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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땐 이런책2009.11.04 15:17

대학교 입학한 신입생이 학교에서 정해준 원서로 공부하겠다는 의욕은 좋겠지만, 그래서는 영어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성적도 다른 친구들에게 엉망일 수밖에 없다.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에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어느 날 자택을 방문한 영국인에게 독일어의 탁월함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잘하는 일이오. (중략)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탈리어어와 에스파냐어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민족의 대표작들은 매끄러운 독일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아주 특수한 목적이 아닌 한 그들 언어를 힘들게 배우느라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지요. .. 또 한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본이 있으면 대단히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오.

 

괴테의 이야기처럼 번역은 한국어의 위상과 인문학의 발전을 높일 것이다. 번역에서 00년을 앞선 일본이 지금도 열심히 하는 반면에 우리에게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많다. 영어 사전 하면 존슨박사의 사전을 의미했던 때도 있었던 셰무엘 존슨은 셰익스피어 이후로 영국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 보즈웰이 쓴 전기는 전기 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 이 책은 우리말로 옮겨지지 않았다. 심리학의 대가인 알플레드 아들러의 책은 오랫동안 번역되어오지 않다가 한 독문과 교수가 번역했다. 10년 전 독일 유학시절 지독히도 괴롭히는 교수에 대한 고통을 잊게 해 준 아들러의 책 『인간이해』(일빛)가 번역되어,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문학텍스트를 선사한 셈이다. 이런 우연에 기대기에는 독자의 목마름이 많다.

 

숀 코네리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장미의 이름>를 본 사람이라면 중세 시대에 지식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고, 지

식을 통해 세계관이 바뀔 수 있고 또 종교에 대한 관점도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숀 코네리의 연기에만 빠지지 않고 꼼꼼히 본 사람이라면 수도사들이 지식을 독점할 수 있었던 배경을 발견(!)해낼 수 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아가는 르네상스 시기에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에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리스어뿐 만 아니라 아랍어 문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며 고대 학문을 배워나갔다. 고전문서를 접할 수 있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을 통해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고전 저작들이 라틴어로 유럽인들에게 번역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다. 번역작업을 통해 서양 사상의 뿌리중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되었다.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 박상익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활짝 피어난 그리스 과학과 철학이 그리스의 쇠퇴와 함께 로마에 수용될 때, 로마 지식층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그리스 과학과 철학은 서유럽 라틴 문명에 곧바로 계승되지 못했다. 한편, 아랍 세계는 8,9세기에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들의 과학과 철학을 발달시켰다.

 

번역이 현대 유럽 문명의 발전을 일으킨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이야기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번역은 새로운 문명이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교, 도교도 있었지만 번역을 통해 들어온 불교경전은 중국뿐 만 아니라, 한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의 나라들의 사상, 종교, 가치관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동 아시아 3국 중에서 제일 발 빠르게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정부에 번역 담당 기관을 둘 정도로 번역에 역점을 두었다. 서양사상의 용어가 없는 동양에서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새로운 개념어들이 만들어졌다. 개념어 뿐만 아니라, 번역도 일본 번역물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어를 우리말보다 더 잘 쓰는 지식인들의 영향이 크다.   

번역을 문화적 해석과정이라고 한다면, 일본문화의 필터를 거친 것을 번역하는 것은 원전을 왜곡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최근 들어서며 원어 번역이 늘어나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일본 중영본만 존재하다가 민음사에서 영한완역으로 2009년에서야 출간되었다. 중역본을 보던 독자들이 원어 완역본을 보는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번역물을 만나기 위해서는 좋은 번역자가 많아야 한다. 발 없는 양말처럼 번역자 없는 번역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출판사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번역가 이야기가 나왔다. 좋은 책이 있어 번역을 맡겨놨더니, 엉망으로 해왔더라. 그래서 편집장이 일부러 사전을 펼치고 심혈을 기울여 거의 다시 번역하는 노력을 기울여 책을 내놨더니, 그 해에 번역자가 번역부분 대상을 수상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편집과 번역은 과정이 결합되어 있다. 좋은 편집자는 사전을 펴놓고 오역이나 왜곡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오탈자를 번역의 문제로 보기도 힘들고, 번역의 오류를 편집자에게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안 되는 번역 결과물을 좋게 만드는 다수의 편집자의 노고가 번역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귀결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박상익은

좋은 번역자의 자격 요건을 외국어 이해력과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 그리고 우리말 구사 능력으로 꼽는다. 우리 말 구사 능력이 중요한 것은 국내 최고 수준의 번역가로 꼽히는 이윤기, 안정효, 김석희 등이 번역가인 동시에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명 번역자의 경우에도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이윤기가 번역한『장미의 이름』에서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진짜?’라고 묻고 싶어진다. 철학박사 강유원이 이 책에 담긴 철학적의미를 강의하면서 작성한 메모에는 300여군데를 지적하고 있다. 이윤기는 이를 받아들여 260군데를 바로잡았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제기를 받았지만 늦장 대응으로 사회적 이슈로 키운 경우도 있다. 1999년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가 오역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는 와중에 번역대상을 수상해 논란을 빗기도 했으며,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은 오역에 대한 정정이 늦어져 독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 초대형 베스트셀러인 다빈치 코드는 오역이라기보다는 창작에 가까운 내용 변경으로 문제가 되어 출판사가 전문번역가에게 맡긴다는 해명을 해야 했다.

 

많이 알려진 출판사들도 이런 오역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왜일까? 각각의 사건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최근 번역된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면 그 단초를 한 가지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수 백 만 부가 팔리며 인기를 끌고, 국내에서는 높은 선인세로 이미 기사화되어 있는 책이라면 빠른 번역을 요구하게 된다. 하루키 팬들의 열화와 같은 독촉도 한 몫을 해서 무라까미 하루끼의 『1Q84』는 순산을 했다. 다행스럽게 번역자가 그 책을 보고 있던 중이라 빨리 번역될 수 있었고, 출판사는 오탈자 찾기 이벤트를 걸만큼 자신감을 내비쳤다.

 

다른 이유는 번역자가 받을 낮은 기대이익도 한 몫을 한다. 번역을 연구 성과로 취급하지 않는 대학의 풍토와 몇 명의 알려진 번역자 외에는 낮은 보수도 이유가 된다. 김용옥은 그의 책 『대화』에서 책을 쓰는 일이 교수 봉급보다 못한 것을 육두문자를 섞어 토로한 적이 있다.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낮은 보수와 높은 노동 강도는 분야를 막론하고 평균적인 상황이니 번역을 둘러싼 환경만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독자가 눈이 밝아 좋은 번역자의 작품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주고 사주기만 한다면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좋은 번역서를 찾아낼 수 있을까. 전문가 같지는 않겠지만, 아마추어인 독자들도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오역, 거꾸로 번역한 반역 등을 알아볼 수 있는 눈 밝은 분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번역물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문화적 차이를 잘 해석하여 한국인의 문화적 감성으로도 잘 읽히는 책을 좋은 번역서로 보고 싶다. 직역과 의역을 두고 어떤 것이 맞는 가를 논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맞는 표현을 찾아낸 번역물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김정환이 번역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아침이슬)은 원전에 충실하게 번역된 책이다. 시인이자, 번역가이자 연극연출가인 김정환이 번역한 이 책은 어줍잖은 번역으로 산문이 되어버린 원문을 되살렸다. 우리는 안쓰는 ;(세미콜론)만 ,(쉼표)로 바꾸고 나머지는 원전에 맞게 충실히 작업을 했다. 줄 바꿈까지도. 셰익시피어를 다른 번역으로 읽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기도 할 수 있지만, 시어와 연극대사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마치 앞에 연극무대가 펼쳐져 있고, 내가 그 연극을 본다는 상상으로 읽게 만들고 또 그렇게 읽는다면 제대로 맛을 볼 수 있다.

 

또, 유머가 살아있는 책도 좋은 번역서로 꼽고 싶다. 유머는 문화적 차이가 첨명하게 드러나 쉽게 공감을 내지 못하는데, 살아있는 번역은 그 차이도 넘어선다. 『미국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역사나 과학의 교양서를 읽으며 유머를 느낄 수 있다면 두꺼운 책이 주는 중압감이 눈 녹 듯 사라진다.

 

뉴턴에게 어떻게 그런 놀라운 발견들을 많이 할 수 있었는냐고 묻자, “그것들을 그냥 생각하면서 해냈습니다.”라고 아무 참고도 되지 않을 답을 했다고 한다. (코스모스 p.156)

 

이 문장을 읽은 사람들은 ‘그러는 니가 더 웃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앞문장이 뉴턴이 미적분학을 발명한 내용에서 이어지는 것이라 대가에 대한 칭찬을 예상했는데 이런 표현이 나오니 긴장이 풀리고 굉장히 즐거워진다. 과학이 주는 딱딱함에 이런 유머를 구사한 칼 세이건 뿐만 아니라 번역한 홍승수 교수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좋은 번역서의 한 요소로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도 꼽고 싶다. 어려운 책임에도 술술 읽힌다면 번역의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좋은 결과를 내놓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은 번역가의 몫이다. 뤼팽 시리즈의 번역가 성기수는 책을 내는 내내 독자와 대화하면서 글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한다. 독자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되면 수용하기도 한다. 혹자들은 그래서 이 시리즈를 세계 최고의 뤼팽전집 번역물이란 찬사를 안기기도 한다. 권일영도 역자후기에 자신의 메일을 넣고 오역부분이 있으면 연락바란다는 글을 남겨 독자들에게 믿음을 준다.

 

사실 그런데 독자들에게는 좋은 번역물보다 나쁜 번역서가 더 기억이 남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쩌랴. 급조되어 엉망인 책을 보는 독자들의 마음도 탄다. 마이클 잭슨 사후에 나온 『문워커』는 문장뿐 만 아니라 사진자체도 조야해서 기쁜 마음에 선택한 손을 탓해야 했다. 누가봐도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번역을 탓하기는 힘들다.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끈 류시화의 번역물을 두고 길담서원의 박성준 대표에게는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많은 번역물을 낸 번역자라면 독자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을 기회가 더 많다. 다음은 한 도자의 이야기다.

 

번역이 총체적 난국이다. 완전히 프리스타일 번역으로 내용은 원전과 비슷하나 문장은 원본과 전혀 딴판이다. 오로지 내용만 읽을 셈이라면 술술 잘 읽히겠지만 책은 내용만으로 읽는 게 아니다. 원문에서 서너 줄로 된 문장을 번역가가 읽고 딱 한 줄로 요약해서 번역해 버리는 퀄리티. 게다가 주인공 이름, 작중 등장하는 자잘한 단어 등을 멋대로 번역한다. 『배터리』에서는 '세이하' 혹은 '세-하'라고 번역해야 할 이름을 뚝 잘라 '세하'로 번역(세-하와 세하는 엄연히 다른 이름). 『인 더 풀』에서 '미스치루'라는 단어를 '미스틸'로 번역(옳은 번역은 '미스터 칠드런' 혹은 'Mr.Children'-일본의 유명 밴드 이름)하고, ‘짐꾼’이라고 번역해야 할 단어를 일본어 그대로 읽어 ‘가방모치’라는 의미 불명의 단어로 해놓았다.

 

구글 한번 안 돌려보고 대충 번역한 다음 오타만 고쳐서 그대로 출판한다는 느낌이다. 미스치루 같은 건 그 단어 그대로 구글에 한번만 치면 첫 페이지에 미스터 칠드런 공식 홈페이지가 뜨는데....

 

 

동일한 독자가 김난주에 관해 쓴 글이다.

 

주인공 이름에서 혁명적인 오역을 범하고 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오역이 일부러 였다는 것. 그걸 일부러 오역한 이유는 한층 더 충격적이다. 김난주씨가 일본어로 책을 읽었는데, 실수로 주인공의 이름을 잘못 읽었다. 읽다보니 자기가 잘못 읽은 그 이름이 더 마음에 들어 잘못읽은 그대로 번역했다. 졸지에 주인공의 이름이 개명되었다. (『낙하하는 저녁』)

 

또한 조금 애매하다 싶은 단어는 멋대로 번역한다. 『go』에서 ‘펀치드렁크’라는 단어를 ‘주정뱅이 아버지’로 번역하였으나 사실 펀치드렁크는 ‘복싱선수와 같이 뇌에 많은 손상을 입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뇌세포손상증’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박상익은 그의 책에서 ‘역주’가 없거나 ‘옮긴이의 글’이 없는 경우 성의 없는 날림 번역서인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잘 못 번역된 책 찾기가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돈을 내고 책을 산 독자의 기대가 잘못된 번역으로 원작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생각해보면 독자의 아픈 매가 오히려 약이 아닐까 싶다.

 

한국 출판에서 번역물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베스트셀러에 외국번역물이 반을 넘는 경우도 흔하다. 그만큼 번역은 이제 중요한 일이다. 독자가 전문영역인 번역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이 독자자신도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좋은 책을 만나고 싶은 열정으로 이해할 일이다. 눈 밝은 독자들이 번역을 언급한 서평은 다른 독자의 선택에 중요한 잣대가 된다. 까탈스런 독자들 덕분에 번역자에 대하여 제대로 보상이 이루어지고, 전공지식과 번역 능력, 문장 표현력을 갖춘 번역자가 많아지는 상황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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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더스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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