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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_ 김두식/창비(창작과비평사),2010-07-09 00:00:00

최근 교회 모임에 나오지 않는 한 분을 찾아뵈었죠. 뜻밖에 놀랄 만한 사연을 들었어요. 자신은 동성애성이 있다는 고백. 자초지종을 들어봤지요. 젊은 시절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아버지가 떼놓은 뒤부터 이성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죠. 그 은밀한 속사정은 예배당 안에서조차 가시지 않았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거죠.


나는 오늘날의 교회가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고 이야기해왔어요. 더욱이 사회적 소수자들도 언제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그런데 뜻밖에 그런 분이 우리교회 교우였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곰곰이 생각해 봤죠. 만일 그 분이 교회 내에서 동성애자가 되기로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교우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도 그 분과 이야기할 때 공감은 갔지만 마음까지 정리가 된 건 아니었지요. 예전에도 겪은 바가 있듯이 술중독자도 다들 괜찮다고는 했지만 불편해하던 일이 역력했었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어요.


동성이냐 이성이냐를 떠나서 관계 자체가 지니는 보편성과 개별관계의 특수성을 관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친구가 되고 나면, 친구 사이에서, 혹은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두가 똑같이 죄인인 입장에서, 누가 누구를 받아들이고 관용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공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 공포 때문에 더 커진 적대감이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친구가 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지요.(81쪽)


이는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를 부제로 달고 있는 법학자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한 대목이에요. 영화〈브로크백 마운틴〉을 두고서 한 것인데 아주 정확한 부분을 꼬집는 것 같았지요. 교회나 일반조직에서 동성애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건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라는 거죠. 개인적으로 그들의 속사정까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괜한 편견과 오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죠.


법학자지만 깊은 신앙심까지 소유한 그는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성경의 황금률까지 꺼내고 있지요.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가 프라이버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애자들이 관용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란 것이죠. 이성애자들이 보장받기를 원하는 그대로 동성애자들도 주장하고 누리도록 해 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가요, 수긍이 가나요? 중요한 건 그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죠.


이 책은 그 밖에도 청소년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종차별의 문제, 검열과 표현의 자유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러 부분들을 꽤 볼만한 영화들과 함께 풀어나가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저는 제가 한국에서 본 영화의 관람료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잘려나간 부분들은 기지 않았지만, 그걸 빼고 나면 이미 완전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으면 그만 아니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마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양복을 팔면서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양복이 분명하니 그냥 입으라는 것과 같습니다.(241쪽)


이는 〈바디 히트〉〈나인 하프 위크〉〈투문 정션〉〈와일드 오키드〉들을 보고 난 뒤에 한 이야기이죠. 한국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캔자스주 로런스 대학도시에 머물면서 본 것들인데 한국의 것들과는 달리 완전 무삭제였다는 것이죠. 그랬으니 화딱지가 날법도 한 것 같네요.


놀라운 건 그것이죠. 영화의 등급과 검열에 관한 것. 그는 2006년의 커비 딕(Kirby Dick) 감독의〈이 영화는 아직 등급이 없다〉를 예로 들면서 대부분의 심사위원은 대형영화관의 사장, 영화 배급업자, 대형영화사의 판매담당 부사장, 영화관 소유자협회 지부장, 그리고 몇몇의 성직자들이 맡는다고 해요. 나름대로 자본과 종교가 합작하여 이익을 챙기고 있고, 당연히 소수자의 시선은 묵살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요. 우리도 여태 그런 건 아닐까요?


아무튼 법학자가 영화를 소재로 인권을 이야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기발한 것 같아요. 그의 지식습득이라는 것도 영화를 통해 더 빨리 가져올 수 있었고, 독해력이라는 것도 외국영화에서 많은 덕을 봤다고 하니, 일거양득이란 바로 그건 것이겠지요. 그가 보고 추천한 영화들을 통해 우리사회에 일그러진 인권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고, 여러 의미들을 건져 올리면 좋겠어요. 그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아니라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 written by littlech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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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_ 후쿠타 세이지/비아북,2009-10-12 00:00:00

교육을 이야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나라가 '핀란드'이다. 세계 최고 학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성공한 교육 사례의 대표격인 셈이다. 어떤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기에 그런 찬사를 받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후쿠타 세이지의 원작에 박재원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의 해설이 덧붙여진 책이다. 이왕이면 한국인의 시각에서 핀란드의 교육을 세세하게 보고 듣고 경험한 책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과 한국의 교육여건이나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는 하지만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하고, 한국의 교육 상황과 비교하여 중점 있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교육에 대한 책도 여러 종류겠지만, 이 책은 핀란드 교실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서문을 통해 핀란드 교육을 정리해보자면, 핀란드에는 경쟁이 없으며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교사는 학생을 돕고 정부는 지원하고 부모는 협력했다”(p.22)고 한다.

“핀란드의 핵심적인 교육과제는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초점이 맞춰져있다. 하지만 한국은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만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p.54) 이는 한국과 핀란드 교육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는 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고, 이는 평가와 직결된다. 뿐만 아니라 평가결과에 따라 최상위권 학생은 더 이상의 학습동기를 부여받지 못하고, 하위권 학생은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을 갖기 쉽다. 분명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학력 편차로 인해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도 수업의 난이도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평가는 모두 힘을 합쳐 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지 서열을 매겨 학부모가 학교를 고르게 하려는 의도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장에 힘을 실어준다. 학교를 평가하는 것은 더 좋은 학교를 목표로 학생, 교사, 학교,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첫걸음.”(p.83)이라는 핀란드의 평가제도는 최근 일제고사로 논란이 많았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공부란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사회전반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핀란드와 잘하는 학생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고, 대학에 따라 취업에서 차별받는 한국 사회에서의 평가는 분명 그 의미가 달라진다.

교원평가는 어떨까? 핀란드에서는 교원 평가를 통한 인사고과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교사들의 노력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p.86)이란다. 이는 교사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에 가능하다. 핀란드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학부 3년), 대학원(석사) 2년을 마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2,3년간 자신의 장래를 고민한 후 대학에 진학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교사로서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래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다음 교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어떨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교사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교사로서의 인성과 적성이 갖추어진 좋은 교사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사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육관이나 전문성과 관계없이 안정된 직장인으로서 교사를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실시하고자 하는 교원평가 역시 신뢰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육관이나 교육철학이 변하지 않는 이상 교원평가 역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교육현장은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고, 핀란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핀란드의 교육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핀란드에게서 배울 것은, 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경쟁을 통한 줄 세우기가 아니라 학습 잠재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 느리지만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분위기를 배워야한다.

 

- written by 하양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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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항하는가
_ 세스 토보크먼 지음, 김한청 옮김/다른,2010-07-20 00:00:00

  중학교 1학년때인가 학원을 갔다가 11시쯤 귀가를 했습니다. 엄마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셨는데 TV에서는 커다란 빌딩에서 연기가 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저는 신발을 벗으면서 엄마한테 아주 순진하게도 저 건물 왜 불타고 있는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TV에 시선을 집중하신 채 와서 직접 보라고 하시길래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소파에 앉아 함께 TV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지나니 replay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더군요. 비행기가 슝- 하고 날아오더니 쿠왕- 하고 빌딩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폭발이있었고 그 동영상을 찍은 사람도 도망가느라 바빴는지 이리저리 초점이 흔들리며 비명소리와 함께 끝이 났습니다. 불타는 빌딩과 흥분한 기자, 앵커의 목소리에 이어 이번엔 위태롭게 서 있던 그 건물이 폭삭, 정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읽고 쓰러지는 사람마냥 무너졌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있는 게 뉴스인지 블록버스터 영화인지 잘 구분이 안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는 곧 TV를 끄셨고 저보고는 이제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자라시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날은 2001년 9월 1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 고등학생일 때에는 영어회화라는 과목이 있었고 우리 과를 맡았던 외국인 교사는 Mr. Rogers로 시사와 세계 정세에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두 번 들어있는 수업이었지만 매 시간 영자신문을 읽고 제 1면의 논점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그에 대한 에세이를 써서 내야 했으며 강의를 듣고 시험도 봐야했기 때문에 당장 내신과 수능이 급한 학생 입장에서는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죠. 물론 열심히 한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전 지금보다 훨씬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꼬맹이였기 때문에 조지 부시 따위, WMD 따위, 북한 따위 알게 뭐람 하고는 신문도 읽지 않고 토론시간에 졸고 시험은 벼락치기로 공부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영어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는 데에 언어 장벽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후회합니다. 왜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 나는 가만히 있었을까. 왜 나는 금방 잊고 마치 전 세계가 지금 여기처럼 태평하다고 눈가림하려 했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금에라도 후회하는 걸 다행으로 새악ㄱ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책이 만화라고 하더라도 읽지 않았겠지요. 신문을 봐도, 책을 읽어도 이해가 안되고 너무 어려운 것 천지라서 그저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런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어느새 20대 중반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로 와버렸네요.

  더 이상 제 무지를 묵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다짐은 이 책을 읽기 전에 한 것이지만 앞으로도 항상 새로 각오하겠다는 느낌으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직 이 책의 메시지를 실행에 옮겨 직접 저항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저항을 해야 하는지는 익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심이 1단계, 그리고 상황 파악이 2단계. 2단계까지 제가 성장하고 나면 3단계 의견 및 의지 표방, 그리고 4단계 실행으로 이어질 겁니다. 몇 년이 걸릴 지 몇 십년이 걸릴 지 모릅니다. 말이 4단계지 사실은 무수히 많은 중간 보스를 해치우고 자신을 추스려나가는 과정이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릴 적 풀던 수학 문제집에 한 번호 아래에 수많은 새끼문제가 있는 -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 문제가 있죠. 마치 그것 처럼 지금 말하고 있는 제 무지에 대한 문제도 끊임없이 저를 괴롭힐겁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 지금 이렇게 남긴 글이 부끄러워서라도 그만 두지 못하게 되기를. 좀 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P.S. 이 글을 읽고 나면 지금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으시겠죠? 구체적인 길을 잡지 못해 아지곧 갈팡질팡하는 저에게 작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쉬운 책 한권 추천,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일,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배웠을테지만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 방법들. 모두 환영합니다. 도와주세요.


- written by ag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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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자유방목 아이들
_ 리노어 스커네이지 지음 | 홍한별 옮김/양철북 ,2010-06-07 00:00:00

학창시절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자식은 이렇게 키우지 말아야지'라며 미래의 육아지침을 마음에 새기곤 했다. 당시 내가 당했던 통제를 자식 대에서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하고 좀더 넓은 의미의 육아와 교육의 기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기존에 어설픈(?) 육아·교육에 대한 입장이 훨씬 업그레이드 되었다. 우선 내가 생각하던 육아방식이 ‘통제’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주변에 이야기하면 아직 애가 없어서 그래 키워보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런 비아냥에도 자신 있었다. 이미 중심이 서 있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니라 세월을 거쳐 형성된 철학이라는 믿음이었다.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우는 것인가

아이가 나오고 나서 행동에 돌입했다.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작고 어설프게 생긴 아기를 보면 어쩐지 부모인 내가 전적으로 도와줘야 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솟는 것이었다. 위험에 대한 불안감도 늘어서 그런 것도 있다. 아이에겐 아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도 있음이 또 하나의 요인이다. 서로 애를 학대한다고 사사건건 충돌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감기 때 병원 가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 병원에 간적이 없었다. 물 많이 마시면서 쉬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으면 하루 만에 거의 나았고 심하면 ‘종합감기약’을 먹었다. 약이 듣는 것은 아니었다. 감기에는 약이 없으니까. 내 아들도 그러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딱 두 번 병원에 데리고 가봤다. 40도 가까이 이틀간 열이 지속되었을 때, 얼굴 전체에 두드러기가 솟았을 때. 결국 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증명이 되고 말았다. 항생제를 거부하는 부모에게 타이레놀 처방이 전부였던 소아과 의사와 두드러기의 원인은 모르겠고 ‘접촉성피부염’이라는 광범위한 처방을 내리는 피부과 의사는 내가 원한 전문가가 아니었다.(나는 의사를 별로 믿지 않는다. 그들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앞으로는 병원 데리고 갈일이 더 없어질 것이다. 요즘은 처도 내 쪽으로 점점 돌아서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좋은 공부다. 엊그제 대학친구의 식구들이 놀러와서 이틀간 묵었다. 동네 개울에 물놀이를 갔는데 나는 물가에서 5미터쯤 떨어져서 자리를 깔고 그늘아래 누워있었다. 눈을 감고 솔솔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곧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첨벙첨벙 하는 소리. 가끔 큰 돌을 던져서 큰 물장구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제지할 생각은 없었다. 첨벙첨벙. 연이어서 들리는 물장구, 좀 불규칙하게 들린다. 이거 허우적거리는 소리다! 눈을 떠서 바라보았다. 아이가, 없다. 맨발로 뛰어서 물로 들어갔다. 기껏 무릎정도 되는 물깊이다. 아이는 빠져서 곧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엎어져서 허우적대는 아이를 건져내어 물가로 나왔다. 화장실에 간다고 애보라고 신신당부하던 엄마가 뛰어왔다. 아이의 충격보다 처의 나무라는 소리가 더 두려웠다.

그건 결국, 꿈이었다.

친구네 아이와 엄마는 우리아이와 함께 같이 있었다. 시종일간 아이 곁에 바싹 붙어서 돌 던지고 노는 아이를 감시했다. 하지마라, 너무 큰 돌을 잡지 마라, 미끄러질라 조심해라, 엄마 손잡고 걸어라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부터 그랬다. 아예 안아서 건너갔다(위험하다). 나는 네 살 아들에게 혼자 건너기를 권했다. 아이는 무섭다고 했다. 물을 건너서 손짓을 했지만 징징거리며 아빠가 오기를 바랐다. 물속에 다리를 담그고 건너가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건너게 했다. 가끔 돌이 흔들리는 것이 있어서 자세는 불안했다. 손을 놓고 스스로 건너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에서 감시하는(?) 애엄마 때문에 포기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동생과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 뿐 아니라 계곡의 큰 바위 위를 올라가는 것도 제지당한 적이 없다. 산 사이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나 밧줄로 묶인 위험해 보이는 외다리, 절벽을 오르는 철제계단을 오를 때도 스스로 했고 조심해라를 수십 번씩 외치는 지금의 부모들과는 달랐다. 너무 흥분한 순간에 적절하게 주의할 것을 주지시키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끔(사실 어린시절에 무릎은 성할 날이 없었다) 무릎이 까지거나 손바닥이 까져도 놀다가 그런 것이라 다음번엔 좀더 주의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정도였다. 담을 넘다가 입가가 찢어져서 열두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은 때에도 나의 ‘부잡스러움’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놀지 않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좀 더 주의력이 생기고 위험함을 인지하게 된 정도랄까.

아이는 스스로 큰다
지금 아이들은 너무 과보호 속에 자라고 있다. 주체적 놀이라는 것을 경험할 틈도 없다. 시골 초등학교 6학년들에게 발피구(둥그런 원에서 공을 차다가 놓친 사람이 원안에 들어가서 공을 맞거나 잡는 게임)를 가르쳐주고 ‘사부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을 정도다. 내가 그 나이 때는 짬뽕, 오징어, 구슬놀이, 팽이,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고 놀았다. 요즘 아이들은 기껏 공을 차거나 공을 던지거나 하는 프로스포츠 흉내 내기밖에 할 줄 모른다.

네 살 아들이 돌을 잡을 때마다 “이거” 하면서 검사를 받는다. 그럼 아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돌의 크기가 충분히 작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그런 돌을 던지면서 논다. 세상에 물에 돌을 던지면서 자신이 들 수 있고 없고를 엄마가 결정해준단 말인가.

모두 두려움 때문이다. 아이가 빠지는 꿈을 꾸는 것처럼 혹시 우리 아이가 하는 불안감이 행동을 제약한다. 아이의 행동뿐만 아니라 부모의 행동도 제약된다. 미국에서는 아이가 두블럭 (몇 백 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떨어진 곳에 심부를 다녀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차로 데려다 주거나 부모가 동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는 것은 ‘아동학대’에 속한다. <뉴욕범죄수사대><크리미널마인드>등은 갖가지 기상천외한 범죄만을 생산해내고 있지 않은가. 실재하지 않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자유방목아이들>의 저자 리노어 스커네이지는 지극히 평범한 부모이다. 아이를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키우기 위해 ‘자유’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금 아이들은 행동 결정권이 전혀 없다. 핸드폰으로 우유를 먹어도 될지 옥수수 빵을 먹을지 컵케익을 먹을지를 결정해주는 부모의 명령을 기대할 정도다.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다. 뉴스와 드라마는 범죄와 사고의 가능성을 크게 부각한다. 시청률을 위한 선택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내게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반복적인 노출로 굳어지게 돕는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고’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것을 어른인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발전시킨다.

통제는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까.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나을지 골프채를 잡게 하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학과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학원에 보내서 나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정도는 어느 부모나 다 하는 것이다. 차라리 학원을 보내지 않고 도제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가능성’면에서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부모는 드물다. ‘주류’에서 벗어날 경우의 불이익이 두렵기 때문이다. 오로지 모두가 꿈꾸는 희망을, 소수가 잡게 될 그것을 바라고 있는 꼴이다.

초등학생 아이들 몇 명이 와서 당신에게 뗏목을 만들어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위험해서 안돼”하겠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쿨한’ 삼촌은 기꺼이 그러라고 하고 아이들이 만든 뗏목을 강가에 차로 실어다주기까지 했다. 조끼를 다 입히고 태워주고 물로 밀어주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뗏목을 타고 그것이 상상하던 모험과 다름을 느낀다. 강의 급류를 타고 흐르기라도 하면 두려움은 급속히 는다. 이때 그 삼촌은 미리 매어 놓은 줄을 당긴다. 강가에 도착한 아이들은 삼촌의 배려에 감사하고 진짜 모험의 설렘과 철저한 계획 없는 실행에 대한 두려움을 배운다.

‘만들어진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을 위해 자신이 자라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뉴스의 범죄를 내가 당할 확률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에 가깝다. 이런 확률의 사건에 대한 기대로 맘을 졸이고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잘 되지 않는다고? 티브이와 신문을 끊어라. 그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단다.


- written by 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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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신간 <B급좌파:세번째 이야기>를 읽는다. 언제나 명쾌한 문체의 김규항의 글이라 술술 들어온다.

몇일 전 누군가 해준 김규항-진중권의 논쟁이 생각이 난다. 진보신당의 대중화에 대한 비판이라한다. 진중권이 이에 화답하여 이야기가 꽤나 오간 모양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닥 잘 행하는 것이 없어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니 좀 안타깝다. 계급과 진보주의라는 명제가 공허하게 다가온다. 말하는 이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현실적으로 실천하기에 한 집단을 규정지을 수 있을까? 싶다. 그에 대해 좌파 바바리맨으로 댓구한 것도 어쩌면 또하나의 규정이지 싶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글이 눈에 안들어온다. 왠지 타자만 있고, 주체는 없다. 나는 무엇을 하고 나는 무엇을 잘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선명한 칼의 자루는 숨겨진 느낌이다. 그래서 진중권이 숨겨진 난장이나 신학으로 비판한 모양이다. 그러나 공격이든 방어든 별로 진보적이지도 않고, 발전적이지도 않아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은 박래군이다. 누구에 못지 않은 사람으로, 책보고 글써가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항상 실천현장에 있다.

 

또 한사람 부동산계급사회를 쓴 손낙구다. 국회의원 보좌관일때도 집에는 100만원만 가지고 갔다. 나머지는 당으로. 부부가 사회운동하느라 예술고를 가고 싶어하는 딸 뒷바라지 못해 나오는 한숨이 기억난다.

 

또 한사람 박원순이다. 논쟁보다 대안을 만든다. 그래서 신선하다. 힘이 난다. 드러내지 않는다. 남을 규정짓지 않는다. 그래서 난 그가 진짜 좌파같다. 그래서 100인의 책마을의 한국의 좌파열전 결론도 그렇게 썼다.

 

어쨋든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현격히 밀리는 여론전에서 그나마 목소리를 내니 말이다. 다만 총구를 나의 순결함을 위해 쓰지 말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서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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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_ 공지영 (지은이) /창비(창작과비평사),2009-06-30 00:00:00

 어째서인지 그녀의 책들은 읽고 나면 한동안 머리 속을 정리하느라 차분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더군요. 아무 생각 없이 '고등어'를 집어들었을 때도, 읽고 나서 한동안 약간 우울감에 잠겨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영화는 안보고 책으로만 읽었는데 펑펑 울고나서 다시 공부하려니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더라구요. 제 주변 사람들은 그래서 공지영씨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청승맞다나요...? (전 청승이라는 말 뜻의 의미도 잘 모르겠더군요;; ㅋㅋ) 하지만 그렇게 차분하게 우울감에 잠겨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 '고등어'를 읽고 나서 내가 이 책을 왜 읽었을까 후회했던 것도 잊고 도전! 게다가 이 책, 페이지수가 얼마 안되잖아요 ㅋㅋ 왠지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죠.

  결과적으로 금방 다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고등어'를 능가해 저를 짓누르더군요. 저는 이런 종류의 사회적 부조리를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합니다. 무진시에는 자애 학원이라는 농아들을 위한 학교가 있습니다. 농아들 중에는 태어날 때는 정상적이었다가 나중에 귀가 먹은 아이들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다른 지적 장애까지 동반한 아이들도 있죠.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는 곳에서 있어서는 안되고 입에 담기도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교장, 행정실장, 그리고 생활지도담당 선생님이 그곳 아이 몇명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하거나 성폭행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지적 장애까지 겹친 유리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15살이 되기 까지 계속 세명에게 돌아가며 성폭행당하고, 그저 듣지만 못할 뿐인 연두는 성폭행을 시도했으나 추행에 그치고, 그리고 민수와 얼마 전 자살한 그의 동생 영수에게까지 손을 뻗치는 등, 남여를 가리지 않고 추행을 일삼아 왔습니다. 기숙사 사감이라는 윤자애는 아이 손을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안으로 넣어 린치를 하고 있질 않나, 밥은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고, 도대체 이런 학교가 실제로도 있을까 싶었어요.


  자애 학원의 이런 어두운 면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이 학교의 기간제 교사로 들어오게 된 강인호라는 선생님이 등장하면서입니다. 그는 서울 살다가 실직을 하면서 아내가 소개받아온 무진의 교직자리를 거절하지 못해 무진으로 내려오게 된건데요. 농아 학교라서 미리 수화도 배우고 이번 직장만은 어떻게 잘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내려왔건만, 영 학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거죠. 그도 정의의 사나이는 아니었지만 무진에는 같은 학교를 다녔던 서유진이라는 여자선배가 무진 인권 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강인호씨는 영문도 모르고 그냥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나보다 했던 일이 정말 장난이 아니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이었던 겁니다. 아이들의 증언을 추가할 수록 성폭력 상담센터 소장, 무진 인권센터 사람들, 강인호, 연두의 어머니, 거기다가 수화를 통역해주는 통역관까지 그 학교에서 자행된 범죄에 그만 할 말을 잃습니다. 아마도 이 어린 아이들 - 고작 15살밖에 안된 중학생이니까요 - 은 어른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준다는 것에 안심하고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죠. 저는 처음부터 너무나도 끝이 명백한 이 이야기에 계속 마음이 죄여왔습니다.


  상대는 무진시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무진의 윗자리들은 다 무진고, 무진여고 출신이거나 영광제일교회를 다니거나, 아니면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있거나 등등등... 이 이강복-이강석 형제에게 잘못보여서 좋을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던거죠.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도 선뜻 도와준다고 하지 못하고 말이 안되는 소리 취급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윗자리는 다 한통속이라는데 이 책에서만큼 그걸 여실히 느낀 적이 없네요. 침을 뱉고싶을 정도로 불쾌했습니다. 경찰서도, 교육청도, 시의회도 다 그 나물에 그 밥. 서울의 방송사 피디에 의해 이 사건이 조명을 받게 되고 잘 풀려가는 듯 했지만 여전히 법정에서 그들의 죄를 입증하기에 그들의 입지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었습니다. 그저 사회 정의라는 허울뿐인 명제를 딛고 서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거에요. 연두는 정말 법정에서 영특하게 답변을 해 주었고 유리도 민수도  모두 없던 힘까지 짜내주었습니다. 하지만 민수와 유리의 보호자는 그저 무식과 가난에 그만 두 손 들고 합의를 하고 만거죠. 민수의 부모님은 두분 다 지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설득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거고, 유리의 할머니는 처음에는 절대 안된다고 말했지만 유리 아버지의 병원비와 유리 대학 자금까지 대준다는 말에 계속 마음이 걸려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성폭행에 대체 합의라는게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하지만 제도가 그렇게 되어있는걸 어쩌겠어요. 당하는 사람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법의 허술함이 와닿지 않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잠시 희망의 빛은 반짝였다가 다시 어둠속으로 묻히고 말아요. 이강석-이강복 형제는 그들의 연줄과 인맥으로 결국 집행유예를 받게 되고 실형을 사는 건 생활지도교사라는 박보현 하나에 그칩니다.


  정말 분통터지지 않는 일일수가 없지요. 강인호도 서유진도 그 일에 관여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여기가 끝이 아니기에 법정에서 졌다는 사실만으로 풀죽어있으면 안되었어요. 끊임없이 시위를 벌이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시금 동분서주하는 동안 강인호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물론 자신의 딸, 새미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정말 두손 두발 걷고 그 사람들을 저주하며 그 사람들이 처벌받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겠지만 가정에서의 그의 위치는 돈을 벌어와야 하는 가장이자 아내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자애원에 오게 된 기간제 교사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다지 뚝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편이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자애원 아이들을 도와주겠다는 결심을 뒤로 한채 무진으로 내려온 아내에게 설득당하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사실 강인호처럼 사건에 깊이 관여하기를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겁니다.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는데 정의 운운하면서 가족을 내버릴 수 있는지. (거기다가 가족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이에요.) 이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을 원망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할거야라는 생각으로 한발 물러서고 말겁니다. 저도 그런 상황에서는 뒷걸음질 칠 것을 알기에 더더욱 마음 한켠이 에려왔어요. 끝내 무시당하고 핍박받고 궁지에 처한 이들을 외면하고 서울로 떠나는 강인호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소시민적 태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소시민적 태도라고 해서 꼭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가정을 지킨다는 것도 참 숭고한 일이지요. 딸아이를 먹여 살리고,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닐겁니다. 한 남자로서 직장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공지영씨는 이런 태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단순히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폭로하기 위해 이 책을 쓴걸까요? 이 세상이 광란의 도가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강인호를 통해 우리의 끝까지 진실을 위해 매달리지 못하는 태도를 꼬집고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 쓰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결말처럼 우리가 수많은 노력을 들였다고 해도 그것이 허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거나 아니면 진실을 추구하는 데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만들죠. 서유진이라는 사람은 강인호와 다릅니다. 일단 직장부터 다르잖아요. 무진 인권 센터라니까요. 그녀는 끝까지 세상에 소외받는 이들을 위하여 일할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보면서 드는 제 생각은 세상을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할까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편해지자면 편해질 수 있건만 그 알량한 정의와 양심때문에 내 인생 하나를 오롯이 바쳐야 하는가도 딜레마죠.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선뜻 나서기 힘들테니까요. 책을 읽으면서 강인호와 서유진을 왔다갔다 하는 통에 제 마음이 너무나도 번잡스러웠습니다. 왠지 내 자신이 비난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구요. 하지만 이런 자극을 받음으로 인해 의식의 저편에서 무언가 조그마한 것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이 책 하나로 제 인생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소시민일거고 여전히 무기력하게 공부만 해대는 학생이겠죠. 그래도 이런 계기들이 조금씩 쌓인다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읽은 것 치고는 할 말이 참 많네요. 교과서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이긴 하지만 그 내용이 정말 충격적인 만큼 저를 흥분의 도가니에 밀어 넣게 하는 책이었네요. 책을 읽은 건 좀 시간이 지났지만(한 2주일 전쯤?) 이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생각을 정리해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서평을 썼다면 그냥 흥분한 상태에서 지껄이는 헛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ㅎㅎ 진지한 주제를 싫어하시는 분, 말 그대로 재미있는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런 류의 책 질색하시겠지만 한번쯤 이런 우울과 진지함의 경계에 서보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사실 여름쯤 나온 책이라 많은 분들이 읽었겠지만 (공지영씨 소설은 나오면 보통 베스트셀러니까..) 뒤늦게 공지영씨의 책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예전 책들을 읽어보았더니 꽤 맘에 들었다면, 이번엔 '도가니'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 아아, 저는 이제 잠시 연두와 유리를 품에 안고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와 함께 안녕을 고해야겠네요. 다음에 이 책을 집어들게 될 때까지 말이에요.

- written by ag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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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독서의 즐거움
_ 정제원 (지은이)/베이직북스 ,2010-04-25 00:00:00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책읽기라는 것은 놀다가놀다가 지쳐 도무지 다른 할일이 없을 때 한번 해볼까 하는 지겨움일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학교 수업시간 후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책읽기를 하고 싶어 도서관으로 뛰어가는 지상 최대의 행복일수도 있다. 솔직히 어느 누구가 더 낫다 라는 말은 좀 어리석은 말인듯하고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나의 즐거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어린시절에, 혼자 집에 덩그러니 놓여있다가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날이면 날마다 집 옥상 계단에 걸터앉아 책을 펴들었다고 한다. 학교도 다니기 전의 나는 그때 글자를 읽을 줄이나 알았을까? 내가 알기로 우리집에는 그림책이라는 건 없었으니까 분명 옆구리에 끼고 올라가 펼쳐든 책은 온통 글자투성이였을텐데.
어쨌든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을 빼더라도 나는 집에가면 혼자 책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던 것 같다. 언젠가 한번은 날씨도 화창한 오후였는데 에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고양이를 읽었던가. 텅빈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워 사방을 두리번거려봤지만 오히려 그 적막함이 더 나를 위협하는 듯한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아마 유일하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던때가 아닐까 싶다.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라고 되어있는 이 책은 이미 충분히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내게는 그닥 끌리는 책이 아니었다. 더구나 '교양인'이라는 말이 왠지 괜한 자격지심처럼 내게 거슬리는 말이 되어버려서 그저 책읽기에 관한 책이려니 싶어던 것이다.
그런데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를 읽고 난 후 책의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목차를 훑어보는 습관을 들이고 있던터라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차례의 제목을 슬그머니 훑어보게 되었다. 그런 후 바로 나는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어버렸다.
사실 책의 소제목들이야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다 경험해보고 자기 나름대로의 책읽기를 통해 체득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소제목의 광범한 내용뿐 아니라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책들때문이었다. 물론 읽지 않은 책들도 많지만 내가 이미 읽은 책들은 내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물해 준 책들이었기에 저자와의 책읽기 코드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들에 대해 저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흥미를 느낀다면 그 책들을 읽어도 후회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독서의 범위를 마구 넓혀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저자가 이야기하는 독서의 즐거움에서 배울 수 있는 노하우는 잘 기억하였다가 나 스스로의 독서의 즐거움으로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 책은 내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더 느끼게 해 주었으며 책읽기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또한 다시 확인해본다. 물론 진정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면, 그 책읽기를 통해 타인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을 터이니 책읽기가 혼자놀기가 아니라는 것 역시 새삼 생각해보며 웃음짓게 된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내가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들을 두번째로 읽을만한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는데,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아직 내가 읽지 못한 다른 많은 책들을 읽으려한다는 것이 조금 맘에 걸리긴 하지만 뭐 어떤가. 그것 역시 소통과 만남 속에서 나를 발전시켜 나가고 내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으로 행복할뿐.



- written by 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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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_ 김규항/지승호/알마,2010-03-26 00:00:00

한때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단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아니 한때의 유행이었다기보다는 누군가 테스트를 해보고 블로그나 까페에 올리면 사람들이 나도 한번 해볼까,의 심리에 부응해 다들 한번씩은 정치성향뿐 아니라 심리테스트에 독서취향 테스트까지 온갖것을 해봤던 때가 있었다. 테스트의 신뢰도라기보다는 그냥 재밌고 신기해서 한번쯤은 해봤을 정치성향 테스트에서 나는 기울어진 왼쪽과 조금 떨어진 아래쪽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본의 권력과 달콤함을 알아버렸기에 자본제를 부정하고 싶지만 쉽게 부정할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교대상으로 나온 유명세를 탄 몇몇이들보다 내가 더 기울어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타인의 눈에 보이는 나는 좌파성향을 가진 자유주의자일수도 있겠구나 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뒤통수를 퍼억 치고는 내가 진보의 탈을 쓰고 개혁을 외치면서 체제유지를 더 공고히 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해보라고 한다. 스스로 B급 좌파라 일컫는 진보적 사회주의자 김규항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파악하라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 사실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려고만 했던 많은 문제들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정의에서 시작하여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나도 몰랐던 애매모호한 부분들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보여 오히려 깔끔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어 더 좋았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보편적인 잣대는 그 사회가 어떤 체제인가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수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보인 거죠. 한국은 다들 흔히 하는 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말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고요. 자본주의 체제에 찬성하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인 거죠. 물론 찬성하는데도 여러 층위와 방식이 있고 반대하는 데도 여러 층위와 방식이 있으니 보수라고 다 같은 보수가 아니고 진보라고 다 같은 진보는 아니겠죠. 그러나 큰 덩어리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이른바 절차적인 수준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거죠. 이런 상황에서 체제의 불안정함은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가. 그것은 체제안에 가짜 진보가 존재하는 겁니다.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지키는 세력입니다. 그들이 인민의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 가짜진보가 바로 개혁세력입니다.(136-138)

누군가에게는 그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들릴수도 있을 것이고, 굳이 그렇게 따져 묻는다는 것이 불편할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친구들에게 냉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인간적이고 감성적으로 마음이 가는 것과 이론적으로 냉철하게 명확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말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한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오해와 지탄을 받을 것인가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의 실제 삶의 모습이나 실천의 모습들, 말과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모습과 생활이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상향이 있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과정에 있을뿐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진보적 좌파인 김규항이라는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북한이 제대로 된 사회주의 나라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과연 남한 사람들이 비웃을 만한 사회인가'라는 생각은 들어요. 굶는 인민들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그 배경부터 살펴봐야겠죠. 북한은 일찌감치 공업화된 농법을 도입했는데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우방 국가들의 지원이 확 끊겨버리면서 농업 시스템 자체가 몰락했어요. 거기에다 홍수에 미국의 봉쇄 정책까지 겹친 겁니다. 중요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 살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게 아니라 함께 고난의 행군을 했다는 겁니다. 남한 사람들 같으면 어땠을까요?
이제 북한을 적으로만 규정하는 냉전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북한을 저 먼 발치에 두고 있으며 여러 사건들과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다시 북한이 적대시 되어가고 있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언젠가 철조망을 걷고 평화로이 서로 왕래하는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사실 이 인터뷰집에서 인용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다. 진보와 보수, 개혁, 좌파, 페미니즘, 문화, 영성, 미래세대의 교육 등 언급된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싶지만 그것보다 이 책을 한번 더 훑어보고 김규항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접어둔다. 이 책에서 언급된 주제들 중에서도 진보와 보수를 규정하는 기본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싶고, 특히 북한에 대한 시각과 미래세대를 책임지게 될 현재의 우리 청소년들의 삶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문제로 성찰하며 함께 생각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 한국의 아이들이 제대로 놀기는커녕 감옥의 수인들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것, 또 그렇게 생활한다는 건 지구상에서 한국 아이들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아이들을 그렇게 생활하게 하는 건 누군가? 이명박 정권과 그 일당인가? 그리고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좀 더 인간적이고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해주기 위해 그들과 싸우고 있나?
아이들을 그렇게 생활하게 하는 건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바로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이를 위해 자신들의 인생을 올인한다는 부모들이다.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고 이명박 정권의 시장주의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죽인다고 외치면서도, 그들의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우리들, 신자유주의 귀신에 영혼이 저당잡힌 우리들의 모습.(146)

자신은 비주류의 삶을 살았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것인지 안다는 이유로 아이만큼은 주류의 흐름에 맡기려고 하는 친구들의 말을 간혹 듣곤 한다. 하지만 그걸 뭐라 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김규항같은 좌파는 아니잖은가.
다만, 부모가 자신의 기준과 가치에 맞게 아이들에게 삶을 강요한다면 그건 지상최고의 독재일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가 저지르는 최고의 악행이 아닐까.


- 김규항의 인터뷰집이지만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이야기해버리게 된 것 같다. 이게 무슨 책을 읽은 느낌인가, 싶었다가도 책의 서문에 그가 남긴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길'이라는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 사실 B급 좌파 김규항에 대해 더 많이 알기보다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의 삶과 영성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그가 더 바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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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니클로만 팔리는가
_ 가와시마 고타로/오늘의책,2010-04-28 00:00:00

의류 브랜드에 대한 나의 무지는 엄청나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비싼 것인지, 심지어는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때는 이름을 잘못 읽어 직장동료들에게 웃음을 산 적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씩 브랜드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유니클로는 최근까지 낯설었다. 자주 가는 종로에서 이 매장을 보았을 때도, 매일 다니는 출근길에서 보았을 때도 의류 브랜드라는 것 이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 신문기사에서 이 브랜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한때 한국도 이랜드 계열의 옷들이 중저가 시장을 휩쓴 적이 있다. 지오다노 등도 그런 계열의 하나였다. 그 당시 이런 브랜드 옷이 비싼 것인지, 국산인지, 얼마 정도인지 몰랐다. 당연히 옷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브랜드 이름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정도가 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브랜드의 이름이나 가치가 아니다. 그 브랜드의 성공이나 실패 등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할 뿐이다. 이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면서 하나의 브랜드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알려주는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유니클로 옷을 한 번도 산 적 없고, 매장 안으로 들어 입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불황 속에서 더욱 큰 성장을 이룬 이 브랜드의 실적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으면서도 플리스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나에게 한 해 2600만 장을 팔았다는 사실은 엄청난 실적이고, 어떤 것이기에 이런 실적을 이루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브랜드를 저자는 아홉 개 장으로 나누어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다루고, 그들의 세계를 하나씩 해부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각 장은 짧은 리포트 형식으로 나누어 가독성을 높이고, 유니클로의 세계로 발을 내딛게 만든다.

책을 읽기 전 관심을 가진 것은 이 브랜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인지 등이었다. 옷뿐만 아니라 의류 산업 전체에 무지한 나에게 외계어 같이 다가오는 순간도 많았지만 싶게 읽히면서 유니클로가 얼마나 대단한 기업인지 알게 했다. 그리고 정말 대단하게 다가온 것은 그들의 엄청난 성장 속도와 관리 방식이다. 한 명의 직장인으로 그들이 추구하고, 진행해온 영업은 모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관리와 공격적인 영업이었기에 이 엄청난 성장 등이 가능했다.

유니클로를 알게 되면서 눈길을 끈 몇몇 문장과 단어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거듭된 실패를 통해 완성을 이루는 것!”(21쪽) 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만 이 업체가 늘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많이 배웠고, 기존의 틀을 깨트렸는지 알 수 있다. 회장이 예전에 낸 책 제목이 <1승 9패>란 것도 이런 기업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두 번째는 “유니클로의 생산 시스템에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은 너무나 평범하다. 다만 ‘제대로’한다. 그것이 비밀이라면 비밀일지도 모른다.”(113쪽)란 문장 속에 있다. 상식이 특별한 것처럼 되고,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 ‘제대로’란 단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알려준다. 수많은 경영이론과 성공 등이 알려졌지만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간단한 것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정말 ‘제대로’한다면 성공은 더욱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은 “당장 오늘과 내일의 환경은 다르다. 느긋한 자세로 몇 년 뒤의 일을 고려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160쪽)이다. 급변하는 시장 속에서 현재의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얻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이들의 모습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접근방식에서도 많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제품의 단가를 낮추거나 질 등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로 반품 없는 전량 구매란 방식은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매장중심으로 점장의 의견이나 권한을 높인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당연한 것과 기초적인 것을 ‘제대로’하는 이상은 어느 정도의 성공은 분명하다.

가독성이 좋고, 빠르게 읽히고 재미있다. 하지만 의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고, 일본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면 불친절한 편집 방식은 아쉽다. 사진 한 장 없고, 주석도 절대 부족해 당장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물론 이런 사항들이 유니클로의 성공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심하게 매일 그냥 지나가던 그 매장과 광고판들이 이제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 written by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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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 길
_ 장 이브 그레그와르 (지은이) | 이재형 (옮긴이)/소동 ,2009-06-25 00:00:00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때는 끝까지 다 온 것이다.
우리 뒤에 아무것도 없다면 앞에 시작이 놓여있는 것이다.
-칼 샌드버그


무신론자인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여행서 <부엔 까미노:산티아고로 가는 아홉갈래 길>(이하 ‘부엔 까미노‘)를 읽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멈춰버린 내 삶을 진행시키고 싶다는 소망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선 ‘부엔 카미노’로 일반적으로 표기하는데 이 책은 에스파냐어의 발음을 그대로 살렸다. 부엔 카미노는 ‘좋은 여행이 되길’, 혹은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라는 뜻이라고.)


오직 야고보 성인을 숭배하고자, 그의 무덤이 안치된 곳으로 알려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대성당의 이름이다)에 가기 위해 많은 이들은 오늘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다고 한다. 도보로 짧게는 7일, 길게는 50일이 걸리는 그 긴 여정은 무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수많은 순례자들의 행렬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야고보 성인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예수의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인물이다.)


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그 모습을 달리하고, 결국 뭐든지 ‘빠르게, 빠르게!’를 외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걷는다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시간낭비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런데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발에 물집이 잡히고 근육통으로 온 몸이 고통에 사로잡혀도 고집스레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또 걷는다.
‘걷는다.’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단순하게는 어떤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혹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행위를 뜻한다. 반면 ‘걷는다’에 우리의 삶을 대입해보면 하나의 단어로도, 문장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삶의 진실 혹은, 진리가 이 순박한 동사 안에 숨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멈춰버린 삶.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편집증환자처럼 ‘걷는다’는 행위와 의미에 집착했다. 아니,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난 걷고 싶다는 참으로 작지만 이루기 힘든 꿈에 발버둥치고 있었다. 


<부엔 까미노>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23개의 순례길(에스파냐 15개, 프랑스 7개, 포르투칼 1개) 중, 아홉 길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면서 저널리스트 장 이브 그레그와르는 15년 동안 자신이 직접 걷고 만난, 르퓌길, 프랑스길, 파리와 투르길, 브르타뉴 순례길, 북쪽 해안길, 베즐레 순례길, 아를 순례길, 은의 길, 피니스트레 곶 순례길 등의 풍광과 그 길을 걷는 페레그리노(순례자)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진들과 친절한 말투의 글로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저자는 비종교인일지라도 이 순례길에 오름으로써 모든 이가 인생의 순례자가 된다고 말한다. 단지 걷는다는 행위만으로 한 개인의 일상이 상징적 혹은 신화적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게 나에겐 현실성이 없는 말로 들렸다. 그런데 순례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투박하지만 순박한 인상을 갖고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들의 사진을 마주하면서, 이 순례길을 내가 지금 진짜로 걷고 있다는 기시감에 사로 잡혔다.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걷는다’는 의미와 동일시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과 건축물의 이름은 낯설기만 하고, 번역의 난잡함으로 인해 저자의 말은 딱히 가슴을 울리지 않는데도,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 속에 뻗어있는 순례길, 그 자체만으로도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번잡한 마음은 단순해졌다. 오직 걷고, 숨 쉬고, 사색하는 것만이 전부인 그 길 위에서 느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으며, 내가 나를 만나는 영성의 순간을 경험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순례길의 육체적 시련은 자기 자신과의 재회를 준비하는 통과의례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나는 순례길을 책을 통해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옭아매는 과거의 기억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느꼈고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기분을 만끽했다. 여행의 목적이 타인들과의 만남뿐 아니라 자신과 만나 관계를 심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건 느림이라고 말한 누군가의 말이 나에게도 해당하는 진실임을 알았다.


이 허구 속의 여행은 놀랍게도 나의 갇힌 세계관을 열어주었고, 사진 속의 풍경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닌 나의 오감을 깨우는 실체적 지리로 탈바꿈했다. 그러면서 허구의 여행이 완성되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안겨줬다. 나를 사로잡는 정적과 평정에 주의를 기울이니, 저자말대로 여행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편력遍歷임을 깨달았다.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도보여행자로 떠났다가 순례자로 돌아온다. 순례길 걷기란 시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감각과 세계를 일거에 뒤바꿔놓는다.”




23개의 순례길 중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여행자는 페레그리노(순례자)가 되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피니스테레 곶을 향해 다시 3일을 더 걸어간다. 세상의 끝에서 사람들은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낡아버린 옷가지를 불에 태우고 자신이 있던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과 후는 분명 다를 것이다. 느림의 시간을 알아버린 육체는 일상의 치열함 속에서도 오롯이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여유를 본능적으로 누릴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나는 비롯, 순례길을 소개한 글과 사진으로만 허구의 여행을 떠났지만 멈춰버린 나의 삶이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했다. 읽는 것만으로도 이런 감성에 젖어들고 깨달음을 얻었을 정도니, 실제로 저 길을 걷는다면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새로운 삶의 시작점에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해 본다. 떠나고 싶다. 나 홀로 그곳으로. ‘부엔 카미노’를 외치며.

불청객을 만나면 그저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라.
인간은 혼자일 때, 비로소 생각이 맑아진다.
-폴 테루

P.S. 
만약 내가 순례길을 여행한다면 빈센트 반 고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아를 순례길(툴루즈 근처에 고흐에게 영감을 준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다고)을 걷고 싶다. 아를 순례길은 프랑스에시 시작하는 순례길 중 하나로 아를에서 출발, 몽펠리에와 툴루즈, 울로롱을 통과해서 피레네 산맥의 송포르 고개를 넘어 에스파냐(스페인)의 아라곤 강 계곡을 따라가다가 푸엔테라레이나에서 끝난다. 프랑스 쪽 코스만 745킬로미터에 달하며 도보로 30일 정도가 소요된다. 에스파냐 쪽은 160킬로미터로 산티아고까지 일주일 정도가 걸려, 아를에서 총 도보로 37일 정도 걸린다.


- written by 빨강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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