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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2010.07.22 01:54

못난 것도 힘이 된다
_ 이상석 지음 | 박재동 그림/양철북,2010-04-14 00:00:00

 



지금 생각해도 너무, 지나치게 모범적이었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은 지나치게 ‘틀’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는 순간, 도시를 뛰쳐나와 시골에 집짓고 살림을 차린 뒤 느끼는 해방감이 얼마나 큰지 아마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모를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깊숙이 머릿속에 박혀 잊어버리지도 않고 있다. 당시 선도부활동을 하던 나는 규율을 단속하는 위치에서 자신의 몸가짐을 각별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순종했다.

1학년 때 명찰한번 안 달고 왔다가 선도부실로 끌려가서 맛보았던 폭력과 위압의 분위기는 내가 ‘당사자’가 이후에도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를 지배해왔다. 당시 폭력의 일상화는 선후배간 뿐만 아니라 선생과 학생들 사이에도 만연했다. 집에서까지 폭력에 노출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런 순종의 분위기 속에서 어느 날 찾아온 일탈의 상황이 나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같은 반 날라리로 소문난 급우가 미팅을 주선했는데 나갈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꼭 나야할 것은 없었다. 그 친구는 내가 ‘대타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엔 대학을 목표로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해야 한다고 믿는 순진함에 작은 일탈도 큰 죄악처럼 느껴졌다. 순간의 본능. 승낙하고 말았다. 마음 한구석엔 미팅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있던 것이다. 점점 커지고  있어서 날짜가 다가올수록 두근거리는 마음은 더해져갔다.




전날 저녁엔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정도였는데 당일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 옆에서 혹시 내가 떨고 있는가 눈치 채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었다. 그 친구는 쉬는 시간에 나에게 와서 미팅이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눈치로는 대타가 들어선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알았다고 하고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당시의 깡으로는 미팅자리까지 가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병신, 쪼다. 그 창창한 젊음의 기운을 도대체 어디다 다 묻어버렸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반항의 계절에 한번씩은 해본다는 가출도 집 나가면 개고생이 뻔하다는 생각에 조용히 집과 학교를 오가는 생활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부모님이 말씀하신 것, 선생님 말씀은 지키는 것이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지도’만 좆으면 언젠가 성인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해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을 좆아 12년간을 남이 시킨 것만 하고 살았더니 정작 대학입학 후 풀어지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속고 살았던 것이다. 다들 과거에는 한 자락씩 일탈과 방황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정숙과 규율을 강조하고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가차 없이 폭력을 가했던 체육선생과 학생주임선생들의 과거는 어땠을까.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국어선생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점잖은 척 도덕을 강조하고 다니던 옆집아저씨의 ‘과거’가 궁금하다.

아니,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 사람치고 과거에 순종만 하고 살았던 사람은 흔하지 않다. 내가 어른이 되어 겪어보니 그렇다. 학생 때 모범생이 어른이 되어 모범적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오히려 ‘개과천선’형이 훨씬 솔직하고 인간적이다. 과거에 얼마나 방탕했는지 방황을 많이 했던지 지금 아이들의 고민과 솔직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그렇지 못하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벗어남, 비뚤어짐, 불복종의 ‘맛’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조언을 하며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내가 키우는 아들이 걱정이다. 조짐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네 살 어린아이가 말을 너무 잘 듣는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그만하라면 그만할 줄 안다. 벌써 어른 같다.




만화작가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기도 한 박재동화백과 책의 주인공격인 고등학교 국어, 이상석선생은 ‘불알친구’였단다.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마음껏 비뚤어질 테다라고 마음먹고 방황했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을 썼다. 방탕하고 비뚤어지고 반항하는 것을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책까지 냈을까. 그리고 시사만화씩이나 그렸다는 사람이 그 그림들을 그려서 책을 채우게 되었을까.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비뚤어진 채로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날 일상을 벗어난 경험들은 체계적이고 교육적인 일상보다 훨씬 풍부한 체험과 감성을 일깨운다. 봐라. 학교와 집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로만 배우던 세상과 직접 사회생활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못난 것도 힘이 된다. 아니, 못난 것이 바르고 예쁜 것보다 훨씬 힘이 있다.



- written by 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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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독서 지도안2010.07.19 21:02

영원히 사는 법 - 그림책은 내 친구 22
_ 콜린 톰슨 (지은이) | 이지원 (옮긴이)/논장,2010-04-10 00:00:00




<영원히 사는 법 - 논장>

 

이 책을 다 읽고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가 생각이 났다. 밤만 되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이 살아나와 자신들의 언어로 대화하고, 실제 역사처럼 싸우거나 한다. 박물관 관리인마저 늙고 힘든 노인에서 힘쎈 노인이 되니 신비한 상상속의 세계가 보여져서 아이들과 함께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이기에 <영원히 사는 법>책과 왠지 모른 비슷하게 매치되었다. 저녁에 도서관 문이 닫히면 마치 마법처럼 책장이 살아 움직이니 영화랑 조금은 비슷한 듯하다.

 

도서관의 책장은 살아나고, 책들 뒤쪽에서 문과 창문이 생겨나 불이 켜지고 책속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책장속에서 새로운 도시가 탄생한다. 오래전 사라진 책 <영원히 사는 법>의 존재를 알고 있는 피터는 브라이언과 함께 영원히 늙지 않는 책을 찾아 오랫동안 헤맨다. 책장 곳곳에 숨겨진 명작들의 제목들을 만날 수 있고, 숨바꼭질하듯 책장속에 숨겨진 듯한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방과 방사이를 모두 뒤지고, 지하실과 비밀책장까지 모두 찾아보았지만 일행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피터는 곧 늙은이 네명을 발견하고 분명 모를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빛바랜 책속으로 피터를 안내하고 <영원히 사는법-초보자를 위한>영생이라는 책을 내민다. 그토록 찾던 책을 찾지만 늙은 노인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불멸의 삶이 효과가 없나보다 생각하지만. 노인들은 영원한 아이에게 피터를 안내한다.

 




 피곤하고 핏기하나 없고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영원한 아이는 피터에게 책을 읽지 말것을 당부한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 절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영원한 아이는 책을 숨겼다고 말한다. 피터는 과연 영생의 책을 읽었을까 읽지 않았을까.

 

한권의 책에서 정말 수 많은 책세상을 본 듯하다. 책장속에 숨겨진 도시 곳곳의 모습을 보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운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랍속의 집, 책속에서 펼쳐지는 진풍경, 사다리, 기차, 악기, 자연, 동물들 책속에서 마치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책을 넘길 수가 없다. 책들의 제목 또한 원제목을 약간 변경을 해서 그런지 우숩고 어떤 책의 제목의 변형인지 저절로 찾아보게 된다.

 

진시황제가 영생의 삶을 원했지만 실제로 찾을 수 없었다. 책속의 피터는 찾았지만 그의 결정은 현명했다. 진시황제는 왜 그토록 영원의 삶을 원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영원의 아이 말처럼 살아있는 것이 절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을 텐데,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영원의 삶을 행복해주지는 않았을텐데... 영원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좋은 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허투루 적힌 책의 원제목들이 나열되어 있어서 호기심 많은 독자들을 위한 페이지를 실어 두었다. 못찾은 책들도 보이고, 쉽게 기억되는 책들도 있어서 책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어진다. 한권의 그림책으로 정말 멋진 세상으로 여행을 한듯하다.

 

<독후활동-초1>

 




아직 영원의 삶을 상상하기에는 너무 이른나이인듯하여 멋진 책표지를 한번 그려보기로 해봄.

 




<영원히 사는법>처럼 멋지고 신비한 표지는 아니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책들로 꾸며지고 아이들의 상상속에

담긴 한권의 표지가 탄생된듯하다. 현재는 칸이 많이 비어있지만, 다음에는 더 멋진 책장들로 아이들만의 책장을 그려넣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오랜시간 두고두고 찾아보며 보고 싶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 written by 건희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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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10.07.19 21:01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_ 마종기/비채,2010-05-11 00:00:00

시인 마종기는 나에게 낯설다. 학창시절 자주 만난 몇몇 시인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인들이 낯설기에 이상한 것은 아니다. 서점을 둘러보면서 그의 시집을 몇 번 마주했을지 모르지만 한 번도 사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의 시가 나쁘거나 지명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시에 대한 나의 앎이 부족하고, 한참 시집에 관심을 두었을 당시 미국에 거주했기에 대중적인 지면을 통해 만날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시작 에세이란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를 짓는 것과 에세이가 연결된 단어인데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을 펴고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책의 구성과 관계있다. 바로 자신의 시 50편을 먼저 보여주고, 그 시와 관련된 사연이나 의도를 에세이처럼 쓴 것이다. 이 구성을 처음 마주할 때 시보다 에세이에 먼저 눈길이 갔다. 쉽게 이해하지도 가슴으로 파고들지도 못한 시들이 그의 해설로 분명해진 것이다. 거기에 시와 관련된 수많은 사연들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여섯 꼭지로 나누고, 시간의 흐름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시를 읽다보면 그의 삶의 굴곡을 만나게 된다. 잘 다듬어진 시어 속에 숨겨진 삶은 결코 밝지만도 않고, 어둠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어느 곳에선 희망과 즐거움이 넘쳐난다. 현실을 담아낸 것도 보이고, 사연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한다. 시를 읽고,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시를 읽으면서 시에 젖어든다. 이렇게 젖은 마음은 날선 이성으로 가를 수 없다. 그런데 자꾸만 이성으로 시를 풀려고 하니 시의 재미와 즐거움이 묻혀버린다. 아쉽고 불쌍하고 아둔하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은 가슴 깊은 곳이 아려오거나 벅찬 감성이 밀려왔다. 특히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들에 대한 사연은 가슴 한켠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의 삶과 깊은 관찰과 애정이 만들어낸 시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캄보디아 여행에서 만난 무뚝뚝한 남자의 행동은 눈물샘을 자극했다. 앞에서 시인이 노래한 사랑이 남과 어울리지 못했던 남자의 행동 속에 그대로 옮겨지고 있었다. 비록 그 모양이나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할지라도 말이다.

시를 읽을 때면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나의 것으로 소화할 것인지 늘 고민한다. 이런 고민이 이번엔 거의 없다. 시인이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감상과 시인의 설명이 다른 경우가 빈번하다. 나의 내공이 얕고,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처음보다 뒤로 가면서 좀더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의 다양한 실험과 시어들이 주변 친구들도 쉽고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변한 탓이다. 시에 대해 잘 몰라 어떤 것이 좋은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미 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쉽게 읽히고 드러나는 의미들이 그 자유를 품어내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50편의 시도 좋지만 시집 한 권을 읽고 싶어진다. 주례사 평 같은 많은 시인들의 극찬은 이런 마음을 더욱 부채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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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_ 김규항/지승호/알마,2010-03-26 00:00:00

한때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단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아니 한때의 유행이었다기보다는 누군가 테스트를 해보고 블로그나 까페에 올리면 사람들이 나도 한번 해볼까,의 심리에 부응해 다들 한번씩은 정치성향뿐 아니라 심리테스트에 독서취향 테스트까지 온갖것을 해봤던 때가 있었다. 테스트의 신뢰도라기보다는 그냥 재밌고 신기해서 한번쯤은 해봤을 정치성향 테스트에서 나는 기울어진 왼쪽과 조금 떨어진 아래쪽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본의 권력과 달콤함을 알아버렸기에 자본제를 부정하고 싶지만 쉽게 부정할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교대상으로 나온 유명세를 탄 몇몇이들보다 내가 더 기울어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타인의 눈에 보이는 나는 좌파성향을 가진 자유주의자일수도 있겠구나 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뒤통수를 퍼억 치고는 내가 진보의 탈을 쓰고 개혁을 외치면서 체제유지를 더 공고히 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해보라고 한다. 스스로 B급 좌파라 일컫는 진보적 사회주의자 김규항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파악하라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 사실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려고만 했던 많은 문제들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정의에서 시작하여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나도 몰랐던 애매모호한 부분들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보여 오히려 깔끔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어 더 좋았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보편적인 잣대는 그 사회가 어떤 체제인가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수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보인 거죠. 한국은 다들 흔히 하는 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말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고요. 자본주의 체제에 찬성하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인 거죠. 물론 찬성하는데도 여러 층위와 방식이 있고 반대하는 데도 여러 층위와 방식이 있으니 보수라고 다 같은 보수가 아니고 진보라고 다 같은 진보는 아니겠죠. 그러나 큰 덩어리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이른바 절차적인 수준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거죠. 이런 상황에서 체제의 불안정함은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가. 그것은 체제안에 가짜 진보가 존재하는 겁니다.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지키는 세력입니다. 그들이 인민의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 가짜진보가 바로 개혁세력입니다.(136-138)

누군가에게는 그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들릴수도 있을 것이고, 굳이 그렇게 따져 묻는다는 것이 불편할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친구들에게 냉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인간적이고 감성적으로 마음이 가는 것과 이론적으로 냉철하게 명확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말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한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오해와 지탄을 받을 것인가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의 실제 삶의 모습이나 실천의 모습들, 말과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모습과 생활이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상향이 있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과정에 있을뿐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진보적 좌파인 김규항이라는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북한이 제대로 된 사회주의 나라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과연 남한 사람들이 비웃을 만한 사회인가'라는 생각은 들어요. 굶는 인민들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그 배경부터 살펴봐야겠죠. 북한은 일찌감치 공업화된 농법을 도입했는데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우방 국가들의 지원이 확 끊겨버리면서 농업 시스템 자체가 몰락했어요. 거기에다 홍수에 미국의 봉쇄 정책까지 겹친 겁니다. 중요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 살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게 아니라 함께 고난의 행군을 했다는 겁니다. 남한 사람들 같으면 어땠을까요?
이제 북한을 적으로만 규정하는 냉전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북한을 저 먼 발치에 두고 있으며 여러 사건들과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다시 북한이 적대시 되어가고 있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언젠가 철조망을 걷고 평화로이 서로 왕래하는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사실 이 인터뷰집에서 인용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다. 진보와 보수, 개혁, 좌파, 페미니즘, 문화, 영성, 미래세대의 교육 등 언급된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싶지만 그것보다 이 책을 한번 더 훑어보고 김규항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접어둔다. 이 책에서 언급된 주제들 중에서도 진보와 보수를 규정하는 기본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싶고, 특히 북한에 대한 시각과 미래세대를 책임지게 될 현재의 우리 청소년들의 삶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문제로 성찰하며 함께 생각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 한국의 아이들이 제대로 놀기는커녕 감옥의 수인들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것, 또 그렇게 생활한다는 건 지구상에서 한국 아이들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아이들을 그렇게 생활하게 하는 건 누군가? 이명박 정권과 그 일당인가? 그리고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좀 더 인간적이고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해주기 위해 그들과 싸우고 있나?
아이들을 그렇게 생활하게 하는 건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바로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이를 위해 자신들의 인생을 올인한다는 부모들이다.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고 이명박 정권의 시장주의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죽인다고 외치면서도, 그들의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우리들, 신자유주의 귀신에 영혼이 저당잡힌 우리들의 모습.(146)

자신은 비주류의 삶을 살았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것인지 안다는 이유로 아이만큼은 주류의 흐름에 맡기려고 하는 친구들의 말을 간혹 듣곤 한다. 하지만 그걸 뭐라 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김규항같은 좌파는 아니잖은가.
다만, 부모가 자신의 기준과 가치에 맞게 아이들에게 삶을 강요한다면 그건 지상최고의 독재일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가 저지르는 최고의 악행이 아닐까.


- 김규항의 인터뷰집이지만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이야기해버리게 된 것 같다. 이게 무슨 책을 읽은 느낌인가, 싶었다가도 책의 서문에 그가 남긴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길'이라는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 사실 B급 좌파 김규항에 대해 더 많이 알기보다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의 삶과 영성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그가 더 바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 written by 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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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7.19 20:57
파랑이 진다
_ 미야모토 테루 (지은이) | 서혜영 (옮긴이)/작가정신,2010-01-28 00:00:00

1982년, 일본에서 발간된 미야모토 테루의 청춘소설 <파랑이 진다>는 마치 빛바랜 사진 같은 소설이다. 누렇게 변한 사진 속에서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종종 아려한 향수와 미약하나마 가슴 저린 통증을 수반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나는 청춘일까?’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답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이른 봄날, 주인공 료헤이는 오사카 교외의 신설 사립대학교의 입학 접수창구 앞에서 입학신청을 놓고 망설인다. 그때 빨간색 코트를 입고 나타난 미모의 나쓰코를 만난다. 나쓰코에게 첫눈에 반한 료헤이는 그녀가 입학신청을 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입학을 결정한다. 이렇게 시작된 료헤이의 대학 4년간의 생활은 사랑, 이별, 우정, 죽음으로 무료한 듯 촘촘하게 이어진다.




주인공의 4년간의 대학생활을 우울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낸 <파랑이 진다>는 2가지의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68년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인 전공투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그런 시대적 상황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대학 테니스부 활동을 소설의 주요 스토리 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 시절, 이처럼 주인공은 동시대에 살짝 비껴간 대학 생활을 보낸다. 료헤이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가네코는 테니스부 주장으로서 테니스부의 발전에만 매달리고, 부유한 집안의 딸인 나쓰코는 오직 대학생활을 즐기는 일에만 매달린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테니스에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은 안자이는 집안 내력으로 이어져 온 정신병을 이기지 못해 자살, 곧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왕도가 아닌 패도의 방법을 써서라도 테니스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하는 구다니와의 우정. 싱어송라이터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야쿠자 여자와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걸리버의 겁 없는 사랑과 무모한 용기. 이렇듯 등장인물 모두 전공투 시절의 그 치열함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다. 


나쓰코를 향한 길고 긴 대학 4년간의 짝사랑과 테니스부 친구들과의 우정은 료헤이의 청춘을 우리의 청춘과 포개어지게 만든다. 나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류헤이와 그의 친구들은 꿈과 희망을 쫓기보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애써 회피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류헤이의 말처럼 대학 4년간의 생활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 내던져지기 전에, 청춘만이 누릴 수 있는 인생의 휴가 기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의 청춘은 소설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다.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빚어지는 사랑의 아픔과 이별, 그리고 친구의 자살 등은 미래의 꿈과 희망마저 빛바래게 만들 뿐이다. 이념을 중요시하는 40년 전의 그때든, 경제 불황 속에서 취업만이 대학생활의 목표가 되는 지금이든 간에, 어떤 시대고 갓 20살을 넘은 이 유약한 청춘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때문에 청춘은 언제나 ‘실패’를 담보로 하고 있다. 실상 그들의 청춘은 인생의 휴가기간이 아닌, 실패에 덤덤해지는 법을 배우는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것이다.


무승부가 없는 테니스 경기처럼 이 사회는 오직 성공과 실패, 승자와 패자만을 가린다. 그 냉정하고 잔혹한 잣대를 극렬하게 부정하고 싶어도, 황량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처럼 우리는 참고 견디는 길을 선택한다. 사실 우리는 안다. 그 인내의 끝에 성공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애써 그 잔혹한 삶의 진실을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류헤이를 통해 지나간 청춘을 뒤돌아보았다.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리워도 이리 가슴 저리게 떠오르는 것은 잔혹하리만치 거듭된 실패의 기억이 선명해서다. 언제나 열에 들떠있던 청춘을 오래전에 떠나보냈것만, 지금의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실패하거나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설사 아직 마음만은 청춘이라며 꿈을 좇아가고 있더라도 그것 역시 실패라는 한 챕터로 막을 내릴 것이다. 대신 우리가 꼭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실패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에 다시 서는 것뿐이다.


<파랑이 진다>는 청춘의 우울한 실패의 기억을 적어내린 사적 리얼리즘 소설이다. 미야모토 테루는 이 소설을 통해 청춘은 현실에 치여 청춘의 그 푸른색을 잃어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30년 전에 써진 작가의 생각에 이만치 공감하는 것은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의 영향도 크겠지만 한편으론, 잔혹한 청춘의 시기를 지금도 보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에서 기인한다. 아직 나는 지나간 것이 청춘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나보다.


낡고 좁은 중국식당의 다락방에서 류헤이의 친구 걸리버는 꿈을 잃어버리고 하루하루를 부유하듯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인간낙타’로 상징해 노래한다. 걸리버의 노래가 진짜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의 내 모습이 제발 인간낙타가 아니길, 그 짙고 푸른 색깔은 바래지었을지언정 청춘의 유예기간을 다 소진한 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청춘이 지나갔음을 인정하는 것임을. 자조 섞인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번져갔다. 


희미해진 파랑색 위에 이제 나는 무슨 색깔을 덧칠해야 할까. 파랑처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삶의 빛깔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서 있으면서도 발을 내딛기가 망설여진다.



- written by 빨강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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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7.19 02:06
은교
_ 박범신 (지은이)/문학동네,2010-04-06 00:00:00

네가 <은교>를 알아? 

종이로 만든 책이 아직도 건재한가 보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작가 박범신 선생께서 언제부턴가 당신의 불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신 것을.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뿐 이게 뭐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한다는 작가들이 그렇듯 일단 자기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으니 이 작품도 곧 책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꼭 봐야한다면 책으로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연재물을 꼼꼼히 챙겨 볼만큼 부지런 하지도 않으며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도 그다지 편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종이로 만든 책은 언제나 건재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원래의 제목 '살인 당나귀'가 아닌 <은교>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난 예전의 제목 보다 지금의 제목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되었다.  


솔직히 박범신 작가는(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작품은)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적잖이 많이 들어왔던 이름이지만 여간해서 선생의 작품은 나의 손에 들려지기를 한사코 거부해 왔었다. 왜 그랬을까? 건방지게도 사춘기 그 어린 마음에 선생은 그냥 사랑 이야기나 쓰는 통속 작가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시절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나도 한때는 글 써서 돈 버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지망생이라면 문학을 대하는 편견없이 진지하게 남의 작품을 대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난 그래서 지금까지 그 죄를 속하느라 작가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람들을 모처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은교>를 읽고 있었던 중이라 입이 간질거려 도저히 이것을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야, 늬들 <은교> 꼭 읽어라. 그거 읽으면 우리 싸부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 발전시켜 나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같이 동문 중의 하나가 거 내용이 뭡니까? 한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끼듯 그런 사람 파고다 공원가면 많습니다. 그러면서 냉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무식한 넘. 탑골 공원이지 파고다 공원이 뭐냐? 그래. 넌 그러고 살다가 죽어라. 니가 <은교>를 알아?' 좀 아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세상을 달관한 건지 아니면 열등감과 우월감을 교차시키는 건지 매사 아는 척,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하는 주의라 만나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사회 현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문학에 대해 말했으니 말이다. 그래놓고 작가가 되겠다니 혀가 절로 차졌다.(참고로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단다.)  


그런데 돌아켜 보면 그나 나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은교>를 몰랐을 때 그 보다 나은 태도를 보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솔직히 이 작품의 프롤로그를 읽을 때까지도 탑골 공원의 어느 변태 노인에 관한 연상을 쉬 지워버리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 보단 인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자세가 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 그 야성과 이성에 관하여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이적요 시인의 또 다른 분신이 결국 서지우 작가라는 것이다. 이적요 시인에게도 서지우 같은 동물적 본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지우를 향한 불타는 증오는 기실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커져갔고 결국 파멸로 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요 시인이 은교에게 보이는 태도나 행동은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측면(페미니즘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한)까지 포용하고 있는 반면, 서지우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동물적이며 권위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 하나에 다 들어있을진대 그것을 인정하고 융합하고 화해시키기 보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이렇게 대립하고 융화하면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적요는 왜 자신 안의 동물적 본능을 죽여 가면서까지 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가 인용했던 대로,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파스칼) 분별없는 광기(셰익스피어)일 뿐인가?


이적요 VS 서지우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사랑의 방식이 서지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서지우가 이적요의 적대자로서 이적요와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더 옳게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지우는 이적요를 힘도 없으면서 음욕으로만 가득찬 노인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당위를 위해 은교에게 설득하려 하려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은교의 눈엔 오히려 이적요가 더 옳고 건강하며 그에 비해 서지우가 오히려 변태적이며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 대한 평가는 같은 남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하는 것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지우는 은교의 평가를 무효화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다 덫에 걸리고 만다. 또한 서지우가 결정적인 잘못은 인간의 정욕과 사랑을 한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체가 노화되면 정력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기엔 서지우는 아직도 미숙했다.  노인에게 정욕이 없을 거라는 건 이 이야기의 방식으로 보자면 덮어 씌우기의 원죄일 뿐이다. 서지우도 그렇게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적요처럼 노인이 될 것인데 그땐 자신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에 대한 황금률 중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거기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것은 도통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적요 노인은 피그말리온의 원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과 실제 사랑을 나누다가 죽어버리고만 피그말리온. 그것이 오늘 날 교육 이론이나 정신분석학 이론에 적용이 되곤 하지만 그 보단 이 사랑의 공식을 정의할 때 쓰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은교는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그늘진 평범한 아이로 보인다. 다만 그녀가 가진 특수한 무엇이 이적요의 뇌관을 건드렸을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사랑한 건 은교 자신이라기 보단 은교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지 않은가? 과학적으로 보자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을 넘지 못한다는데(이런 정의는 또 얼마나 삭막한가?) 그것의 유무는 대상 그 자체에 있기 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콩깍지에 있고 보면 말이다. 또한 콩깍지 하나의 무게는 과학적으로 얼마나 나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무한대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런데 그런 말도 있다. 정말 너무 사랑하면 대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 즉 말하자면 이적요가 은교를 갖지 않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랬을 때 은교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보호해 줬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고 끌어 당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서지우에 의해 짓밟혔다. 내가 가진 꽃이 꺾여지고 짓밟혔다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더구나 이적요도 남자일진데 말이다. 여자 하나로 인해 어제까지 아군이 오늘은 적군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은교가 없었더라면 이적요와 서지우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알 속에서 잘 살았겠지? 결국 인간의 평화는 어떤 상황 또 누군가에 의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소멸 또는 불멸            


가끔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 보통은 사랑 때문에 살 생각을 하지 죽을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것도 다 살아있는 증거고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드물게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말이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일려고 작심했을 때 그는 저 말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이 어떻게 될지? 은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행했고 서지우는 죽었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건 꼭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인 건 아니지만 결국 그의 증오가 서지우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죽어갔다.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서지우의 죽음은 이적요의 육체성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소멸되지만 그의 사랑과 원죄는 불멸로 남은 것이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생기를 주지만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으면 사랑이 옆에 있어도 그것이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적요는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만한 사랑을 했다면 글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끝내 울어버린 소설 '은교'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다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내 작가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만을 내심 열심히 쫓다 결국 한방  맞았다. 서지우는 자기 눈에 서린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사고로 죽었지만, 나는 죽어가는 이적요가 은교를 그리워 하는 그 장면에서 시야가 흐려져 계속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나에겐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나의 독서란 무지한 지성을 깨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읽어왔을 뿐인데 그래서 책이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에 쉬 동의하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책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생의 자작시로 보이는 '빈들'이란 시를 대했을 때다. 


사랑을 믿지 않으면 누가 아침 이슬에게 경배하겠는가


고꾸라지고 베이고 허물어져도 청노루 눈빛


그 아침빛이 너를 통과해와 세계의 구석방


내 안에 꽃초롱으로 둥지를 튼다 새는 날마다


저녁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직 모른다


저기 자갈투성이 해안선 끝나는 곳에


어떤 아우성들이 또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는지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중에서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난 갑자기 오늘 날 왜 변태 노인이 그렇게도 문제가 되는 걸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몸은 늙어가는데 그에 따라 정신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사랑의 능력을 섹스의 능력과 동일시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정력은 조금도 소진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 하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재대로된 사랑은 없거나 사랑은 다 변태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인지 그것을 말하려 했던 적이 있었는가? 플라토닉. 사랑은 성교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적요는 말해주는 듯도 하다. 문제는 사랑을 허리 아랫쪽으로만 몰고 갔던 이 사회가 더 변태적인 것이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은교       


책의 말미를 향할수록 내가 만약 Q 변호사였다면 과연 은교에게 이적요의 노트를 읽어 보라고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첫번 째 드는 생각은 나는 은교가 그 노트를 읽지 않게되길 바랬다. 왜냐하면 은교가 이적요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다른 사랑을 못하고 평생 갇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우리 시대 사랑이란 다 고만고만한 물물교환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발화시킨 사랑이 어디 흔하냐 말이다. 나를 위해 그가 그렇게 해 줬다면 어찌 다른 상대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은교는 그 한 사랑만 보기엔 너무 젊다. 필시 그 노트는 은교에겐 판도라의 상자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나중에 드는 생각은 우리의 세대가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세대라고 보는가? 하지만 은교만큼은 진짜 사랑이 있었다는 걸 알지 않겠는가? 사랑도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은교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그녀 몫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적요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학대했다기 보단 육체에 갇히는 것이 싫어 그 나름의 발화 의식으로 자신을 혹사시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 시대의 사랑을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적요와 박범신       

소설은 어느 만큼의 진실과 허구를 잘 융합시킨 문화상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말 17세의 소녀와 사랑을 하고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첫 작품을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많은 부분 이적요에게서 선생의 데자뷰를 느꼈다. 특히 이적요를 빌어 우리나라 문단을 비판한 것과 그리고 이적요를 시인으로 등장시킬 만큼 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적요의 대쪽 같은 캐릭터도 어느만큼은 선생의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그만큼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사족으로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나니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몇 안 되는 소설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그나마 썼던 나의 글들이 허접하다 못해 쓰레기 같이 느껴져 한숨만 더욱 깊어졌다.   

  - written by stella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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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니클로만 팔리는가
_ 가와시마 고타로/오늘의책,2010-04-28 00:00:00

의류 브랜드에 대한 나의 무지는 엄청나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비싼 것인지, 심지어는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때는 이름을 잘못 읽어 직장동료들에게 웃음을 산 적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씩 브랜드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유니클로는 최근까지 낯설었다. 자주 가는 종로에서 이 매장을 보았을 때도, 매일 다니는 출근길에서 보았을 때도 의류 브랜드라는 것 이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 신문기사에서 이 브랜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한때 한국도 이랜드 계열의 옷들이 중저가 시장을 휩쓴 적이 있다. 지오다노 등도 그런 계열의 하나였다. 그 당시 이런 브랜드 옷이 비싼 것인지, 국산인지, 얼마 정도인지 몰랐다. 당연히 옷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브랜드 이름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정도가 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브랜드의 이름이나 가치가 아니다. 그 브랜드의 성공이나 실패 등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할 뿐이다. 이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면서 하나의 브랜드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알려주는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유니클로 옷을 한 번도 산 적 없고, 매장 안으로 들어 입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불황 속에서 더욱 큰 성장을 이룬 이 브랜드의 실적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으면서도 플리스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나에게 한 해 2600만 장을 팔았다는 사실은 엄청난 실적이고, 어떤 것이기에 이런 실적을 이루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브랜드를 저자는 아홉 개 장으로 나누어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다루고, 그들의 세계를 하나씩 해부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각 장은 짧은 리포트 형식으로 나누어 가독성을 높이고, 유니클로의 세계로 발을 내딛게 만든다.

책을 읽기 전 관심을 가진 것은 이 브랜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인지 등이었다. 옷뿐만 아니라 의류 산업 전체에 무지한 나에게 외계어 같이 다가오는 순간도 많았지만 싶게 읽히면서 유니클로가 얼마나 대단한 기업인지 알게 했다. 그리고 정말 대단하게 다가온 것은 그들의 엄청난 성장 속도와 관리 방식이다. 한 명의 직장인으로 그들이 추구하고, 진행해온 영업은 모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관리와 공격적인 영업이었기에 이 엄청난 성장 등이 가능했다.

유니클로를 알게 되면서 눈길을 끈 몇몇 문장과 단어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거듭된 실패를 통해 완성을 이루는 것!”(21쪽) 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만 이 업체가 늘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많이 배웠고, 기존의 틀을 깨트렸는지 알 수 있다. 회장이 예전에 낸 책 제목이 <1승 9패>란 것도 이런 기업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두 번째는 “유니클로의 생산 시스템에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은 너무나 평범하다. 다만 ‘제대로’한다. 그것이 비밀이라면 비밀일지도 모른다.”(113쪽)란 문장 속에 있다. 상식이 특별한 것처럼 되고,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 ‘제대로’란 단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알려준다. 수많은 경영이론과 성공 등이 알려졌지만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간단한 것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정말 ‘제대로’한다면 성공은 더욱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은 “당장 오늘과 내일의 환경은 다르다. 느긋한 자세로 몇 년 뒤의 일을 고려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160쪽)이다. 급변하는 시장 속에서 현재의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얻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이들의 모습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접근방식에서도 많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제품의 단가를 낮추거나 질 등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로 반품 없는 전량 구매란 방식은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매장중심으로 점장의 의견이나 권한을 높인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당연한 것과 기초적인 것을 ‘제대로’하는 이상은 어느 정도의 성공은 분명하다.

가독성이 좋고, 빠르게 읽히고 재미있다. 하지만 의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고, 일본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면 불친절한 편집 방식은 아쉽다. 사진 한 장 없고, 주석도 절대 부족해 당장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물론 이런 사항들이 유니클로의 성공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심하게 매일 그냥 지나가던 그 매장과 광고판들이 이제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 written by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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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베스트서평2010.07.18 04:43

불편한 경제학
_ 세일러/위즈덤하우스,2010-04-07 00:00:00


매일같이 돈을 벌기 위해 힘겹게 살면서도 돈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힘겹다.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현재의 경제 상황을 정확히 알기 위해 우선 몇 가지에 대한 기본개념부터 시작해 보자. 빚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빚으로 아파트를 구입하든 토지를 구입하든 어찌되었든 최종적으로 빚은 갚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내 수입으로 그 빚에 대한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의 해결책은 두가지 뿐이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파산을 당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통해 더 큰 빚으로 빚을 막으면 된다. 전자인 파산은 당사자에겐 괴롭지만 상식적으로 정상적인 방법이다. 이에반해 빚을 더 큰 빚으로 막는 후자는 일시적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는한 최종적으로 전자와 같이 파산할 수밖에 없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전자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라는 것일 뿐이다.

그럼 좀더 규모를 확장해 통화에 대해 살펴보자. 통화에는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으로 공급하는 본원통화(지급준비금+현금통화)와 시중은행이 개인에게 대출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신용통화로 구성된다. 여기서 통화량이라고 하는 것은 현금통화와 신용통화의 합을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 현실에서 통용되는 본원통화와 신용통화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통화량의 개념을 좁게 설정한다면 1:25, 넓게 설정할 경우에는 1:40정도가 된다고 한다. 한국은행이 시중은행으로 1조를 공급할 경우 시중은행은 이 돈을 대출을 통해 시중으로 25조에서 40조를 공급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중앙은행은 통화량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과 한 나라의 통화량은 대부분 시중은행의 대출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때 통화량이 늘어나면 인플레이션, 줄어들면 디플레이션, 급격히 늘어나면 하이퍼인플레이션, 급격히 줄어들면 공황이다.

현실적으로 경제는 왜 계속해서 성장하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불황을 맞는 것일까? 경제가 원할히 성장을 하려면 공급이 늘어나는 만큼 수요도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장에 따른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 져야만 한다. 근데 현실적으로 이 같은 과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부격차로 인해 전체수요가 부족해 진다는데 있다. 한달에 100만원 버는 사람은 대부분을 소비하지만 1000만원 버는 사람은 모두 소비하지 못할뿐더러 저축까지 한다. 한달에 100만원 버는 열사람이 1000만원을 모두 소비하는 것과 비교해 보라. 빈부격차로 인한 내수부진이 바로 불황의 근본원인인 것이다. 수출위주의 대기업은 돈을 쌓아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소기업과 국민이 계속해서 가난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현재의 경제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해 예측해보자. 미국이 붕괴한 이유는 막대한 빚 때문이다. 소득에 비해 많은 소비를 했고, 그 소비는 빚에 의한 것이였다. 2008년 미국의 전체 빚은 GDP대비 370%였다.(대공황시 230%) 그런데 리먼사태로 금융시장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빚이라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넘어버리면 파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통화량 창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중은행은 대출을 중단하게 됐으며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대부분의 통화는 쌓여만 가고 있다. 시중에 돈줄이 마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빚에서 벗어나기 위해 빚을 갚거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대출을 멈춘 행위들이 전체적인 통화량을 줄어들게 했다. 이로인해 전체소비수요는 계속해서 급감하게 되어 2008년을 기점으로 디플레이션에 돌입해 있는 것이 현재의 미국인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까? 최근의 분위기는 막대한 재정적자로 미국 달러의 가치는 폭락해 기축통화로써의 지위를 내놓게 되며 미국 국채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이를 무기삼아 다음 패권국으로 등극할것으로 보고있다.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일까? 분명 세계경제는 침체상황인데도 중국은 지금도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수출의존형 경제체제란 것이다. 실제 그동안 이루어진 대부분의 성장은 미국인들의 과소비에 의존해왔다.(세계무역적자의 60%) 그러던 것이 2008년을 기점으로 변했다. 미국인들의 소비는 줄어들었으며 저축률마저 증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수출을 받아줄곳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높은 성장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내수의 규모 역시 미국의 1/5수준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일까?

소득이 10% 늘어날 때 소비를 10% 늘리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소득이 10% 줄어들었는데도 소비를 그대로 늘리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전체 통화량은 소득의 감소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에반해 중국의 통화량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처음으로 돌아가 빚이 한계에 이르면 붕괴하든지 더 큰 빚을 끌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자라면 불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상황으로의 진입이고, 후자라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미국은 정상적인 방법을 택한반면 중국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인 상황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현재 견디기 힘든 디플레이션 상황을 뒤로 계속해서 미루고 있는 한중일의 붕괴가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가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좀더 이해를 돕기위해 한중일의 상황으로 들어가보자. 중국과 한국은 수출의존형 경제인데도 작년 경제성장률이 특이하게 좋았다. 그 이유는 주택시장의 거품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같은 경우 수출 실적이 높은 기업에게 금융지원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원을 받기 위해 기업은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수출실적을 올린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지원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해 큰 돈을 벌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동산 시장이 냉각되어도 그 물량을 대부분 지방정부가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기업은 부동산 투기로 돈 벌어좋고, 은행은 기업이 파산해도 담보물로 대출금 회수에 문제 없어좋고, 중국 정부는 부동산 투기로 인한 높은 경제성장율로 불안정한 체제를 유지할수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모두가 좋은 상황인 것이다. 윤전기로 돈을 찍어대고 있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바로 중국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을 보면 한국과 다른 듯 보이지만, 근본적인 체계는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왜 청약율이 0%인 상황에서도 분양을 하며, 팔리지도 않는 아파트가 계속해서 쌓여만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분양가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것일까? 더구나 다른 나라는 경기 침체로 물가가 하락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물가는 하락하기는커녕 올라가고 있다. 빚으로 빚을 막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는 중국처럼 한국역시 전체적인 통화량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인 것이다. 더구나 소비수요를 늘여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정책도 수출중심의 대기업 위주로 일관하고 있다. 1991년 거품붕괴후 소비수요 창출이 아닌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정책으로 20년 동안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전처를 그대로 밟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20년이 30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아시아의 붕괴로 촉발될 대공황은 이전 대공황보다 그 위력이 상당히 클것으로 저자는 예상한다. 왜냐하면 1929년의 대공황은 그 이전 부동산시장의 붕괴뒤 일어난 주식시장만의 거품붕괴였다. 그러나 앞으로 있을 대공황은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이 함께 붕괴하는 구조이다. 평균적으로 GDP와 비교했을때 주식시장은 비슷한 규모이지만, 부동산시장은 약3배(한국은 4.8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같은 경우 IMF때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장기간의 경기침체가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부의 80%를 부동산시장이 점유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붕괴되었을 때의 그 위력을 상상해보라. 투기목적으로 막대한 대출금을 안고 구입한 아파트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 같은 상황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몇%나 되겠는가. 그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디플레이션의 경험도 없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가지이다.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땀흘려 열심히 일해 차근차근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는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비난받는 사회는 분명 비정상적인 사회이다. 빚으로 구입한 아파트로 다른 사람에게 빚을 떠넘겨 수익을 얻는 투기 역시 비정상이다. 불황이 비정상이 아니라 거품이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정상인 상황을 정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는 것이다. 빚은 갚아야 한다는 원칙, 소득보다 큰 소비는 비정상이라는 원칙,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선 국민을 위한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원칙. 이 책의 분량이 600페이지가 넘는 이유도 이 원칙을 기준으로 명확한 통계수치를 통해 ‘왜’ 그런것인지를 이해하기 쉽도록 정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읽은 경제관련 책중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중요한 환율과 해결책은 직접 읽어보고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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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7.18 04:41
화폐전쟁 2 - 금권천하
_ 쑹훙빙/랜 덤하우스코리아,2010-05-03 00:00:00

화폐전쟁 1권을 읽지 않았다. 1권이 상당히 많이 팔린 것으로 아는데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빌려 읽을 기회도 있었고, 살 기회도 있었는데 후배의 한 마디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 한 마디는 <황금>을 읽고 난 후 그 내용을 이야기하니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실 이런 두꺼운 경제서적을 잘 읽지 않을 때고(지금도 마찬가지다) 책 내용에 대해 몰랐을 때였다. 하지만 2권 금권천하가 나오고, 목차를 읽게 되면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호기심도 물론 작용을 하였지만 말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30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17개 금융가문 인맥 대해부’란 소개글이다. 이전에 음모론이나 반세계화 등을 다룬 책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록펠러 가문 등에 대한 실상을 어느 정도 읽은 적이 있지만 다른 가문에 대해서는 아주 단편적인 지식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도 음모론의 시각이 강하여 그 기원이나 성장이나 영향력 등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그 정도들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강했다. 이것은 주류 경제학을 전공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책에선 다른 금융가문들도 다루면서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권을 모두 읽은 후 1권의 목차를 보니 로스차일드 가문이 중심에 있다. 이번 책에서도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 중심에서 다른 가문들과 협력과 대립을 반복한다. 전작을 보지 않은 상태라 어떤 내용들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새롭게 다루어진 가문들을 보면서 그들의 힘과 영향력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와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 사실뿐만 아니라 저자의 추리에 의해 메워진 부분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가 풀어내는 논리는 분명하다. 이 금융가문들이 추구하는 것은 금권 즉 돈이란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많은 부분이 음모론의 시각을 지니고 있다. 주류경제학에서 벗어난 해석도 많은데 읽다보면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는 대목도 상당하다. 이런 대목들을 만나면 그 뒤에 숨겨진 진면목을 보게 되는데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양한 채널에서 이미 본 것이라 무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역사를 바탕으로 그 가문의 성장과 세계사를 연결하고 해석하였기에 흥미롭고 재미있으면서 새로운 시각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몇 가문을 제외하고 다른 가문들을 새롭게 만날 때는 세계의 숨겨진 실세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다루면서 국제 은행 가문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다. 이 도입부는 역사와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숨에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독일을 국제 은행 가문들의 발원지라고 말하고, 영국을 통한 금권 고지 선정을 보여주면서 프랑스의 혁명 등에 그들이 끼친 영향과 금권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이것은 다시 새롭게 부상하던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고, 전쟁 등으로 혼돈에 빠진 유럽의 역사를 국제 금융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특히 히틀러를 국제 금융 가문과 연결해서 분석한 부분은 악마 같은 히틀러의 이미지 넘어 존재하는 냉철하고 뛰어난 정치인의 모습을 부각시켜준다. 이것은 또 어떻게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고, 전쟁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알게 된 히틀러 정권과 관련된 사실들이 이것으로 많이 해결되어 좋았다.

유대계 국제 금융가문을 다루다보니 이스라엘 건국이 빠질 수 없다. 어느 정도 유대계가 힘을 발휘했을 것이란 것을 알았지만 어떤 식으로 행사했는지는 구체적이지 못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았고, 이 영향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비유대계 국제 금융가문을 다루게 되고, 이 둘의 대결과 협력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신용과 자본 흐름의 채널을 장악한 자가 게임 룰을 정한다는 사실이다!”(226쪽) 표현에서 이들이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에 가면 2024년 단일화페의 등장을 예언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최근에 알게 되었다. 예전에 마냥 단일화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이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도 알게 되면서 마냥 찬성할 수 없다. 이것은 이번 그리스 사태 등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분명히 존재하는 각 나라간의 경제력 격차 등이 하나의 단일 통화로 인해 조정될 여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달러를 다룬 부분에서 금괴를 사놓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역사 속에서 단 하나의 요인만이 전쟁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다. 하지만 그 중에서 돈은 가장 강력한 요인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 written by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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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07.18 04:40

체온 1도 올리면 면역력이 5배 높아진다
_ 이시하라 유미 (지은이) | 황미숙 (옮긴이)/예인(플루토북) ,2010-03-25 00:00:00

평소 건강이라고는 무심한 편인 나는 그나마 몇 년째 일주일에 세 번 꼬박하는 수영의 덕을 톡톡히 보고있는 셈이랄까.. 1년에 고작해야 한두 번 또는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고 지나가는 해도 있어 나름 건강한 체질이 아닐까 짐작해 보고는 한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흔히들 말하는 중년이 되고보니 건강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 요즘이다. 왠지 계절이 바뀌는 무렵이면 딱히 병이 난 것도 아닌데 무력감을 느끼고 의욕마저 사라지는 것같아 일상이 힘겹기만 하다.  

사실 가전제품도 시간이 지나면 A/S를 받으며 쓴다는데 사람인들 다르랴. 타고난 건강이 있다하더라도 벌써 몇십 년을 쓰기만 한 셈이니 보약이나 건강제품도 좀 먹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한두 해 전부터 더욱 나를 괴롭히고 있다. 안 먹자니 기운이 없는 것같고 먹자니 찜찜한 농약범벅 한약재가 또다른 딜레마로 나를 괴롭힌다. 

또 다시 계절이 바뀌고 있는 요즘 변함없는 딜레마로 나를 괴롭히고 있을 즈음 읽게된 이 책!
한마디로 'Oh, my body heat!'을 절로 외치게 한다.
나의 체온은 삼십여 년 전 초등학교 체력검사때이후 변함없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상체온인 36.5도라 철썩같이 믿고 있는 나에게 그것은 착각이며 이미 한물 간 기록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이제 나의 체온은 더이상 36.5도가 아니라 그에 못미치는 체온으로 살고 있다고 깨우쳐 주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일본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저자는 36.5도라는 인간의 체온이 이미 50년 전의 것에 불과하며, 현대인들은 저체온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해 대부분이 35.0도대의 저체온에 속한다고 한다. 또 저체온화 됨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고 각종 질병에 걸리기 쉬운 체질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감기, 폐렴, 천식과 아토피를 비롯해 암과 같은 질병은 물론 우울증이나 신경증 등의 정신질환도 바로 저체온화에 따른 면역력 감소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체온'에 대한 정의는 '몸속의 온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환경과 각종 외부 조건에 따라 다소 변하기도 한다. 하루 중에도 0.5~1도 이내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수치 상으로는 미미한 것 같아도 0.5도가 저하되면 열을 발생시키기 위해 몸이 떨리며, 1도가 저하되면 배설 장애나 알레르기가 발생하기도 한다. (본문 28쪽 그림을 참조하면 그렇다)

체온이라고 하면 딸아이를 키우며 갑작스레 열이 올라 긴장하던 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인데, 이 책은 고온만큼이나 아니면 더 심각한 저체온화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다. 하긴 한여름이 되어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선선한 실내에서 지내는 것이 낯선 풍경이 아니다. 심지어는 한여름에 에어컨바람때문에 감기에 걸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발병하면 외적인 현상만으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치료하려는 서양의학과 달리 병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더 중점을 두는 동양의학의 원리와 함께, 병자체보다는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석되는 이 책이 이채롭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가족의 평소 식습관을 생각해 보아도 저체온을 부르는 것들이 적지 않다. 특히, 항간에 떠도는(?) 무분별한 속설들을 무심히 따르며 생활하는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체온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니, 무심코 마시던 찬물조차도 조심스럽다. 보약이나 영양제로 고민하기에 앞서 먼저 내 몸의 체온부터 챙겨 건강을 지켜야겠다.
이제부터는 '안녕하세요?'를 대신해 '당신의 체온은 정상인가요?'를 건네야 할 것같은 생각이 들게하는 책이다.^^


- written by 재윤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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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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