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베스트서평2010.05.04 10:17

너는 모른다
_ 정이현 (지은이) /문학동네,2009-12-08 00:00:00

<달콤한 나의 도시>의 저자 정이현이라는 명성에 기대어 <너는 모른다>(문학동네)를 선택하지 않았다. 독서를 선택한 데에는 장르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소통하지 못하는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의 전말이 궁금했고, 이로 인해 생기는 그들 사이의 또 다른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감정의 파장이 그려내는 새로운 그림이 보고팠다. 요컨대 탈 연애소설을 썼다는 혹은 한국 칙릿 소설계에 깊이를 더해준 정이현 작가의 건조하지만 말랑말랑한 문체가 가족극의 형식을 빌린 사회파미스터리 안에서 그 모습을 어떻게 달리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너는 모른다>는 우리의 적당한 기대를 가뿐히 무시해버린다. 무척이나 도전적으로 정이현은 장르의 ‘탈(脫)’을 시도했다. 외피는 동시대 가족의 단상을 날카롭게 세운 펜촉으로 그린 추리 소설이지만 무게중심을 조금만 어느 한쪽으로 옮기기만 해도 이야기는 전혀 다른 맨살을 보여주고 있다.


<너는 모른다>는 두 가지 관점으로 동시에 접근해야만 그나마 작가가 무심하게 심어 놓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가지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것이 클리셰적인 장르적 쾌감과 완성도 사이에서 나름의 재미의 기준점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성공적인 말 걸기가 됐는지는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다. 다만 이것이 소설 읽는 내내 작가의 진심이고 성장의 고통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장르를 비껴가다.

모든 것에 충만한 생명감이 충전되고 있는 5월, 알몸으로 발견된 남성의 익사체. 소설의 인트로는 시간이 늦장을 부리는 시기인 5월의 한 일요일을 묘사하는데서 출반한다. 하품 나올 정도로 따뜻하고 무료한 일요일의 풍경 안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시체는 까슬거리는 돌기의 혓바늘처럼 글 속에서 이질적인 위화감을 드러낸다.


- 표류사체의 성별은 남성이었다. 남자는 전신 알몸 상태였다. 물에서 발견된 사체가 대게 그렇듯 시반은 보이지 않았고 시신의 외피는 한껏 팽대해져 있었다. 체내 황화수소와 삼투압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시랍화가 진행된 피부는 회백색으로 변했고 비누칠을 한 것처럼 미끌미끌했다. 손바닥과  발바닥은 비 맞은 습자지처럼 쪼글쪼글했으며, 코와 입에서는 붉은 혈성액이 침처럼 연신 흘러나왔다. 사내가 오랫동안 물 밑을 떠돌았음을 알려주는 여러 정황증거들이었다. 눈을 꼭 감고 있어서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p.9


불친절한 인트로에서 정이현의 변화가 단면적으로 보인다. 그는 무심한 눈길 같은 문장으로 써내려가고 있지만 읽는 이는 계속해서 그 사신을 흘깃흘깃 훔쳐본다. 이것은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과는 확연히 다른 색깔의 ‘호기심’의 뿌리일 것이다. 사실 단숨에 사건의 한 가운데(시체의 발견)로 독자를 이끄는 이 같은 방법은 미스터리 소설에서 곧잘 만날 볼 수 있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도입부분이다.


다음 장에서는 가족이지만 가족이라 호명할 수 없는 김상호 가족을 등장시켜 익사체로 발견된 남성과 이 가족이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그의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각자 비밀을 간직한 김상호를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에 대한 묘사는 느슨하다. 결코 가까이 다가서서 그들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 그의 문장은 한 옥타브씩 사건의 전말을 높여가는 미스터리 서술 방식을 비껴나간다. 이로 말미암아 첫 장부터 강렬한 파열음을 내면서 등장한 익사체와 김상호 가족의 연결고리를 찾으려하는 독자들의 맹렬한 의지를 풀죽게 만든다. 장르 소설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긴장감은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려는 정이현의 서술방식은 확실히 일반적인 장르 소설의 방식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편적으로 연결된 사건이 종국에 와서는 하나의 커다란 그림의 퍼즐이 되는 방식도 그는 취하지 않고 있다. <너는 모른다>의 사건 진행방식은 차라리 국어낭독처럼 지분지분 진행된다.


막내딸 유지가 실종되는 2월 24일 일요일, 아빠 김상호, 유지의 친엄마이자 은성과 혜성의 새엄마인 진옥영은 서로의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집을 비운다. 의대생인 혜성 역시도 마찬가지다. 혜성은 오후 2시까지 들어오겠다는 말을 했으면서도 저녁나절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누이 은성은 2층 구조인 그 고급빌라에서 아예 살고 있지도 않다. 가족이기에 같이 살지만 철저하게 분리된 각자의 공간에서 숨어서 아슬아슬하게 가족으로 연결된 이 가족의 하루 동안의 외출은 막내딸 유지의 실종과 어떤 연관성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나열된다. 유지의 실종과 관련해 이 가족의 외출에는 작가가 적어놓지 않은 트릭이 숨어있지 않을까 찾아보지만 문영광의 등장으로 그런 의심조차 점차 시들해진다.


유지를 찾기 위해 김상호가 고용한 사건해결사 문영광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라면 탐정의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이현은 문영광을 통해 유지의 실종과는 즉물적인 관계가 없는 이 가족 개개인의 비밀을 풀어내는데, 정확히 말해 읽는 이가 짐작하는데 할애한다.


유지의 실종이라는 꼭짓점으로 모아지지 않는 가족의 비밀들. 이야기는 점차 각자 원문이 따로 있는 파편들로 흩어진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 장르의 속성을 배반하는 처사다. 다분히 고의적인 작가의 장르 비껴나기는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를 흐릿하게 하면서 등장인물 개개인의 역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 흐릿한 연결선을 따라 유지의 부재가 드러낸 ‘가족’을 더듬더듬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만 남는다. 여기서 가족에게는 없는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 유지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소설에서 유지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여기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정이현은 숨고 싶은 순간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상상을 하는 유지의 심리 묘사로 이 가족의 불협화음을 들려준다. 유지의 실종으로 소리를 낼 기회를 잃은 바이올린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사실 유지의 부재는 장르의 속성을 역이용한 작가의 맥거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안에서 진실은 인물들의 관계를 연결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진심은 이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흐릿해지는 관계 속에서 도드라지는 ‘가족’


추리 소설이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 <너는 모른다>는 관계의 이야기다. 통속적인 가족드라마의 해체와 조립,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일지 모른다.

화교 진옥영은 김상호의 아내이면서도 내연의 남자 밍을 곁에 둠으로써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려 한다. 혜성은 새엄마에 대한 거부감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정을 맺은 동료 또는 방패막으로 인정하고 있다. 은성은 혜성과 달리 핏줄로 연결된 유지를 무시하면서까지 가족이길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픈 퇴행적인 애정관으로 존재감을 부여받으려한다. 선명하게 절단선이 그려져 있는 이 가족 안에서 유지는 포기를 습득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인지하고 흐릿하게 연결돼 있는 가족의 연결선을 집중해서 독해를 하다보면 유지의 실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유지의 부재는 그들이 증명해주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픈 '외출'에 가까울 것이다.

유지의 실종으로 김상호를 비롯한 가족들은 극도의 불안과 상실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심리적 압박감은 딸이, 여동생이 사라진데서 오는 걱정과 절망이 뒤섞인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그런 고결한 감정이 아니다. 적어도 유지의 실종을 처음으로 인지한 순간에는 말이다. 김상호와 진옥영, 혜성과 은성은 보면서도 알면서도 못 본체한 서로의 비밀이 까발려질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냉정한 가족의 이면을 정이현은 무심한 듯 차례차례 적어 내린다. 장르에 천착하지 않고 읽어 내려가니 장르의 특성인 잔혹함이 드러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분명 읽는 이의 의표를 찌르는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면서도 정이현은 그 이면 깊숙이 흐릿하게 연결된 가족의 점멸선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점멸선을 굵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주는 인물이 바로 문영광과 밍일 것이다. 사실 정이현의 덤덤한 문체 속에서 김상호의 가족은 더 이상 자력으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없음을 고하고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일 수 없는 문명광과 밍은 이 가족의 언저리에서 그들이 가족일 수밖에 없는 사실들을 일깨워준다.


김상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선택한 자신의 직업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 이 가족의 가시적인 공중부양을 선언하는 일임을 알기에 협조자로서 문명광을 필요로 한다. 은성에게 문영광은 유지의 실종을 빌미삼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로해주는 존재로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처럼 김상호의 가족에게 문영광은, 유지의 실종을 해결해줌으로써 서로의 비밀이 탄로 나지 않고도 허울뿐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안심시키는 안정제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속성을 의식적으로 피해가는 작가는 문영광에게 그들의 비밀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역할은 줬어도 이들을 단단히 묶이게 하는 고리로의 역할은 주지 않았다. 대신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는 밍을 통해 다른 방향을 보면 살던 김상호의 가족에게 유지라는 꼭짓점을 제시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영광과 밍을 작가가 각각 어떤 무게감으로 그리고 있는 가다. 가족의 비밀을 알 리 없는 독자 입장에서도 김상호의 가족처럼 문영광은 독자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밖에는 존재다. 그러나 그의 퇴장은 초반의 묵직한 존재감에 비하면 턱없이 단출하다. 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극 안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장르의 속성을 비껴나가는 작가의 의도이면서 인위적인 것으로 연결될 수 없는 가족의 고유성을 증명하고픈 작가의 순수한 의지다.


작가는 한 번도 온전한 아버지로의 김상호를 그리고 있지 않다. '아버지'로 불리거나 불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이들은 '가족의 탄생'을 위한 밑바탕의 재료로만 기능하고 있다. 만약 소설이 여기서 끝났다면 이것은 냉소적인 현대 사회의 가족상을 그리는, 우리가 익히 봐왔던 그저 그런 통속적인 가족소설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정이현은 아버지가 부재한 김상호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그제야 온전한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김상호 가족에게서 모습을 감춘 밍도 마찬가지다. 밍은 진옥영과의 관계에서보다 서로 대면조차 하지 않은 김상호와의 관계 속에서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알몸으로 발견된 익사체의 남성이 밍이라고 독자가 짐작하더라도 그의 실종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김상호의 위치를 선명하게 해줄 뿐이다.


<너는 모른다>가 새로운 가족소설, 장르소설의 전범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장르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문체로 클리셰적인 인물 역할을 분해하고 가족을 해체한 정이현은 소녀의 실종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전혀 새로운 가족드라마를 완성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절단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사회적인 소수 단위의 영원성을 장르의 통석성을 이용해 역설적으로 풀어낸 새로운 접근방식에 새삼 글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했음을 부정도 못 하겠다.



- written by 빨강머리앤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10.03.12 14:38
너는 모른다
_ 정이현 (지은이) /문학동네,2009-12-08 00:00:00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가족을 원한 적이 없다. 어느 날 문득 세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세상에 나를 내놓은 부모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내 팔다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내 의지와는 별도로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겨났다. 그 뿐만 아니다. 꼭 닮은 유전자와는 별도로 전혀 닮지 않은 성격이나 취향을 보유한 넷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그 후로도 쭉 아니, 죽을 때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될 것이다. 포기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관계, 가족. 그건 누구도 동의나 항의같은 걸 할 수 없는 성질의 암묵적 규칙 같은 것이었다. 좀 다른 형태의 가족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내가 알기로 세상의 모든 가족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범위 내에서 형성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물은 아담 뿐이었다.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브가 창조되기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을 반반씩 닮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전까지는. 시작이 그러하다보니 인간은 특히 비밀스러운 순간일 수록 늘 혼자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어떤 관계로 규정하든지 간에 그건 세상을 정의하고 싶은 부류의 건방진 착각이다. 가족이라서 더 아는 것도 없고, 애인이라서 더 아는 것도 없다. 그게 누구든 어떤 관계에 있든 타인이 아는 건 고작 당사자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 누가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있으리란 기대는. 유지네 가족은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지만 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유지의 실종 후 기다렸다는 듯 끔찍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서로 아무 것도 모른다. 유지의 사라짐 후 뒤늦게 서로를 파헤쳐보지만 이제 그들은 드러내기보다 감추기에 더 급급하다. 진실을 캐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3자다. 문득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현기증을 느낀다. 내가 사라지면 내 가족은 과연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만약 내 가족 중 하나가 사라지면 과연 나는 허둥대지 않고 단번에 찾을 수 있을까?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역시 자신이 없다. 


가족이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다른 종류와 다른 점이라면 아마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오래도록 가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있는 것이란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는 원동력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사실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다 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가 가족이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에 서울의 한 강바닥에서 떠오른 남자 시체도 아니고, 가족들이 모두 제 인생을 사는 동안 잠시 밀려났던 유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다. 아버지 김상호가 양심을 팔아 돈을 산 것도, 은성이 남자에게 버림 받을 때마다 자해소동을 벌이는 것도, 혜성이 의대에 다니는 척 하면서 매번 용돈을 타가는 것도, 새엄마 진옥영이 친정에 간다고 해놓고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도 엄연히 말하면 문제는 아니다. 그건 그냥 서로를 안식처로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장한 어느 가족 구성원들의 숨겨져야 할 진실일 뿐이다. 그 사실은 마치 유지가 김상호의 딸이든 밍의 딸이든 진옥영의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에는 변함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지네 가족의 문제는 방문만 열면 알 수 있는 것들 또한 모르고 지나쳤다는 데서 기인한다. 서로를 좀 더 믿을 수 있었다면 그들의 고통은 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족간의 소통부재는 곧 사회의 소통부재가 된다. 가족은 작은 사회집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의 대부분의 문제해결은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회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게 핏줄로 얽혔든 지연으로 얽혔든 간에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는 개인의 만족감은 평균 기대치를 훨씬 웃돈다. 한 번 생각해보자.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개체로서 힘든 일이 생긴 순간,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위로와 사랑의 힘을.   


나는 섣불리 유지네 가족을 비판하거나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저 우리라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에서부터 안까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세세히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알든 모르든 가족이라는 존재는 신의 질투에 의해 그렇게 간단하게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뿐이다.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향수의 향이 그렇고 기억의 조각이 그런 것처럼, 연락하지 않는 것과 연락처를 모르는 것은 다른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는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좋을 것이 생각보다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윤리에 어긋나는 떳떳치 못한 직업 때문에 딸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는 아버지, 어린 딸을 두고 옛 연인을 만나러 간 엄마, 최소한의 예의와 관심만 지키며 한 지붕 아래 사는 아들, 그것조차 못 견뎌 혼자 살면서 남자들과의 관계에 모든 존재를 거는 딸. 이들의 모든 비밀을 가장 먼저 눈치 채는 사람이 아버지가 고용한 사립탐정원이라는 것이 아마 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재정상태, 가족 내 문제, 부부사이까지 모두 까발려야만 얻을 수 있는 진실이라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주 예전에 읽은 소설에는 누군가의 삶을 가장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단 한가지는 그가 내놓는 쓰레기 봉투라고 했었다. 어차피 열어볼 것이 아니므로 가장하고 숨길 필요가 없는 것. 사실 가족이란 존재는 가족의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 받기 싫으면서도 끊임없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고 싶은 것.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타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아닌 것. 단지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칼을 드는 것. 어쩌면 내가 또 다른 사람을 다 알 수도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늘 사람과 닿고 싶어한다. 어느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노래했다. 어쩌면 사람은 사람과 완전히 맞닿거나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를 잘 안다고 믿는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동그라미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은 유일하게 서로 개인사를 궁금해 해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또 유일하게, 방문만 열면 개인사를 알 수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에 대해 서로 죽을만큼 걱정하고 애태워도 무의미하지 않은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가족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안식처가 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또 따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버릴 수 없으며,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도 있다고 믿는다. 친구도 애인도 헤어지면 남이 된다. 가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 중에 가장 신비로운 영역이다. 핏줄과 정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름은 소통이 되지 않아도 가족이고, 소통하지 않아도 가족이며, 따로 떨어져 살아도 가족이다. 때로 필요에 따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다른 관계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제 가족 안에서 가족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내 행복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기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나를 던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혼자였던 개인이 가족을 통해 소통하고 위로받으며 스스로 또는 타인을 치유할 때 세상은 좀 더 살만해 질 것이다. 그러면 유지가 블로그의 음악 포스팅을 통해 만난 단 하나의 대화상대를 찾아 집을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유지네 가족은 결코 하나로 뭉칠 어떤 계기나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유지의 위험천만한 가출을 이용해 가족의 단합과 소통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에 떠오른 알몸 남자의 시체는 과연 누구일까. 그 역시 누군가의 그리움이고, 상처이고, 가족일 것이다. 가족, 애인, 친구 같은 산뜻한 정의를 벗어나서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과연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안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나를 보여주는 것과 타인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일까? 문득 지금 내 가족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written by 깊은슬픔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추천도서2009.09.28 12:15

내 가족을 소개합니다 - 조금은 달라도 행복한 나의 가족 이야기
_ 이윤진 (지은이), 하의정(그림)/초록우체통,2009-05-01 00:00:00

눈,코,입 어디를 봐도 그 어느 곳도 하나도 닮지 않은 쌍둥이 자매를 본 적이 있습니다.'이란성 쌍둥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억지스러울 만큼 서로 닮지 않은 듯 했습니다.

후에 지인에게 들어 알고 보니 엄마, 아빠가 각자의 아이를 하나씩 데려와 재혼을 하신 경우 였습니다.두 딸아이의 나이가 같다 보니 그냥 쌍둥이로 지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얘기를 듣지 않았을 때는 모를 정도로 외모 만 다를 뿐 너무나 다정 다감하게 친자매처럼 서로를 잘 챙기고 잘 지내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습니다.

또, 방학이 지나 개학을 할 때쯤 김**가 박 **가 되었다며, 얘기를 하는 친구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요즘 입니다.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요즘 이 책을 만난 것은 아마도 큰 행운이 아닐까 합니다.

첫번째로 소개된 현도네 집 이야기는 엄마와의 이별로 인해 아빠와 함께 사는 한부모 가정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아빠의 힘든 생활고도 아빠를 도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도의 생활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만난 재호네는 조부모님과 함께 살며 가끔 부모님을 만나는 재호와 재민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경제난으로 이런 가정은 주위에서도 점점 많아지는 듯 하여 공감도 많이 가고
할머니를 생각하는 손주들의 작은 정성이 기특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세번째, 선주네 이야기는 '입양'이라는 특별한 절차를 거쳐 새로운 부모와 함께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혈육관계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편견으로 인해 입양을 꺼리거나, 입양을 하고도 숨기는 사람들이 많은데요.그로 인해 상처 받게 되는 아이들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입양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낳은 자식과 입양한 자식을 차별하지 않는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생물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네번째 지환이네 가정은 이혼으로 인해 각자의 부모님이 한 명씩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합쳐진 가정입니다.

자라 온 환경도 '각자의 성'도 다른 두 아이들이 한 가정 속에서 살아가며 겪는 속앓이와 성장통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였나 합니다.

또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 화합하기 위해 끓임없는 대화와 서로를 위한 배려가 두 아이들을 상처없이 한 가족으로 뭉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즘은 너무나 흔한 모습이 되어 낯설지 않은 가족의 모습인 '다문화 가정'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전 '혼혈'이라는 말이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로 바뀐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 어떤 신조어보다 마음에 와 닿고 편안함을 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이 말을 만든 사람을 만나면 꼭 칭찬해 주고 싶을 지경입니다.^^ 아빠는 빨강, 엄마는 하양, 둘이 만나 핑크가 된 유미 이야기는 읽는 이를 참 기분 좋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그 가정을 경험해 보지 않은 다른이들에게 폭넓은 이해와 배려를 생각하게 합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족의 모습들을 나쁜 것도 아니고 창피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집안 사정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조금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한 이 책을 모든 가정과 모든 아이들에게 추천합니다.

- written by 뻥공주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09.08.09 23:40
동갑내기 울 엄마 -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는 동화
_ 임사라 (지은이), 박현주(그림) |/나무 생각,2009-04-23 00:00:00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 천천히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동갑내기 울엄마라는 말이 왜이리 와닿는지.... 그렇다. 정말 그렇다. 나는 엄마가 된지 꼭 8년이다. 아이의 나이와 동갑이다. 이 제목만으로도 나는 계속 생각에 잠기게 된다.


병원 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를 보기 위해 엄마와 은비는 병원을 방문한다. 은비와 할머니가 마주앉자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은비는 은비를 사랑해주는 엄마가 있지? 하지만 할머니가 떠나면 엄마는 엄마 없이 살아야 한단다. 누구든 엄마가 없는 건 아주 슬픈 일이거든. 할머니 어디 가시는데요? 우리 엄마한테...  이 부분에서 나는 목이 메어왔다. 엄마가 계신 것 하나만으로도 자식들에겐 많은 의지가 된다. 뱃속에서부터 숨결을 공유하고 느껴서일까! 왠지 엄마라는 단어는 나를 짠하게 만든다. 우리 딸들도 내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 밤마다 울었다고 한다. 오히려 큰 딸이... 함께 한 시간이 많아서일까!  


할머니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신다. 은비야, 은비는 일곱살이지? 네 엄마도 은비 엄마가 된지 일곱 살이란다. '엄마 나이' 로 일곱 살이니 모르는 것도 많고 힘든 일도 많을 거야.... 내가 유치원 가기 싫은 것처럼 엄마도 회사 가기 싫을 때 있어요? 그럼. 네 엄마도 늦잠꾸러기인걸. 바퀴벌레랑 천둥도 무섭고 깜깜한 골목길도 무서워요? 그럼. 네 엄마도 겁쟁이인걸. 왕주사를 맞으면 나처럼 눈물이 나요? 그럼. 네 엄마도 울보인걸. 은비야. 여름 캠프에 갔을 때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했었지? 그래서 몰래 울었어요. 할머니가 하늘나라에 가고 나면 네 엄마도 그럴거야....! 


다음날 할머니는 먼 나라로 떠나셨다. 은비는 엄마 귀에도 할머니는 할머니 엄마를 만나러 간 거야. 할머니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거든. 엄마는 은비를 끌어안는다.


엄마의 보호만 받았던 은비가 어느새 부쩍 큰 듯하다. 엄마도 자신과 똑같은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에 은비는 왠지 엄마와 동갑이 된듯하다.


내가 바라보는 엄마는 항상 나의 엄마일 뿐 누구의 딸이란 생각은 안하게 된다. 우리 엄마도 딸이었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는다. 항상 나를 보호해줘야 하는 보호자의 느낌만 강할 뿐.... 이 책을 통해 나의 엄마와 내 딸 그리고 나 자신이 오버랩 되며 모두가 하나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살아가시는 엄마가 생각이 난다. 모녀의 관계를 떠나 같은 여자로서 나는 얼마나 엄마를 이해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은비의 마음도 엄마의 키 높이만큼 더 커지지 않았을까! 싶다. 




- written by 새벽별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추천도서2009.06.03 15:19

 

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세요

- 어느 날 갑자기 가십의 주인공이 돼 버린 한 소녀의 이야기

_ 세라 자르 (지은이), 김경숙 (옮긴이)/ 살림Friends

 

 

정말 큰 사건이다. 3년 전 주인공 디에나에게 일어난 그 사건 이후로 사건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아버지는 디에나의 눈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 사건은 물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현장에서 있던 세 사람, 디에나와 오빠의 친구였던 토미 그리고 아버지 가운데 철딱서니없는 토미의 입방아에 의해 주인공 디에나를 학교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퍼시피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쉽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는다.


학교는 물론 작은 도시 퍼시피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3년 전의 그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며 그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디에나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 디에나가 만나는 인물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어쨌든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가족들, 아빠와 엄마, 오빠 대런과 올케언니 스테이시, 조카인 갓난아기 에이프릴과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가장 친한 친구로 스스럼 없이 만나는 제이슨과 리 정도가 전부이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를 열세 살 디에나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가 생각하듯 디에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은 결코 아님을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사리판단을 분명하게 해서 일어난 일은 결코 아니지만 이제 막 사춘기로 이성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진 디에나의 호기심이 일으킨, 디에나의 아버지와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일대 사건임이 분명함에도 정작 당사자인 디에나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그 사건으로 인해 가쉽의 주인공이 된 자신의 처지로 또 그 사건 이후로 자신을 대하는 아빠의 태도 변화가 못견디게 힘들 뿐이다.


어쩌면 아직은 그런 사건에 대해 완고한(?) 우리 사회와 다른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디에나여서인지, 오빠인 대런과 스테이시가 10대에 에이프릴을 낳아 지하방에서 독립을 꿈꾸며 고달픈 생활을 하는 것 역시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냉랭해진 아빠로부터의 자유로움을 꿈꾸며 오빠 가족의 독립에 기꺼이 함께 동참하고자 할뿐이다.


미국의 10대 아이들의 성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삶에 대한 그리고 생활에 대한 부분을 부분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디에나의 이야기를 통해, 철부지 십 대의 불장난같은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그 정신적 혼란속에서도 결국에는 자신 내면과의 끊임없는 소통으로 지혜롭게 자신의 상처를 극복해 나간다는 아주 교훈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를 앞둔 딸아이를 두고 있는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디에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기란 그리 석연치 않다.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사건의 현장을-이야기로만 들어도 부정하고픈-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한 아버지의 충격을 상상만 해도 끔찍할 뿐이다. 나 자신이 주인공 디에나보다 디에나가 자신의 말을 제발 좀 들어달라는 아버지의 입장이고보니 오히려 사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자신에 대한 태도가 변한 아버지의 모습만 크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입장은 생각해 주지 않는 디에나가 살짝 괘씸해 지려고 한다.


그렇다고 3년 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쩌면 사건의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는 어린 디에나에게 말조차 제대로 건네지 않는 아버지를 100%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아버지의 그런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뿐. 무조건 딸아이와의 마주침조차 피하는 모습은 같은 부모로서도 답답하기만 하다. 솔직히 디에나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에게 힘든 시선이나 입방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도시로의 이주같은 것조차 고려해 보지 않는 디에나의 부모가 왠지 미련스럽기도 하다.


어쨌거나, 사건이 일어난 당시나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이나 역시 10대인 디에나. 아마도 아직은 부모의 입장이나 심경을 헤아리기엔 부족한 나이이려니 생각과 함께 그나마 사건을 피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해낸 모습만큼은 대견하기 그지 없다.


문득, 나와 딸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고 생각하니 나의 모습이 그렇게 쉽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디에나의 아버지처럼 입을 닫아버리고 딸을 피하게 될지, 아니면 딸아이도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며 위로하고 또 위로할지, 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꼭꼭 숨어들지.......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난다고 해도 아이(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그 누구보다 힘이 되어주고 피난처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모의 심정도 허심탄회하게 자식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래야 또 다른 오해와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터이므로.......

 

-posted by 재윤맘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추천도서2009.05.12 12:31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5월입니다. 그 어느 달 보다 따뜻한 봄 해살이 무르익는 계절에 아이들과 부모님과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기 좋은 책을 추천합니다. 리더스가이드 회원님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카테고리 유아
지은이 로버트 먼치 (북뱅크, 2000년)
상세보기

3세 ~ 7세
이 책을 읽으며 어쩜 내 마음과 똑같을까를 연발했던 책이지요.

태어나서 한없이 예쁘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미쳐버릴 것 같기도 하고(예를 들면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 어떤 때는 동물원에라도 팔아버리고 싶은 심정(한창 사춘기가 시작될 때가 아닐까요.)이 되기도 하지요. 또 더 자라면 이상한 친구들과 이상한 옷을 입습니다.(이 그림에서 공감백배였어요.) 이처럼 아이가 자라는 모습이 다 들어있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쳐버릴 거 같고, 팔아버리고 싶더라도 밤만 되면 사랑스런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암튼 감동 그 자체의 책이랍니다.

이 책은 사실 할머니들에게 읽어줬을 때 반응이 엄청 좋았던 책이라고 합니다. 아이 보다는 어른이 훨~씬 감동받는 책이지요.  (봄햇살)

 

코끼리의 등
카테고리 유아
지은이 아키모토 야스시 (보물상자, 2008년)
상세보기

3세 ~ 7세
『코끼리의 등』은 죽음을 앞두고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아빠의 사랑과 신뢰를 일깨워 주지요.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 만화에 이어 이 그림책으로 출간 되었습니다. 아빠의 등은 아이에게 놀이터이자 쉼터이고 버팀목입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등을 보며 삶의 지혜를 배우고 사랑과 신뢰를 키워 가지요. 보물상자에서 출간한 그림책 『코끼리의 등』은 아빠의 뒷모습을 통해 아빠의 사랑을 전하는 책입니다. (뻥공주)

 

할머니의 꽃무늬 바지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바버라 슈너부시 (어린이작가정신, 2008년)
상세보기

(초등 1~4학년)

열 자식이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있죠.

알츠하이머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는 책입니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앓으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병명인 알츠하이머병은 노인성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로 국내에도 수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리비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족 간의 사랑을 일깨우는 동화입니다.(뻥공주)

 

아버지(슬픔을 웃음으로 빚는)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원석 (자람, 2005년)
상세보기

저는요. 정말 어릴때 아버지 하면 세상이었거든요.^^ 우리집 대장이셨던 아버지.

그래서 인가 우리 아버지는 내 옆에 항상 있어주고, 그리고 늙지 않을 꺼라 생각했는데….

올해부턴 유난히 나이가 들어 보이시네요.

이 책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커보이던 아버지의 등이 우리를 키워주시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모습으로 보이는…

이제는 아버지가 너무나 작아 보인다는 내용의 책인데…

어린이 도서이지만, 읽고 나면 아버지를 기억하게 하는 한권의 책 같아요. (현지공주)



아버지의 자전거 (초등 저학년)

이철환 지음 |유기훈 그림 | 아이세움




이 책은 이철환씨의 최신작으로, 우리가 어릴 때 그러니까 제가 우리 아이만 할 때를 배경으로 한 책 같아요.

아버지의 자전거가 있어야지만 가족의 생계를 꾸릴 수 있는데 어느 날 그 자전거가 없어지고, 온 가족이 찾지만 찾지 못하다가 아이가 학교 교문 앞에서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의 자전거를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자전거가 아버지의 자전거여서 아버지랑 다시 학교 앞 교문으로 갔는데, 아버지는 그냥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아이 집보다 가난한 솜사탕 파는 아저씨 가족의 딱한 사정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법을 이야기 하는 책 같아요.

그리고 어려웠던 그 시절 가족이 소중함,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랍니다. (현지공주)

신고
Posted by 리더스가이드
그리하여 가족은 넓은 공유와 깊은 연대이다

- 파란흙

‘망망대해, 일엽편주에 홀로 앉아 있다. 간단없이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고, 시시때때로 폭우가 쏟아진다.’ 인생이 이렇다는 느낌을 누구라도 가져봤을 것이다. 만약 가족이 없다면, 이런 느낌은 결국 그를 함몰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최후의 보루. 우리 시대의 가족은 그런 의미다. 이 삭막하고 지리멸렬한 삶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이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떨어져 내리다가 문득 누군가가 겨드랑이를 슬쩍 잡아당겨 주는 느낌에 돌아보면 거기 있는 그들. 가족.

그런데 오늘의 가족은 쉽게 분해된다. 너무 쉽게 파괴되고, 보루커녕 최악의 인연이 되기가 십상이다.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가족의 연대가 자본주의, 돈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실용주의 혹은 삶의 편익 앞에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알던 가족은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가족을 갈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판타레이~ 지금 우리가 발을 담근 이 강은 조금 전의 그 강이 아닐진대, 이미 세월을 따라 멀리 가 버린 고색창연한 가족을 끌어안으려 헛된 몸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혹시나.

그러나 우리는 가족을 찾아야 한다. 가족의 의미를 찾아 우리 삶에서 새로이 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붕괴가 무서울 만큼 가속화되는 가정, 사회, 국가, 지구촌을 나락에서 건져 올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가족의 새로운 의미 구현은 다음 세대에 대한 우리 세대의 일종의 숙제일 수도 있다. 우리 손으로 아리아드네의 실 끝을 자손들에게 건네주어야 미로와도 같은 삶에서 가느다란 희망을 전해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고, 핏줄도 아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선녀는 아이 둘을 양 팔에 하나씩 안아들고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이를 노인들은 요즘의 이혼과 같은 상황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아이가 셋이었으면 이혼 안 했을 것이다.” “그럼 아버지가 다 다른 세 아이를 데리고 이혼한 공지영 작가는?”이라고 되묻는 데는 대답할 필요 없어 보인다. 숫자 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반박을 위한 반박을 하는 것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말은 아이 숫자가 많으면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더 깊어진다는 식의 단순한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만큼의 세월을 서로 견디고, 보듬고, 맞추어 가며 살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엄마의 바다라는 동화에서 다빈의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속아서 시집을 가, 전처가 낳은 네 명의 아이를 부여안고 해녀로 육십 년을 살아간다. 할머니 자신의 아이도 다섯이나 낳았지만 그녀는 늘 정성스러운 미역 아홉 타래를 만든다. 할머니가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는 의미 없는 물음이고, 아홉이 모두 그녀의 자식,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걸 육십 년이란 세월이 보여준다.

2006년에 만들어진 우리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우리는 정말 가족의 탄생을 지켜보게 된다. 이야기 1. 세상 단 둘 뿐인 누나와 남동생이 있다. 5년 동안 소식 없던 남동생은 스물 살 연상의 아내감을 데리고 나타나고, 연상의 아내에게는 전남편의 전처의 소생인 딸이 딸려 있다. 이윽고! 그들은 가족이 된다. 구심점이었던 남동생은 정작 늘 하던 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야기 2. 엄마는 자주 다른 남자와 사랑하고 마지막 아저씨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다. 딸은 엄마가 보기 싫어 독립했고, 반항적으로 삶에 부딪친다. 그런데 엄마가 병으로 죽으면서, 다른 남자의 아이인 남동생을 딸에게 남긴다. 엄마가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두 남매는 가족이 된다. 이야기 3.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남자와 세상에 대한 배려로 넘쳐나는 여자는 서로 사랑하지만 방식이 좀 다르다. 헤어질 뻔한 남녀는 결국 상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남자는 이야기 2의 딸의 남동생이고, 여자는 이야기 1의 연상의 아내의 전남편의 전처의 딸이다. 그들 모두는 가족이 될 듯하다. 더구나 이야기 1의 남동생은 오랜 시간 후 또 다른 배부른 여자를 데리고 누나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가족은 계속 늘어날 모양이다.

즉, 가족은, 가족의 본질은 말하자면 노력이다. 책임감이다. 시간이다. 그리고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 이기심을 죽이고 부단히 노력하여 ‘서로 애틋해하며 오래 오래 견디는 사이’. 그것이 가족이다. 그래야 배우자와 자녀와 양가 사람들이 모두 바운더리 안으로 모여든다. 또 이혼이나 재혼이나 입양이나 혹은 존재하는 다른 모든 형태의 가족이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나이나 국적이나 인종도 다 감싸진다. ‘사랑’은 오히려 가족이라는 말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사랑’이라는 말을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상대에게 쓰는 말로 한정지으면, 더군다나 이 말을 가족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쓸 수가 없다. 그처럼 사랑으로 감싸기 힘들고, 그처럼 완벽하기 힘든 것이 가족의 본질이다.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도 노력이다. 사랑으로 넘쳐나는 가족이 몇이나 있으랴. 좋지 않은 고부관계나 서로 미워하는 부부처럼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뭣한 관계도 가족 안에는 분명히 있다. ‘애틋해하다’라는 우리 고유의 정서가 더 어울린다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러나 적어도 그 안에는 상대와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이 들어 있다. ‘노력할 만큼의 가치를 상대에게 부여하는 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들면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억지스럽다. 다 자라서 결혼하고 자기 자식을 낳은 남녀는 부모를 그리 사랑하지 않는다. 부모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자녀는 희귀하다. 그러나 부모는 분명한 가족이다. 그들과 남은 세월도 공유할 것이므로.




*그의 죽음이 나의 상징적 죽음일 수 있어야 가족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는 창녀의 아들로 태어나 돈을 받고 창녀의 아이를 키워 주는 로자 부인과 함께 생활한다. 돈 받고 키워주는 일이 애초에 사랑을 담보할 리 없다. 그러나 모모는 정신병원에서 나와 아들을 찾아온 친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으로 내몬다. 모모에게 로자부인은 어머니나 아버지로 한정지을 수 없는 끈이다. 바로 가족이다. 낳았으냐, 법적으로 묶여 있느냐가 가족의 본질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는가, 혹은 함께 살아낼 각오가 되어 있는가가 가족의 본질이라는 한 증거이다.

모모가 이미 죽은 로자 부인을 지하의 아지트에 모셔놓고 얼굴에 화장을 해 주며, 옆에 눕는 모습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진득한 슬픔과 관계라는 것의 섬뜩함마저 준다. 그 아이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로자 부인의 죽음을 현실 속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걸 무어라 규정지을 것인가. 그건 아마 ‘그의 죽음을 나의 상징적 죽음 및 상징적 재생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근 출간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책에서도 ‘그의 죽음을 나의 상징적 죽음 및 상징적 재생으로 동화시키는’ 의미의 가족의 실마리가 보인다. 마리암은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엄마와 둘만 살아가다, 엄마를 저버리고 아버지에게로 간다. 결국 유일한 가족에게서 또다시 버림받은 엄마는 목숨을 끊고, 마리암은 찾아간 아버지에게서 버림받는다.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간 마리암은 복중 태아를 잃고, 남편의 폭력 속으로 던져진다. 남편 라시드는 애인의 아이를 밴 이웃집 소녀를 강압적으로 두 번째 부인으로 삼고, 이웃집 소녀 라일라는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라시드의 아내로 살아간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라시드라는 남자의 손에 일상이 좌지우지되며, 같은 폭력 아래 살아가며, 아버지가 다른 라일라의 두 아이를 함께 키운다. 그리고 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라시드를 죽인다. 삽을 내리친 것은 미리암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암의 아버지가 마리암에게는 가족이었을까? 매일이다시피 때리고 노예처럼 부린 라시드는 미리암의 가족이었을까? 미리암은 사형을 당하지만, 마음속에 오래 전에 죽은 자신의 엄마와 딸 같기도 했던 라일라, 그리고 손주 같기도 하고 자신의 아이 같기도 한 라일라의 두 아이를 품고 갔다. 그녀에게 ‘가족’은 엄마, 라일라, 그리고 두 아이뿐이었다.

가족은, 어쩌면 일상을 나눌 뿐 아니라 그의 삶과 죽음이 내게도 일종의 죽음이 되며, 일종의 다시 살아남이 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쉽게 끊어지지 않고, 희로애락을 공유하며, 그중에서도 분노와 슬픔을 더 크게 공유하며, 기어이 삶과 죽음을 함께 하는 연대. 즐거움과 기쁨은 나누기 쉬워서 굳이 가족이 아니어도 되지만 슬픔은 가족 사이에서만 지속적으로 공유되는 무엇이 아닐까 싶다. 가만히 느껴보자. 그의 슬픔이 더 큰 울림으로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는 당신의 가족일 것이다.


*그리하여 가족은 넓은 공유와 깊은 연대이다

그리하여, 가족은 넓은 공유와 깊은 연대이다. 핏줄이나, 법률이나, 기타 모든 수식어를 떼어내고 그저 이렇게만 생각해보자. 넓은 공유와 깊은 연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시대의 가족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셀 수도 없을 수많은 요소들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여 공유와 연대를 방해한다. 때문에 노력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가족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쉽게 분해되어 버린다. 이혼도 쉽게 결정된다. 노력은 많은 가치들 중 안 해 버리기가 쉬운 가치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가장 먼저 뛰쳐나온 미덕이 노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누군들 힘들게 노력하기를 즐기겠는가. 그러니 상대가 노력할 만큼 가치롭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내 행복에 배우자가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한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신기루였고 지금 너무 불행하다고 느끼면 그때는 해체일로를 걷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잘잘못의 이야기로 풀 수가 없다. 다만, 문제는 새로운 가족의 구성에 망설이는 현상이다. 그건 다시 말해 노력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족이 되기 위한 노력에는 나의 세월을 걸겠다는 각오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 슬픔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은 두려운 것이다. <가족의 탄생>에서 마침내 탄생한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나이가 들어 있었다. 1년 후에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감히 가족의 탄생이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어떤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고 오로지 세월로 검증하는 것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삶의 많은 부분을, 세월을 투자하는 두려움을 극복해 냈기에, 늘 가족 만들기에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공지영 작가와 그녀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소설 <즐거운 우리 집>은 공감을 얻는 것일 터다.

신고
Posted by 알지랑

이상적인 가족은 이상일 뿐이다

가족은 없다

다이애너 기틴스 지음ㅣ일신사(1997년 7월)

-김보일




커피 광고 속에 흔히 등장하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 볼까요. 사랑스런 눈빛을 교환하는 30대의 부부, 6살 정도의 아들과 10살 정도의 딸이 벽난로 주변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눕니다. 거실은 청결하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광고의 카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Man makes house, Woman makes home. 남자는 집을 만들고, 여자는 가정을 만든다? 남자는 밖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집을 꾸려갈 돈을 벌고, 여성은 특유의 감성으로서 집안을 화목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겠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형적인 가족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이 광고가 말하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열거해 볼까요.

첫째, 가족은 한 공간에 같이 거주하는 거주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음식을 같이 먹는 경제적 공동체라는 것, 부부는 사랑으로 묶여진 애정의 관계라는 것, 부부는 사랑의 결실로서 자녀를 두어야 한다는 것, 남자는 가족 부양의 책임을 맡아야 하고, 여자는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가정은 휴식과 평화의 정서적 공간이라는 것 등이 가족 이데올로기에 추가될 항목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 ‘가족’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에서 열거한 사항들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이런 이상적인 조건들을 모두 갖춘 가족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가족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상기해보세요. 현실의 가족은 상처투성이입니다. 가정법원의 판사는 가장 바쁜 법조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정도로 가족은 불화와 상처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일본소설가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력 삐에로>에는 아주 이상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해서 낳은 차남, ‘하루’의 출생의 비밀을 하루의 형에게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내 자식이다. 나의 차남이고, 너의 동생이지. 우리는 최강의 가족이야.”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말하면 범죄의 결과인 차남을 자신의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지는 노릇이죠.

그러나 다이애너 기틴스의 『가족은 없다』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접하게 되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가족의 개념을 너무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책이 소개하는 한 구절을 볼까요. “타히티에서는 젊은 여성이 공인되고 안정된 혈연관계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거나 또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한두 명의 아이를 가지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젊은 여성의 아이들을 그녀의 부모나 근친자에게 입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임’이 강요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 책은 시종일관 “가족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묶여진 정서적 공동체, 혈연의 공동체, 경제적 공동체라는 가족의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유형의 대안가족에 억압적일뿐더러, 보편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실에는 수많은 가족의 유형이 존재합니다. 이혼 가족, 재혼 가족, 별거 가족, 주말 가족, 기러기 가족, 입양 가족, 국제결혼 가족, 1인 가족, 공동체 가족, 남매 가족, 조손 가족, 동성애 가족 등이 그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나 사회가 개입해 ‘정상 가족’이 대다수가 되는 사회로 돌려놓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도 새로운 가족 형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난자를 제공한 어머니, 정자를 제공한 아버지, 자궁을 제공한 어머니, 그리고 길러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것이죠. 만약 가족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정상가족’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가족의 변이형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볼까요. 통계적으로 보면 3쌍이 결혼해 1쌍이 이혼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2006년의 통계를 보면 혼인 남자의 재혼비율이 16.7-18.9%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성의 재혼 비율은 이보다 조금 더 큰 18.0-21.1%. 해마다 10만 이상의 남녀가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 1인 가구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죠. 결혼을 아예 할 의도가 없는 비혼 가구까지 치면 그 비율은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등장하는 현실에서 가족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통합적이고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다이애너 기틴스의 『가족은 없다』를 좀 더 세세하게 살펴, 이 책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1장은 ‘가족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입니다. 한 가지 유형의 가족만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가족들을 항상 단수로만 인식하고 가족을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일하는 아버지, 가정을 꾸리는 어머니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도 따지고 보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개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의 2장은 ‘가부장제는 가족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가?’입니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경제적, 사회적, 성적 통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으며 이런 틀 밖에 놓인 여성들은 종종 마녀란 혐의로 박해받았으며, 일부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억압의 틀 밖에 놓여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3장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보편적인가?'에서는 친족이 반드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듯 가족 또한 반드시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화인류학적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인류의 보편적 정서라고 여겨 왔던 '어머니'와 '모정'조차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이를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일종의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적인 가족 개념 말고도 가족에 대한 또 다른 대안개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흑인노예 가정이 그 예죠. 당시에 노예 부부들은 다른 농장에 살며 일주일에 한두 번, 몇 시간 정도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가족 개념과는 너무도 다르죠. 어쨌든 흑인노예들을 가족이라고 묶어주는 것은 어떤 정해진 개념이나 사회적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일단의 무리를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성일 것입니다. 스스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력 삐에로>에서 아버지가 아내의 강간사고로 낳은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이 주관성입니다. 비록 피가 다르고 염색체가 달라도 타인을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없었다면 입양가족도, 동성애 가족도 있을 수 없었겠죠. 미국사회사업가협회(NASW)가 ‘자신들 스스로가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전형적인 가족 임무를 수행하는 2인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가족을 정의한 것은 이와 관련하여 꽤 의미심장합니다.

4장, '사람들은 왜 결혼하는가?'에서는 결혼의 이유가 부유층에게는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수단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동맹을 맺는 수단일 수도 있으며, 국가로 볼 때는 빈민 구제의 결정적인 수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5장, '사람들은 왜 자녀를 갖는가?’에서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1-2명의 자녀를 갖게 됨으로써 자녀들에게 더 무거운 정서적∙부양적 요구를 하게 되고, 이런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를 벗어나기 위해 자식들은 자신의 가족을 만듦으로써 독립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지적을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자식들을 낳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에게 거는 기대의 몫이 적었지만 자식들이 줄어듦으로써 한 명의 자식에게 부가되는 책임의 무게가 그만큼 커졌죠. 핵가족 시대의 자식들이 져야할 부담감이 이해되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6장, '여성의 일은 왜 끝이 없는가?'에서는 가전제품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노동량은 줄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진공청소기에 의해 해방된 일인 마루 청소는 일주일에 1번에서 점차 하루에 1-2번 하는 일로 되었다는 거죠. 가전제품의 발달과 함께 여성이ㅡ 고유임무라 할 수 있는 청결에 대한 압박도 커진 것입니다. 또 가전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유급노동과 가내작업이라는 이중부담을 여성들은 져야만 했습니다. 남자들의 가사 노동은 자발적일 수 있지만 자녀 양육과 가사일에 대한 책임은 여성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죠.

7장과 8장의 질문은 '국가: 가족 연대의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가족은 위기상태에 처해 있는가?'입니다. 국가와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국가, 특히 복지국가의 성장이 실질적으로 가족의 위치와 가족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보다 견고한 가족 연대와 가족 보호를 더욱 쇠퇴시키고 침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에 있다. ”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노후를 대비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죠. 그러나 국민들의 복지가 향상되면 생계와 노후에 대한 불안이 없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경제적 이유와 노후보장 차원에서 선택했던 가족의 기능이 쇠퇴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의 견해고. 복지가 향상되면 결혼을 해서 안정된 삶을 꾸려가려는 욕망이 실현될 수 있으므로 가족의 연대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이 또 다른 견해입니다.

저자는 아동보건과 아동복지를 위한 입법, 세금공제의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습니다. 아동보건과 아동복지의 입법은 국가의 미래의 노동력과 병력의 질을 증대하려는 특수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고, 세금공제는 아동의 양육의 재정적 책임을 국가가 맡기보다는 가족들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라고 말합니다.

9장, ‘가족은 위기 상태에 처해 있는가?‘에서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수입만으로 음식, 안락함, 넉넉한 공간, 그리고 소비재 등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2008년의 한국의 경제를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정책으로 고용의 질은 매우 낮아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부동산 경기의 하락에 따른 자산가치의 저하로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나서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대한민국의 임금구조에서 말단을 차지합니다.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임을 상기해보십시오.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의 임금노동과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이라는 3중의 책임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입니다. 슈퍼우먼이 아닌 이상 여성들에게 3중의 책임을 완벽하게 이행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런 여성들에게 매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가정을 요구하기 이전에 과연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존재하는 유사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고, 이상적인 가족에게 돌렸던 책무를 국가에게 돌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한 것이 2008년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칼럼니스트 소개>

김보일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과학 철학자이자 문학 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 『몽상의 시학』, 『공기와 꿈』,『공간의 시학』에 빠져들었다. 김화영의 카뮈 연구서인 『문학 상상력의 연구』를 여덟 번이나 읽으며 상상력이란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유희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예리하게 다가서는 물음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대학 졸업 후 광고 일을 했던 대기업 홍보실이 독서의 사각 지대라는 것을 깨닫고 책에 대한 갈증으로 사표를 던지고 나와 교직을 택했다. 철학, 문학, 과학…… 남독(濫讀)의 시절이 도래했다. 남독의 경험들을 불러 모아 북 리뷰 사이트인 '리더스 가이드'에서 북 리뷰를 연재하여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소나무)를 엮기도 하였다.

현재 배문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으며, 한국출판인회의 '이 달의 책' 선정위원, 청소년출판협의회 자문위원 등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그의 독서는 인문학과 자연 과학을 잇는 링커의 역할을 꿈꾸는 상상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저서로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2-과학편』과 『책꽂이 속에 숨어 있는 논술』(공저) 등이 있다.

2008년 12월 청소년을 위한 『14세 철학소년』을 출간하였다. 『14세 철학소년』은 2009년 1월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이 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되었다.
신고
Posted by 알지랑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