구도 강화됩니다. 서재는 꼭 남자만의 공간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공과 사적 공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구요. 남녀간의 성적 견제로 보기는 힘든 점이 있씁니다.

 

건축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요?

 

A 건축에서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은 우선순위에서 뒤집니다. 기능과 구조, 심미 세 요소 가운데 기능과 구조가 더 중심적입니다. 심미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뛰어난 건축물을 근거로 건축의 심미만을 강조하기는 힘듭니다.

 

강사가 예쁘다고 좋은 강의일 수 있는가요? 결국 강의 내용과 태도 등이 중요한 것 처럼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들어, 박물관 같은 경우 뛰어난 외형미를 갖추는 데, 그런 경우에는 외관 자체가 하나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경우도 건축물의 미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의 목적 자체에서 외관의 아름다움을 함께 해야 합니다.

 

건축과 도시, 건축과 인문에 대한 풍부한 느낌을 준 2시간 반의 강의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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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09.08.12 17:08

  작가는 이 작품을 실제 있었던 여러 사건을 종합해서 썼는데, 그 중에서 광주 인화학교 사태를 가장 큰 모티브로 잡아서 썼다고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무진 시는 항상 안개에 싸여있는 소도시이다. 강인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교직에 있었지만 의류업을 하다가 실패했다. 그는 아내와 딸을 서울에 둔 채 혼자 무진 시로 내려간다. 그의 아내가 어렵사리 친구를 통해 청각장애인 특수학교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 자리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수학교 교사 자격증이 없었지만 아내에게 등이 떠밀리듯이 무진으로 갔다.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애학원의 분위기는 이름과는 달리 뭔가 수상쩍은 일들이 많았다. 강인호는 동료 교사에게 학교에 대해 물어보지만 어떤 힌트도 얻을 수 없어 갑갑해한다. 그에게 무진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무진에는 대학교 선배인 서유진이 있었다. 그녀는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무진 인권운동센터 상근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 만나서 학창시절의 추억을 더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인호는 우연히 교사들이 장애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성폭행을 일삼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그는 인권운동 센터의 서유진과 만나면서 점차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의 비리를 파헤치기로 한다. 그렇지만 무진이라는 소도시의 권력기관들은 서로 칡뿌리 같이 함께 얽혀있어서 손대기가 힘들었다. 경찰, 교육청, 의사, 지역 교회 신도들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돌리는 부품처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은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키거나 건드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라고 부조리라든가 악의 실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서로 한 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건드리면 자신도 결국 피해를 보기 때문에 철저히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악과 선, 진실과 거짓말, 기득권 계층과 소외 계층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무진이라는 곳은 가상의 장소이지만 실제 우리 사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힘없는 소외계층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순간적인 연민을 느낄 뿐 어떻게 행동할지를 모른다.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서 국가적인 시스템이 작동되어야만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개인의 관심 또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작가는 CBS < 김현정의 뉴스쇼 >의   대담에서 “한 국가가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국가의 어떤 품위라든가 격이 좀 결정된다고 생각해서, 제가 그런 가장 약한 사람들의 인권을 짓밟은 어떤 사태를 좀 쓰고자 시작을 한 거죠.” 라고 했다. 이런 말에서 충분히 작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신 앞에 사람은 평등하겠지만, 인간이 만든 법 앞에서는 평등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의 인물을 통해서도 느꼈지만, 사람의 가치는 다 다른 것 같다. 인권이 그 사람이 가진 힘에 비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힘 있는 자에게는 인권이 있고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힘없는 자는 너무나 쉽게 인권이 유린되고 또 유린된 인권을 찾을 수 있는 권리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통해 날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런 날것들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미 너무 많이 봐와서 어떤 면에서는 아주 무디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작품에서 보여준 실상은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책의 뒷장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정나미가 떨어지는 그만큼 인간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성선설을 믿었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성악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시커멓게 물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적처럼 천사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천사는 날개가 없는 우리들의 이웃의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천사들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그저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각 개인이 소외된 이웃에 대해 작은 관심만 가져도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서유진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 written by 오리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_ 공지영 (지은이) /창비(창작과비평사),200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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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추천도서2009.06.12 14:53

올해 7월 말에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했던 사건 중의 하나가 국방부 '불온서적' 선정 사건이다. TV 프로에서 추천한 도서, 베스트 셀러, 그리고 세계에서 알아주는 석학이 쓴 도서 등 나름대로 공신력 있는 책들이 선정되어 국민들의 비난과 진중권, 우석훈 같은 진보계열 논객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선정 도서 중에 '삼성 왕국의 게릴라들-삼성의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운 사람들 이야기'(프레시안 북) 이 있다는 사실도 여러 사람의 조롱 거리가 되었는데 '무슨 한 기업을 비판하는 게' 싶다가도 '하긴 삼성이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이란..' 이런 생각이 들어 한 숨을 쉰 적 있었다.

대한민국에는 삼성이라는 성역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정태인 교수가 강연 중에 삼성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한 기억이 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도 97년 외환 위기 속에서 많은 기업들이 도산되는 과정에서 살아남아 경쟁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그 즈음 있었던 이재용 전무의 변칙 상속을 위해 전직 법관, 고위 공무원들을 스카우트 한 게 '삼성왕국'을 건설하게 된 배경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은 하나의 돌연변이 국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국가 정책 기조를 삼성 경제 연구소에서 나오는 보고서를 토대로 펴며 전 대통령은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라며 백기를 들었다. 외환 위기 이후 트라우마에 걸린 국민들은 삼성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 '삼성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무너진다' 라는 논리로 삼성의 대리인이 되기를 주저 않는다. 그리고 언론에서 삼성에 부정적인 기사를 쓴다면 로비를 이용해 그 기사가 실리지 않게 하거나 축소해서 내보내게 한다.(김성환 위원장이 자신들이 싸운 뒤 '한겨레','경향신문' 의 전면광고를 보고 성과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 책에 소개된 게릴라들은 모두 한 마음이다. '우리는 삼성이 망하길 원해서 이러지 않는다. 이씨 일가가 삼성을 편법으로 소유하는 걸 없애야 삼성이 진정한 발전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은 하나의 기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기업이 되었다. 과장을 조금 붙인다면 대한민국의 숙주가 되었다고 해도 부정을 못할 텐데 이런 기업이 정도를 걷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는 너무나도 명백해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첫 번째 김용철 변호사와 마지막 순서에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이 있다는 것이다. 삼성의 내부에서 외부로 다시 내부로 돌아오는 수미상관 같기도 한데, 김성환 위원장의 인터뷰에서도 나와있듯이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구조조정본부(상위층)에서 자신은 현장(하위층)에서 있었지만 동지의식을 느꼈다고 하니 삼성의 내부에서 나와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이였는지 짐작할 만 하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삼성문제가 공론화 되지 않고 있는데 글쎄 내가 너무 어긋나게 사고하는 지 모르겠지만 저 내부에서 무슨 칼을 갈고 있을지 걱정이 된다. 제 2의 김용철, 김성환 같은 이들이 나와 줘야 삼성이 좀 더 깨끗해 질 거 같은데 과연 내 바램이 헛된 것인지 허무해 지기도 하고...

- written by 베쓰볼키드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프레시안 특별취재팀 (프레시안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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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시선은 권력이다ㅣ
박정자지음ㅣ기파랑(2008년 1월)

- 김보일




확실히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입니다. TV의 광고는 현란하기 그지없고, 인터넷에는 동영상과 그림 파일들이 넘쳐납니다. 거리의 쇼윈도를 가득 장식하고 있는 것들, 영화, 디자인과 건축 등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은 대체로 시각적인 것들입니다. 음악을 듣는 MP3 재생기의 조그만 액정 화면으로도 동영상을 감상하고, 움직이는 차량에서도 TV 겸용 네비게이션 액정화면으로 스포츠 게임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자율학습 시간에 PMP로 동영상 강좌를 듣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확실히 현대를 ‘눈이 호사를 누리는 시대’라고 정의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눈이 무엇인가를 본다는 시각적 경험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경험이 아닙니다. 똑같은 대상을 보여주고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이 각양각색이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대상을 보는 사람의 취미와 성향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나무 한 그루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식물분류학자는 그 나무만이 가지는 독특한 결과 무늬에 주목하여 나무를 볼 것이고, 기술자는 그 쓰임새에 주목하여 나무를 볼 테지요. 화가는 나무가 가지는 순수한 형상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겠지요. 이렇게 동일한 시각적 대상을 보여주더라도 시각적 경험은 보는 사람에 따라 판이할 수가 있습니다.

시각적 경험은 시대에 따라 변해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각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던 신화의 시대에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는 방식과 생명이 유전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의 시대에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는 방식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현상이라고.

박정자의 『시선은 권력이다』는 시대에 따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탐구한 책입니다.

저자는 시선은 하나의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볼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십시오. 최고의 권력자들만 볼 수 있는 일급정보도 있고, 모든 국민들이 열람해볼 수 있는 정보도 있을 테지요. 우리는 대체로 일등병에게는 일등병이 알아야 할 정보가 있고, 사단장에게는 사단장으로서 알아야할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따라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볼 수 없는데, 너는 볼 수 있다,라는 사실에 매우 불공평하게 생각도 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 시대에 권력은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습니다. 권력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기도 했고,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훼손시키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중세의 권력은 자신의 존재를 아주 떠들썩하게 과시했지요. 그러나 근대의 권력은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냅니다.


시선의 관점에서 권력의 작동방식을 탐구한 이는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셀 푸코입니다. 푸코는 고대 희랍 이래 서양 문명은 ‘다수가 한 사람을 보는 사회’였다고 말합니다. 사열식에서 수만 명의 병사가 왕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공개로 진행되는 신체형은 어떨까요. 이 역시 다수(군중)가 한 사람(권력자)의 권력의 행사방식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근대에 오면 상황이 역전이 됩니다.(이를 저자는 ‘가시성의 역전’이라고 표현합니다.) ‘한 사람이 만인을 보는 것’, 이것이 근대 이후의 권력 행사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만인은 한 사람을 볼 수 없지만, 한 사람은 만인을 볼 수 있는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이 근대의 권력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입니다. 판옵티콘은 간수 한 사람이 죄수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원형감옥으로, 벤담이 1791년에 설계했다고 합니다. 중앙 감시탑에 있는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죄수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판옵티콘의 중앙 감시탑에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죄수들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감시자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죄수들은 감옥 내에서 불법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판옵티콘의 구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보는데 나는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입니다.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은 또 다른 효과를 야기합니다. 감시자가 없어도 죄수들이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것을 푸코는 감시하는 ‘시선의 내면화’라고 말합니다. 감시의 시선의 내면화되면 감시자는 중앙탑의 감시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거지요.

감시당하는 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면 감시의 비용은 훨씬 줄어들겠지요. 그러나 감시의 효과는 정점에 달할 것입니다. 근대의 권력은 이렇게 효율적이고 세련된 방식입니다. 제레미 벤담은 이 판옵티콘의 원리가 적용되면 도덕이 개혁되고, 건강이 보존되며, 산업이 활성화되며, 대중의 부담이 덜어지고, 경제가 반석에 오른다는 공리주의자다운 발언을 한 바도 있습니다.

감시의 내면화가 일어나는 사례를 더 열거해볼까요. 우리는 국기에 대해 경례를 소홀히 했을 때, 혹시 나는 애국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 TV를 보지 않는데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두고 겨루는 게임을 두고는 망설이게 됩니다. 결승전만은 봐줘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주민들은 김일성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깔고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죄의식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죄의식을 누가 심어놓았을까요. 푸코의 답은 바로 ‘권력’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권력은 총과 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아라, 교복을 단정하게 입어라, 자주 손을 씻어라, 좌측으로 통행하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국기에 대해 경계하라 등등, 스스로 감시를 내면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규율을 우리에게 가르침으로써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근대의 권력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공포를 주지 않으면서 인간의 몸을 통제할 방법을 찾습니다. 신체를 복종시키는 기술, 그것이 바로 규율입니다. 규율은 어떤 행동과 실천을 강요하는 지령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이를 ‘규율 권력’이리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규율을 가르치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학교와 군대입니다. 학교와 군대처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간섭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18세기에 확립된 군대행진의 규정에는 “좁은 걸음의 보폭에는 1피트 되는 것과, 보통걸음, 속보, 한쪽 발뒤꿈치에서 다른 쪽 발뒤꿈치 사이의 간격을 2피트로 하는 것 등이 있다. 또한 속도는 좁은 걸음과 보통 걸음일 경우 한 걸음에 1초로 하고 속보에서는 그 사이에 두 걸음을 걷는 것으로 하며, 행군보조의 속도는 한 걸음 당 1초를 약간 넘도록 한다.”라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또 ‘세워총’은 6박자, ‘옆에총’은 4박자, ‘거꾸로메어총’은 13박자 등으로 신체의 동작을 세밀화시켜 놓았다더군요. 왜 이토록 복잡한 규정을 두었을까요. 왜 몸짓과 동작의 정확도를 시간단위로 통제하려 했던 것일까요. 바로 인체의 미세한 분할동작들은 신체운동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일한 시간에 유용한 노동력을 좀 더 많이 끌어내려는 위한 것이었죠.

학교에서는 귀밑머리를 3 센티로 깎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기상 시간이 6시입니다. 푸코에 의하면 귀밑머리를 3센티로 깎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감옥의 기상시간이 굳이 6시가 되어야만 한다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규율을 만든 것일까요. 다만 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규율을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시선은 권력이다』의 저자는 말합니다. “미세한 규칙들은 권력이 스며들어가는 모세혈관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근대의 규율권력이다.”라고.


오늘날의 전자 감시 체제는 판옵티콘을 발명한 벤담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 TV는 우리를 24시간 감시합니다. 2006년 한 신문은 강남의 삼성동에서 명동까지 출근하는 직장인의 경우, 폐쇄회로 TV에 평균 39번 찍힌다는 보고를 한 바 있죠. 폐쇄회로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피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감시의 시선 속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무심코 주고받은 e-메일의 내용, 휴대폰의 통화 내역과, 은행거래 내역, 카드 결재 내역도 언젠가 나를 옭아맬 수 있다. 신용카드 기능이 있는 회사의 ID카드는 사원들을 감시하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상사들은 사원들이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지, 신문 판매대에서 책이나 잡지를 사는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하는지, 회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원의 음식취향과 독서취향까지도 훤히 알 수 있게 되죠. ID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기만 해도 상사들은 맘만 먹으면 사원들이 일을 하는지, 화장실에 갔는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원들이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ID 카드가 중앙의 컨트롤 타워에 연결돼 있어 사원의 움직임을 중앙의 컴퓨터가 인식하기 때문이죠.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면 운영자의 컴퓨터는 구매자의 독서취향을 분석하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음반을 사면 운영자의 컴퓨터는 구매자의 음악취향을 즉시 분석합니다. 인터넷의 시대, 클릭 하나로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채팅을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시대라고 하지만 실은 전방위에서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며 살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들은 기업의 멤버십 카드 혜택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상 정보를 제공하죠. 강제가 아니라 협력으로 이뤄지는 통제의 네트워크가 바로 현대사회의 특징이니까요.

저자는 ‘가시성의 역전 현상’이란 개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푸코의 시대에는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곧 가시성이 권력이었다면 요즘에는 ‘바라봄’과 ‘바라보여짐’이 서로 거부감 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대 위 혹은 TV 화면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사람이 권력이고, 무대 밑 혹은 TV 옆에서 시선을 보내는 다수는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는 사람, 다수에게 바라보여지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다.”라고. 푸코의 권력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저자는 현대사회는 감시사회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정신분열적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감시의 권력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 전자시대에 개인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권력도 감시를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타인의 시선 앞에 내 알몸을 송두리째 맡기는 것이나 내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나 내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프라이버시는 내 존엄성의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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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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