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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2010.10.20 22:01
인연
_ 피천득 지음/샘터,2002-08-24 00:00:00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작은 축복이 아니다. (30p-봄)


  봄이 오면 마음이 들뜬다. 옷차림도 날아갈듯 화사하고 가벼워지고 풍경이 다채로워진다. 기숙사에서 학교로 걸어가면서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개나리, 진달래 이름을 불러보고 이름 모를 연분홍빛 꽃을 보며 마음이 가득 찬다. 이들이 가고 나면 형형색색의 철쭉이 피어 늦봄의 마지막 무도회를 연다. 올해는 꼭 가겠다 한 벗꽃축제에 가지 못해 내년을 기약하며 그렇게 여름을 맞는다. 내년에도, 후내년에도 벗꽃 축제엔 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봄은 온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다. (58p-너무 많다)


  이 세상에는 책이 정말 많다. 내 흥미를 자극하는 책은 그 일부일 뿐이지만 여전히 많다. 읽고 싶은 책을 적어놓은 목록은 내가 읽어나가는 것에 비해 무서운 속도로 길어진다. 한없이 불어나는 책 목록을 나는 통제할 수가 없다. 재미있어 보이는 책의 제목을 노트에 적어나갈 때 느끼는 환희를 포기하지 못해서일까. 다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서점으로, 도서관으로 책을 찾으러 간다. 너무 많다. 많아서 행복하다.


  나는 위대한 인물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와의 유사성이 너무나 없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그저 평범하되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166p-찰스 램)


 어릴 적 읽은 위인전은 참 재미있었다. 위인전 한 질을 2주만에 읽어 치울 정도로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읽고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꼭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내 미래 모습을 그려보며 즐거워했다. 오죽했으면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선생님께 유명한 사람이 되어 TV 프로그램에 나와 선생님 찾겠다고 했을까.
  스무살이 된 지금은 위인전, 전기는 커녕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릴적 그렸던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일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직 젊지 않은가? 그치만 나는 안다.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의 길에 평범을 넘어선 고난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릴 적 꿈에 기대어 그 길을 선택하기에는 현실을 너무 잘 알고있다. 위대한 사람들은 너무 인간미가 없어서 싫다지만 그건 변명이다. 모두가 그렇게 변명하고 있어서 암묵적인 동의가 된 것일 뿐. 누군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위인이 될 것이다. 스무 살 나는 누가 될 지 모르는 그 사람을 빛내줄 평민이 되어 줄 생각이다.


  그는 고희가 다 된 노학자이지만 때에 있어서는 젊은이보다 더 현대적이다. 늙어서 젊은이와 거리가 생김은 세대의 차가 아니라 늙기 전에 나를 잃음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176p-치옹)


  영원히청년으로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힘, 지금의 의욕, 지금의 호기심, 지금의 열정, 지금의 투지, 지금의 모든 것. 나이가 들면 그 나이에 걸맞는 지혜가 생긴다지만 나는 아직 싫다. 내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두렵다. 나이가 들면 내가 나를 읽고 헤매일 것만 같아 두렵고 무섭다.


  영국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고, 죄 있는 거짓말을 까만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칠색이 영롱한 무지개빛 거짓말일 것이다. (207p-이야기)


  아빠는 허풍이 심하다. 이야기에 풍을 얼마나 섞는지 거의 매일 아빠의 과장된 이야기를 듣는 우리집 세 여자 - 엄마, 나, 여동생 - 는 이제 적당히 걸러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아빠가 별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하고 의야해 했지만 가족 모임 할 때마다 어른들끼리 뻔한 거짓말을 주고 받으셨던 것, 다른 가족들과 모였을 때 아빠들끼리 열을 올리며 거의 '누가 누가 허풍 잘치나' 대회를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무지개빛 거짓말을 즐기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보편적인 정서인걸까?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주로 남자들이 풍을 많이 치고 과장된 자랑을 많이 하는 걸로 봐서 남자들의 특성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피천득씨도 남자였지 아마?


  미술품이나 역사적 유물은 오래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더욱 큰 문제다. 경주를 가 보고 마음 아파한 것이 어찌 나 뿐이랴. 정말 너무했다. (267p-문화재 보존)


  시멘트로 여기저기 발라놓은 석굴암이 빛의 속도로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밖에 되지 않은 내 눈에도 그건 흉해보였다. 신라 천년 고도의 세월을 간직한 곳이라는 위용에 걸맞게 유적의 수는 많이 보존되어 있었지만 보존되어있던 상태는 어린 내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단지 어떤 형태로든 오래 남기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옛날의 숨결을 느끼러 온 곳에서 현대의 삭막하고 무자비한 시멘트 덩이를 봐야 한다니. 하려면 좀 제대로 하자. 그 시대의 건축을 공부하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상상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느끼고 복원공사를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미래지향적인 자세가 요즘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과거를 잊지 않고 느끼러 온사람들에게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저 김빠지는 정도를 넘어선다. 마음이 아프다.

- written by ag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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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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